[카테고리:] 소년 판타지

  •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751화

    강우진은 낡은 차에서 내렸다. 서쪽 하늘은 마지막 남은 태양의 핏빛 잔해를 붙잡고 있었고, 먼지 섞인 바람이 허름한 골목을 휘돌며 삭막한 황량함을 더했다. 750화가 넘는 시간 동안 그가 밟아온 수많은 발걸음 중, 오늘 이곳에 도착한 발걸음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십수 년 전, 그녀의 흔적을 쫓다 우연히 발견했던 낡은 고아원 기록에서 한 줄 적혀있던 ‘서연’이라는 이름. 당시에는 그저 스쳐 지나갔던 정보였지만, 최근 발견된 그녀의 어린 시절 그림 일기장 구석에 그려진 흐릿한 건물 스케치가 이곳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노을빛이 바래버린 벽돌 건물은 마치 오랜 상처처럼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폐쇄된 지 오래된 이곳은 이미 잡초가 무성했고, 창문은 깨져 있거나 판자로 막혀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추적의 끝이 과연 존재하는지, 때로는 스스로에게 되묻곤 했다. 하지만 서연이라는 이름 석 자가, 그리고 그녀의 미소가 담긴 흐릿한 사진 한 장이 그의 심장을 채찍질하며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녀의 어렴풋한 기억 속 미소는 여전히 그의 세상 전부였다.

    오래된 기억의 문

    강우진은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곰팡이 냄새와 먼지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부서진 가구 파편들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뒹굴고 있었다. 복도 끝,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공간은 이제 빛바랜 과거의 유령만 떠다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스치는 바람 소리가 마치 아이들의 속삭임처럼 들리는 착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그는 서연의 그림 일기장에서 본 스케치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건물의 특정 창문과 뒤뜰로 이어지는 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단서 삼아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복도 한쪽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액자에는 빛바랜 아이들의 단체 사진이 있었다. 강우진은 조심스럽게 액자를 내려 사진 속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의 시선이 한 아이에게 멈췄다. 삐딱하게 서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더 불안해 보이는 표정의 소녀. 서연이었다.

    사진 속 서연은 너무나 어렸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눈빛,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깊은 눈빛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세계 속으로 우진을 초대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지쳐 있던 우진의 마음에 다시 한번 희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곳 어딘가에, 서연의 흔적이, 그녀가 남긴 조각이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확신이 그의 피로한 심장을 다시금 뛰게 했다.

    먼지 속 숨겨진 공간

    사진 속 서연의 눈빛을 뒤로하고, 강우진은 그림 일기장의 스케치를 따라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뒤뜰은 무성한 잡초와 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한때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공간은 이제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덩굴을 헤치고 나아가 그림 속에서 보았던 낡은 나무 문을 찾아냈다. 문은 녹슬고 삐걱거렸지만, 굳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마치 시간 여행이라도 한 듯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작은 오두막이었다. 고아원 본관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고, 창문으로는 저녁노을이 길게 비쳐 들어와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벽에는 빛바랜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낡은 책장과 작은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강우진은 조심스럽게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분명 서연이 자주 찾던 비밀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섬세한 손길이 곳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

    책상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강우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무언가가 바로 이곳에, 그의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한 묶음의 편지, 빛바랜 꽃 한 송이, 그리고 낡은 일기장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편지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서연이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그가 알지 못하는 교류의 흔적들이리라. 강우진은 일단 편지들을 옆으로 밀어두고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일기장의 비밀

    일기장은 꽤 두꺼웠고, 겉면은 세월의 흔적으로 닳아 있었다. 첫 페이지에는 서연의 글씨체로 쓴 그의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우진에게’.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그녀가 직접 자신에게 남긴 메시지를 이제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일기장은 예상과는 달리 매일의 일상이 적힌 것이 아니었다. 대신 짧은 시구와 단상들, 그리고 때때로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문장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녀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감성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강우진은 페이지를 넘기며 그녀의 내면을 따라갔다. 사랑, 슬픔,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 그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녀는 혼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냈던가.

    한 페이지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다른 문장들과는 확연히 다른, 또렷하고 확고한 글씨체로 쓰인 구절이었다.

    “어둠은 빛을 두려워하지만, 빛 또한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나는 사라져야만 한다. 더 이상 아무도 다치지 않게. 나의 그림자가 당신을 덮치지 않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지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당신 곁에 머무를 거예요. 약속해요, 우진.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당신은 반드시 행복해야 해요.”

    강우진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녀가 자의로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위험에 처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어떤 거대한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일까?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는 다시 침착하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장에 다다르자, 더욱 또렷한 글씨로 쓰인 짧은 문장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모든 흔적은 지워질 거예요. 하지만 하나의 단서만은 남겨둘게요. 혹시라도, 혹시라도 당신이 여기까지 온다면. 나를 찾지 마세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정말 나를 이해한다면, 나의 마지막 흔적은 ‘아침 이슬이 가장 먼저 마르는 곳, 새벽의 별이 가장 늦게 지는 곳’에 있을 거예요. 그곳에서 모든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예요. 부디, 살아남으세요. 나의 소중한 우진.”

    새로운 새벽의 별

    강우진은 일기장을 든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아침 이슬이 가장 먼저 마르는 곳, 새벽의 별이 가장 늦게 지는 곳’. 그것은 장소를 나타내는 은유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말일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라졌다는 것. 이 모든 세월 동안 그는 그녀를 잃어버렸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녀는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그의 가슴은 아릿한 슬픔과 함께 뜨거운 투지로 타올랐다. 그녀는 그에게 마지막 단서를 남겼다. 그것은 그에게 자신을 찾지 말라는 경고이자, 동시에 그녀가 존재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다. 강우진은 일기장을 품에 안고 오두막을 나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별들 중, 어느 곳에 그녀의 ‘새벽의 별’이 숨겨져 있을까.

    강우진은 낡은 차에 다시 올랐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피로에 젖어 있지 않았다. 대신, 미지의 목적지를 향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했다. 서연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그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이제는 그녀를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녀를 숨게 만든 그 모든 진실을 파헤쳐야 할 때였다. 751화. 그의 여정은 이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 ‘아침 이슬이 가장 먼저 마르는 곳, 새벽의 별이 가장 늦게 지는 곳’. 그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풀어낼 실마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강우진은 차 시동을 걸었다. 낡은 엔진 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갈랐고, 그의 눈은 멀리 떨어진 밤하늘의 희미한 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희망, 그리고 절망. 그 모든 것을 안고 강우진은 다시금 길을 나섰다.

  • 비 내리는 골목길의 우산 수리공 – 제765화

    골목길을 가득 채운 빗소리는, 낡은 가게 안으로 스며들어 또 하나의 아련한 배경음이 되었다. 낡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회색빛 수채화 같았고, 지훈은 투박한 나무 작업대 위에 얹힌 낡은 우산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닳아 해진 우산살, 빛바랜 천 조각들 사이로 오래된 이야기들이 숨 쉬고 있는 듯했다. 그의 손놀림은 늘 그랬듯 침착하고 느렸지만, 그 속에는 세월의 흔적을 존중하는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번 비는 유난히 길군요.”

    지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삐걱이는 우산살을 바로잡았다. 수많은 우산을 고쳐오면서, 그는 우산이 단지 비를 막아주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과 희망, 때로는 상처를 담고 있는 작은 세상임을 깨달았다. 우산 하나하나에 깃든 사연들은 지훈의 마음속에 오래된 책처럼 쌓여갔다.

    바로 그때, 낡은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빗물을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잠시 가게 안으로 들이쳤고, 한 젊은 여인이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는 얇은 재킷을 입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따뜻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아이 우산 하나를 들고 있었다. 비록 지금 내리는 비를 막기에는 턱없이 작고 낡은 우산이었다.

    “안녕하세요, 수리공 아저씨.”

    수아였다. 얼마 전부터 간혹 지훈의 가게를 찾아와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던 그녀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의 공기처럼 차분했지만, 어딘가 간절함이 묻어났다. 지훈은 고개를 들어 수아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수아 씨. 이번에는 어떤 우산인가요?”

    수아는 지훈의 작업대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든 우산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것은 어릴 적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작고 앙증맞은 우산이었다. 우산 천에는 희미하게 색이 바랜 토끼와 다람쥐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이미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는 없었다. 우산살은 몇 군데 휘어져 있었고, 천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이 우산은… 고쳐달라고 가져온 게 아니에요.”

    수아는 우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길은 마치 잃어버린 친구를 만난 듯 조심스러웠다. “할머니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제 어릴 적 기억에는 없는 우산인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길이 가고, 손에서 놓을 수가 없더라고요.”

    수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릴 적 사고로 기억 일부를 잃었다고 했었죠? 이 우산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또 다시 아득해지기도 해요. 혹시… 아저씨는 이 우산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주 오래전에요.”

    지훈은 우산을 집어 들었다. 작은 우산은 그의 커다란 손 안에 쏙 들어왔다. 그는 찢어진 천의 가장자리를 만져보고, 녹슨 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눈빛은 수십 년간 수많은 우산을 보아온 장인의 눈빛이었다. 그림의 희미한 윤곽선을 따라 그의 엄지손가락이 움직였다. 토끼의 귀, 다람쥐의 통통한 볼… 그리고 우산대 가장 아랫부분에 아주 작게 새겨진, 거의 보이지 않을 법한 이니셜 ‘ㅅㅇ’ (S.A.).

    “음…” 지훈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우산들이 그의 기억 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우산… 이 그림체… 왠지 낯설지가 않네요.”

    수아는 숨을 죽이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 수아 씨 나이보다 훨씬 어렸을 때… 이와 비슷한 우산을 가지고 온 아이가 있었어요.” 지훈은 희미한 기억의 조각을 더듬었다.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이었죠. 아이 혼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이 우산보다 더 많이 찢어져서 너덜너덜한 상태였어요. 아이는 울먹이며 ‘이 우산을 꼭 고쳐주세요. 엄마가 선물해 준 소중한 우산이에요’라고 했었죠.”

    수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저인가요? 제가 그 아이였을까요?”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는 없어요. 워낙 많은 우산과 사람들을 만나왔으니. 하지만 그 아이의 우산에도 이런 토끼와 다람쥐 그림이 있었고, 특히… 우산대 아랫부분에 이렇게 조그맣게 새겨진 이니셜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아이가 직접 새긴 거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었지.”

    그는 수아의 우산대 아랫부분에 새겨진 ‘ㅅㅇ’ 이니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수아는 손을 뻗어 자신의 이름 이니셜과 똑같은 글자를 만졌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던 자신의 일부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정말… 제가 그랬을까요?”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저는 이 우산을 고쳐달라고 아저씨에게 가져온 기억이 없어요.”

    지훈은 우산을 뒤집어 우산살이 천에 박히는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그의 손가락이 특정 우산살 끝의 아주 작은 매듭을 톡톡 건드렸다. 다른 부분과는 달리, 그 매듭은 낡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닌, 나중에 덧대어 고정된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이 우산은… 두 번 고쳐졌을 수도 있겠네요.” 지훈이 말했다. “첫 번째는 아마 제가 그 아이의 너덜너덜한 우산을 고쳐주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해 주었을 테고… 두 번째는… 그 아이가 자라서, 즉 수아 씨가 고쳤거나, 아니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우산을 수아 씨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쳤을 수도 있고요.”

    그는 조심스럽게 그 매듭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이 매듭은… 제가 예전에 사용하던 방식이긴 하지만, 아주 드물게 쓰는 방법이었어요. 우산살 끝이 천을 뚫고 나올 때, 단순히 꿰매는 게 아니라 작은 천 조각으로 감싸서 한 번 더 묶어주는 방식이죠. 특히 아이 우산처럼 약한 우산에 주로 쓰던 방법입니다.”

    수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우산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 우산이 할머니 유품에서 나왔다면… 할머니가 고치셨을 리는 없어요. 할머니는 이런 손재주가 없으셨거든요.”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문득 그 아이가 이 우산을 고쳐달라고 가져왔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이 우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라고요. 그때는 그저 어린아이의 상상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수아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렁였다. 비밀? 이 낡은 우산에?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어떤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걸까? 그녀는 우산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어디를 봐도 특별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어떤 비밀이었을까요?” 수아의 목소리가 갈급해졌다.

    지훈은 우산을 돌려가며 자세히 살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글쎄요. 그 아이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제가 고쳐주면서 우산 천을 꼼꼼히 살피던 중… 이런 오래된 우산들 중에는 가끔 작은 주머니나, 아니면 천과 천 사이에 아주 작게 접힌 종이 같은 것을 숨겨두는 경우가 있곤 했죠. 특히나, 어딘가 특별한 ‘흔적’이 있는 곳에요.”

    지훈은 우산 천의 바깥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림이 그려진 부분, 그리고 그림 옆에 작게 새겨진 이니셜… 그리고 우산 살과 천이 만나는 곳 중, 아까 지훈이 만졌던 유난히 튼튼하게 덧대어진 매듭 부분 바로 안쪽이었다.

    “수아 씨, 혹시 이 부분을 자세히 보실래요? 다른 부분과는 달리 아주 미묘하게… 천이 겹쳐진 느낌이 들지 않나요?”

    수아는 지훈이 가리킨 곳에 손을 댔다. 낡아서 흐릿해진 우산 천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빛바랜 토끼 그림의 귀 옆, 아주 작게 덧대어진 듯한 봉제선이 느껴졌다. 너무나도 정교해서 육안으로는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그 봉제선조차 원래의 천과 한 몸이 된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숨겨진 주머니? 혹은 봉투?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애틋한 메시지일까. 수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 작은 봉제선을 더듬었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지는 골목길에서, 그녀의 심장은 잊혀진 과거와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746화


    새로운 그림자, 묵은 약속

    서울의 겨울은 냉정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빌딩 숲은 차가운 침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이진우는 30층 높이의 집무실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남산을 응시했다. 몇 주째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비단 눈앞의 보고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래되고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그림자였다.

    “진우 씨, 이 서류는 오늘까지 검토해주셔야 합니다.”

    비서 한소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진우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소연은 진우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큰 부담을 느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회사를 물려받은 이래, 진우는 단 한 순간도 편히 숨 쉬어본 적이 없었다. 특히, 이번 재개발 프로젝트는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가장 잔혹한 상실의 기억을 함께 간직한 곳이었다.

    “알겠습니다.” 진우는 겨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거칠었다.

    소연은 조용히 그의 옆에 다가섰다. “이젠 그만 잊을 때도 되지 않았나요? 모든 사람들이 진우 씨를 믿고 있어요.”

    “잊어?” 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 때문에 내가 여기에 있는 건데.”

    그의 시선은 창밖의 희미한 설경을 좇았다. 어린 시절, 따뜻했던 그 집 마당에서 할머니와 함께 뒹굴던 눈밭, 그리고 작은 손으로 붙잡았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 그때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은 우리 가족의 뿌리이고, 너의 미래란다. 절대로 놓치지 마렴.’ 그 약속은 단순한 유산의 보존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과 희생,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담고 있었다.

    흔들리는 기반

    진우는 책상으로 돌아와 두꺼운 프로젝트 보고서를 펼쳤다. ‘한울동 재개발 사업’.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회사에는 막대한 이득이 따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의 과거와 가장 중요한 기억들이 묻힌 땅이 사라질 터였다. 보고서에 첨부된 조감도 속에는, 익숙한 골목들과 낡은 상점들이 모두 지워진 채 거대한 고층 복합 상가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박 이사님이 재촉하십니다. 최종 승인을 서둘러 달라고요.” 소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 이사는 회사의 주요 주주이자, 이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인물이었다.

    진우는 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승인 서류에 서명하는 순간, 그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사회의 압력은 거셌고, 회사의 미래는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달려있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의 개인적인 감정과 회사의 이익,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그때, 그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오랜 시간 연락이 뜸했던 고모였다. 진우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진우야…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니?” 고모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애처로웠다.

    “네, 고모. 별일 없으시죠?”

    “아니, 사실은… 네 할머니 유품 정리하다가 이걸 찾았단다. 네가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고모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게 뭔데요, 고모?”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한테 꼭 전해주라고 했던 상자인데… 그동안 깜빡했지 뭐냐. 너 결혼할 때 주라고 하셨는데, 지금쯤 네게 더 필요할 것 같아서.”

    고모의 말에 진우는 순간 할머니의 온화한 미소를 떠올렸다. 결혼할 때 주려 했던 상자라니.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 상자가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약속을 지키라는 할머니의 마지막 메시지일까?

    뜻밖의 발견

    진우는 고모에게 바로 찾아가겠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소연은 그의 얼굴에 스치는 복잡한 감정을 읽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진우 씨?”

    “고모가… 할머니 유품 중에 내게 전해줄 게 있다고 하네. 결혼할 때 주려고 했다던 상자래.”

    소연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 약속과 관련된 것일까요?”

    진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잊고 지냈던 상자가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할머니가 이 모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는 보고서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 댁에 다녀와야겠어.”

    소연은 말없이 그를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 창문 밖으로, 첫눈이 조용히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작은 눈꽃들이 바람에 실려 춤추듯 내려앉는 모습이 꼭 그날과 같았다.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던 할머니의 미소. 그리고 그 미소 아래 감춰졌던, 한 소년의 맹세.

    눈은 점점 더 굵어졌다. 서울의 회색빛 풍경은 순식간에 하얀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진우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그 상자 안에, 이 모든 딜레마를 풀 해답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은, 그를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밀어 넣을 또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그의 발걸음은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 그리고 그 선물이 담고 있을 미지의 약속을 향해 재촉되고 있었다. 겨울 눈꽃은 쉴 새 없이 내렸고, 그의 마음속에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감돌았다.


  • 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748화

    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748화

    볕 좋은 오후, 낡은 사진관 ‘기억의 방’에는 늘 그랬듯 희미한 햇살이 비스듬히 들이쳤다. 먼지가 부유하는 공기 속에서, 사진관 주인 지훈은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창가에 앉아 빛바랜 앨범을 만지작거리는 김 여사님. 그녀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았다. 반백 년 전 사라진 동생의 흔적을, 혹시 이 낡은 사진관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 하나로.

    김 여사님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지훈에게 예전 자료를 다시 한번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훈은 그녀의 간절함을 알기에, 이미 수십 번도 더 뒤져본 먼지 쌓인 상자들을 기꺼이 다시 열었다. 철수, 김 여사님의 동생.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름. 그녀는 철수가 마지막으로 이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놓지 못했다.

    “지훈 씨, 오늘은… 아무것도 없겠지?” 김 여사님의 목소리에는 이제 체념이 섞여 있었다. 지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지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여사님. 이 사진관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으니까요.” 그는 스스로에게도, 김 여사님에게도 건네는 위로였다. 사진관은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왔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필름 속에 봉인된 채 잠들어 있었다.

    그날 오후, 지훈은 평소 손대지 않던 창고의 가장 구석진 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잊혀진 시간들의 상자’라고 불렀던 낡은 나무 궤짝이 그곳에 있었다. 먼지투성이 궤짝을 열자,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수십 년간 묵혀 있던 낡은 필름통과 유리 건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깨지기 쉬운 유리 건판들이 한가득이었다. 조심스럽게 하나씩 꺼내 빛에 비춰 보던 지훈의 손이 멈칫했다.

    한 유리 건판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흐릿한 상이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김 여사님의 동생, 철수였다. 김 여사님이 보여준 빛바랜 사진 속 젊은 철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 굳게 다문 입술과 슬픔이 깃든 눈동자.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작고 하얀 종이 한 조각.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은, 김 여사님이 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마지막 순간’일지도 몰랐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유리 건판을 들고 현상실로 향했다. 붉은 안전등만이 희미하게 빛나는 어둠 속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현상액을 준비했다. 수십 년 만에 빛을 볼 상(像)이었다. 시간의 무게를 견뎌온 화학약품들이 천천히 필름 위로 스며들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현상액 속에서 천천히 윤곽을 드러내는 철수의 얼굴.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에 들린 종이 조각의 글씨가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누나에게. 혹 내가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너무 슬퍼 마오. 나는 늘 누나의 곁에 있을 것이오. 이 사진관 뒤뜰, 벚나무 아래에 내가 남긴 것이 있으니, 세월이 흘러도 꼭 찾아주시오. 사랑하는 나의 누나.’

    글씨는 투박했지만, 그 안에 담긴 절절한 마음은 어떤 웅변보다 강렬했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이 단순한 사진 한 장이, 한 여인의 반평생을 위로하고, 한 형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인화했다. 갓 뽑아낸 따뜻한 사진 속에서, 젊은 철수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김 여사를 바라보는 듯했다.

    “김 여사님…!” 지훈은 사진을 들고 창가로 달려갔다. 김 여사님은 지쳐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또 다른 하루의 실망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훈은 아무 말 없이 인화된 사진을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이 사진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손에 들고 있던 앨범이 바닥에 떨어졌다. 푸석한 손이 떨리며 사진을 움켜쥐었다.

    “철수… 철수야…!” 그녀의 입에서 오랜 침묵을 깨고 터져 나온 것은 한 맺힌 울음이었다.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던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사진 속 철수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흐느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종이 조각을 발견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그 메시지를 읽어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줄 때마다, 김 여사님의 어깨는 더욱 크게 들썩였다.

    “내가 남긴 것이 있으니… 벚나무 아래…” 그녀는 사진을 품에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 울음 속에는 수십 년의 그리움, 절망,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해방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철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하지만 동시에, 철수가 그녀를 잊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그녀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증표였다.

    김 여사님은 울음을 그치고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니었다. “지훈 씨…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내 평생 소원을, 이렇게… 이루어주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진심 어린 감사함이 가득했다. 지훈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오래된 사진관의 역사가, 오늘 또 하나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지훈은 김 여사님과 함께 사진관 뒤뜰로 향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늙은 벚나무 아래.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어떤 추억이, 또 다른 형태의 철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 여사님의 마음속에는 이제 더 이상 차가운 공허함 대신, 따뜻하고 확실한 사랑의 기억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이 가져다준, 기적 같은 위로였다. 다음 날, 김 여사님은 다시 사진관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절망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찾아 나설,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꿈을 파는 상점 – 제752화

    제752화: 오래된 커피 향

    도시의 심장이 잠든 시간, 희미한 가스등 아래로 그림자처럼 숨어든 골목길 끝에 ‘꿈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낡은 목재 간판에는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새겨진 글자들이 세월의 이끼를 품고 있었고,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코끝을 간질이는 묘한 향이 손님을 맞았다. 향은 때로는 잊힌 추억의 달콤함이었고, 때로는 이루지 못한 소망의 아련함이었다. 오늘은 그 모든 향 위로 오래된 커피의 구수함이 덧입혀져 있었다.

    정여사님은 굽은 등으로 천천히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얇은 스카프로 흰 머리카락을 단정히 감싼 그녀의 얼굴에는 깊어진 주름만큼이나 깊은 고독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맑고, 무언가를 갈망하는 불꽃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상점의 주인은 묵묵히 카운터 뒤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의 머리와 깊은 눈매,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조용한 시선을 가진 남자. 그는 상점의 모든 역사를 짊어진 듯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정여사님. 752번째 방문이시군요. 오늘은 어떤 꿈을 찾으십니까?” 상점 주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오랜 권능이 배어 있었다.

    정여사님은 작은 한숨을 쉬며 나무 의자에 앉았다. “점장님, 오늘은… 아주 특별한 꿈을 사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니, 특별하다기보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꿈이랄까요.”

    잊힌 아침의 향기

    상점 주인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손님의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깊은 침묵 속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었다.

    “30년도 더 된 일입니다. 제 남편과 제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죠.” 정여사님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 쥐듯, 허공에 작은 원을 그렸다. “아직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모든 것이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비 오던 토요일 아침이었어요. 남편은 늦잠을 자고 있었고, 저는 먼저 일어나 커피를 내렸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따뜻한 커피 향이 집안 가득 퍼졌어요. 남편이 그 향에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주방으로 걸어왔죠. 늘 하던 대로 제 등 뒤에서 저를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좋은 아침’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커피는 좀 쓰고, 토스트는 살짝 탔지만…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행복했던 아침이었어요. 우리는 그저 나란히 앉아 세상만사 걱정 없이 웃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아침이었죠.”

    정여사님의 목소리는 점점 더 아련해졌다. “그게… 제가 그 아침을 생생히 기억하는 마지막이에요. 그날 오후, 남편의 회사에서 갑작스러운 소식이 들려왔고, 저희의 평온했던 일상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끝없이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 평화롭던 아침은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마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는 상점 주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점장님, 저는 그 커피 향이 가득했던 아침을 다시 느끼고 싶어요. 그 순간의 온기, 남편의 목소리, 그리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던 저의 마음을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시작되기 전, 그 순수했던 행복의 순간을요.”

    꿈의 대가

    상점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여사님, 상점의 꿈은 단순한 재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당신이 과거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감정의 결정체죠.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그날의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담겨 있던 잃어버린 ‘감정’일 것입니다.”

    “네, 맞아요… 그 감정요.”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꿈은 현실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상점에서 얻은 꿈이 아무리 달콤하다 할지라도, 깨어난 현실은 더욱 쓰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혹은, 그 꿈이 너무 강렬하여 현실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죠. 당신은 이 대가를 기꺼이 치르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정여사님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그녀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점장님, 저는 수십 년을 그 아침의 잔향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이미 현실은 충분히 쓰고, 흐릿합니다. 제게는 다시 한번 그 아침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제 남은 생을 버티게 할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상점 주인은 조용히 상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된 약장 같은 서랍들을 뒤지더니, 투명한 작은 유리병 하나를 들고 나왔다. 병 속에는 은은한 황금빛 액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희미하게 커피 향이 풍겨 나오는 듯도 했다.

    “이것은 ‘새벽 이슬’입니다. 30년 전, 당신의 아침이 가장 순수했던 순간의 감정에서 채취한 기억의 정수죠. 하지만 온전히 그 시절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현재, 당신의 그리움, 당신의 후회가 뒤섞여 새로운 형태로 태어난 꿈입니다.” 그는 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시는 순간, 당신은 가장 깊고 따뜻한 잠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의 잃어버린 아침을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정여사님은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유리병 속에서 따스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다시 만난 아침

    집으로 돌아온 정여사님은 침대에 걸터앉아 유리병을 응시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마침내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병마개를 열어 황금빛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그녀는 스르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둠 속에서 빛이 스며들었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낯익은 부엌 식탁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부드러운 빗줄기가 도시를 촉촉이 적시고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잔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구수한 커피 향.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30년 전 그 모습 그대로의 남편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의 부스스한 머리카락, 늘 입던 낡은 잠옷 셔츠.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한 모금 마시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좋은 아침이야, 여보.”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기억 속보다 훨씬 더 또렷하고 따뜻했다.

    정여사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꿈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현실보다 더 뜨거웠다. 남편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꿨어? 아니면… 나쁜 꿈이었나?” 그의 눈빛에는 걱정과 함께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아니에요… 아니, 너무나 좋은 꿈이에요.” 정여사님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우리가 다시 이렇게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이 순간이 꿈만 같아서요.”

    남편은 웃으며 그녀의 젖은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는 늘 이렇게 함께할 텐데. 앞으로도 수많은 아침을 같이 맞이할 거야. 비 오는 날이든, 햇살 쨍한 날이든.”

    그 순간, 정여사님은 깨달았다. 이 꿈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었다. 그녀의 깊은 그리움이 과거의 기억을 왜곡시키고,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남편의 말이, 그의 따스한 손길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던 미래에 대한 약속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사랑의 약속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커피 향은 마치 시간을 멈춘 듯 온 공간을 감쌌고, 빗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냈다. 남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었고, 잊었던 평온과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시 찾아온 평온

    천천히, 꿈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정여사님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남편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늘 당신 곁에 있어, 여보. 당신의 모든 아침에, 당신의 모든 기억 속에.”

    정여사님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그녀를 맞이했다. 여전히 그녀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가슴속에는 더 이상 찢어지는 듯한 슬픔만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던 곳에 무언가가 따뜻하게 채워진 느낌이었다. 옅게 드리워진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커피를 내렸다. 구수한 커피 향이 집안 가득 퍼졌다. 30년 전 그 아침처럼. 다만 옆에 남편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혼자라고 느끼지 않았다. 남편이 남긴 사랑, 그 아침의 따뜻함, 그리고 그 꿈속에서 얻은 새로운 깨달음이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커피잔을 든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태양은 새로운 하루를 약속하고 있었다. 정여사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꿈을 파는 상점에서 산 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갈 새로운 희망이자,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증거였다. 그녀는 더 이상 희미해진 아침을 좇지 않았다. 대신, 그 아침이 그녀의 현재와 미래를 따뜻하게 비추는 등불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 달빛 아래 춤추는 그림자 – 제745화

    밤은 깊었고, 은빛 달빛은 고요한 정원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바람 한 점 없는 밤에도 희미하게 춤추는 듯했다. 고목의 가지들은 달빛을 머금고 푸르게 빛났고, 그 아래에 선 이안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반쯤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의 눈빛만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안은 차가운 돌 난간을 짚은 채,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긴 산을 응시했다. 지난 수십 년간 그를 짓눌러온 비밀의 무게가 오늘 밤, 마침내 그 서늘한 실체를 드러낼 참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그의 표정은 마치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그저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 약속된 순간은 그림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고요를 깨는 발걸음

    정원의 작은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낡은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며 이안의 심장을 더욱 강하게 울렸다. 곧이어 달빛 아래로 한 여인의 모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소하였다. 그녀는 얇은 비단옷 위에 겉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밤의 냉기 속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빛처럼 따뜻했다.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그녀의 눈빛은 이안에게 곧장 향했다.

    “이안….”

    소하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고,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이안이 최근 며칠간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그림자에 사로잡힌 듯, 늘 깊은 사색과 고뇌 속에 잠겨 있었다. 그 그림자는 분명 소하와도 관련이 있을 터였다.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하를 바라봤다. 그의 눈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들이 달빛 아래서 희미하게 번졌다. 사랑, 연민,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슬픔. 그 모든 감정들이 소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왔구나.” 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침묵 속에 갇혀 있던 목소리 같았다.

    소하는 몇 걸음 더 다가섰지만, 이안과의 거리를 완전히 좁히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주겠어요? 당신의 그림자가 너무 깊어서, 저까지 숨이 막혀요.”

    소하의 말에 이안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떤 말부터 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전해야 할까. 지난 수백 년간 지켜온 맹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예언,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게 될 소하. 이 모든 것이 마치 엉킨 실타래처럼 그의 목을 졸랐다.

    달빛 아래의 고백

    “소하… 내가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아니,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

    이안은 돌 난간에서 손을 떼고 소하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 길게 늘어졌다. 소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우리 가문은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예언을 지켜왔다. 아니, 너의 가문이지. 너는 그 예언의 마지막 계승자다.”

    소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예언? 계승자? 그녀는 자신의 평범한 삶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에 혼란스러워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그저 평범한….”

    “아니다, 소하. 너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이안은 소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다. “너의 몸 안에는, 이 세상을 지탱하는 고귀한 힘의 원류가 흐르고 있다. 그 힘은… 그림자 속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탐해온 빛이며, 동시에 그들의 유일한 파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소하는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뒤바뀌는 소리였다. 마치 꿈속의 이야기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그림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그리고 저는… 제가 가진 힘이라니,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소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무나도 평범한 손이었다. 이 손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을 가졌다고?

    이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림자 존재라고 부르는 자들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의 세상을 잠식해온 어둠의 세력. 그들은 너의 힘을 이용하여 이 세상을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두려 할 것이다. 너의 힘이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너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달빛 아래, 정원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밤벌레 소리만이 존재했다. 소하는 무릎이 꺾이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래서… 당신은 그동안 저를 지켜왔던 건가요? 저의 운명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소하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 남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도 침묵해 왔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이안은 고개를 떨궜다. “미안하다, 소하.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너의 힘이 각성하는 순간, 그림자 존재들이 너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될 것이었다. 그 순간을 늦추기 위해… 너를 평범한 삶 속에 숨겨왔다.”

    “하지만 이제….” 이안은 다시 소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지만, 그 안에 담긴 슬픔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너의 힘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그림자 존재들 또한 그 기미를 감지하기 시작했지. 며칠 전, 네가 느꼈던 낯선 기운들… 그것은 그들이 너에게 보낸 시험이자 경고였다.”

    새로운 그림자

    소하는 며칠 전 밤, 잠결에 느꼈던 싸늘한 시선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떠올렸다.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녀는 이제 모든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들과 싸워야 하나요?” 소하의 목소리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서려 있었다. 사랑하는 이안의 고통을 보며, 자신에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단순히 자신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소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것보다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네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떤 길을 택하든 너의 곁을 지킬 것이다. 마지막까지.”

    바로 그때였다. 정원의 고요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저 멀리, 정원 담장 너머의 숲에서 번쩍이는 푸른 섬광이 일었다. 이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벌써…!”

    그의 눈동자가 급하게 숲을 향했다. 소하 또한 그 섬광을 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이안이 말한 ‘그림자 존재’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두려움과 함께,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고목의 나뭇가지들을 거칠게 흔들었고, 달빛 아래 그림자들이 더욱 격렬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위협적인 그림자들이었다.

    “소하, 내 뒤에 있어!” 이안은 소하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내며 몸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언제나 그의 일부였던 단검이 있었다. 달빛 아래, 그 단검의 칼날이 차갑게 빛났다.

    소하는 이안의 넓은 등에 가려진 채, 저 멀리 숲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그림자들이 마치 연기처럼 피어오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형체 없는 검은 덩어리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악의는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했다. 그녀의 심장 안에서 솟아오르는 알 수 없는 힘이, 이제 막 깨어나려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안이 말했던 ‘각성’의 순간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달빛은 여전히 정원을 환히 비추고 있었지만, 그 빛마저도 그림자들의 침공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듯했다. 소하는 이안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이 운명과 맞서야 했다. 이 밤, 달빛 아래에서 춤추는 그림자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741화

    차가운 겨울의 옷자락이 완전히 걷히고, 산자락에는 연분홍빛 진달래가 수줍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햇살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굳게 닫혔던 창문을 넘어 스며드는 바람에는 흙내음과 연한 풀잎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서연의 마음에도 겨우내 얼어붙었던 희망의 작은 싹이 움트는 듯했으나, 올해는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깊은 상실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오랜 시간을 고통과 기다림 속에서 보낸 서연은 이제 익숙해진 듯 보였다. 아침마다 차를 우리는 손길은 변함없이 차분했고, 뜰의 식물들을 돌보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혈육, 동생 준우를 향한 그리움이자, 그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7년 전, 불길한 소식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준우. 그의 빈자리는 서연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아가씨, 이제 아침 식사 준비 다 되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서연의 곁을 지켜온 화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화연은 서연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준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서연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슬픔을 알았기에, 쉽사리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새싹들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속삭이듯 스쳐 가는 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문득, 그 바람에서 낯설지 않은 향기가 느껴졌다. 어릴 적 준우와 함께 뛰어놀던 뒷산 오솔길에서 맡았던, 아주 희미하지만 확실한 들꽃의 향기였다. 서연은 잠시 숨을 멈추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곳에는 평범한 봄 풍경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서연에게 화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가씨, 어제 밤늦게 멀리서 온 손님이 계셨습니다. 혹시 아실는지… ‘강’이라고 합니다.”

    서연의 손에서 펜이 멈췄다. ‘강’이라는 이름은 그녀에게 그리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준우가 사라지기 전, 그와 함께 비밀스럽게 연구하던 고대 기록 전문가의 성(姓)이었다. 준우는 항상 그를 ‘강 선생’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강 선생은 준우가 사라진 이후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리고 지금, 7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강 선생이요? 지금 어디에…?”

    서연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화연은 서연의 반응을 읽고는 그녀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 문을 열자,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깊은 눈빛은 여전했다.

    “오랜만이십니다, 서연 아가씨.”

    강 선생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서연은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이미 거친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강 선생, 7년 만입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리고 혹시… 준우 소식이라도 아시는 겁니까?”

    서연은 망설임 없이 핵심을 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힘이 없었다. 강 선생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창밖을 응시했다. 창밖으로는 봄바람이 흔들리는 벚꽃 가지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꽃잎 몇 개가 바람에 실려 서재 안으로 날아들었다.

    “아가씨,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준우 도련님은… 살아계십니다.”

    그 한마디에 서연의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동시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살아계신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던 말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어떻게… 어떻게 아십니까? 7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었는데…”

    강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한 켠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와 작은 은제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이것은 준우 도련님께서 직접 저에게 전해달라 부탁하신 것입니다. 지난겨울, 아주 외진 곳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잠시 이 땅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서연은 상자 안의 물건들을 응시했다. 은제 장신구는 어릴 적 준우가 직접 조각해 그녀에게 선물했던 작은 새 모양의 팬던트였다. 한쪽 날개가 부러져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양피지 두루마리에는 준우만이 알 수 있는 고대 문자로 빼곡히 글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준우가 항상 연구하던 그 언어군요.”

    강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그가 사라진 이유와,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가씨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그리고 아가씨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서연은 손을 뻗어 팬던트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은의 감촉이 그녀의 손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7년의 세월이 그 순간 모두 사라지고, 마치 어제 일처럼 준우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임무라니요? 대체 무슨 임무입니까?”

    강 선생은 잠시 망설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것은 저도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찾던 ‘시간의 문’과 관련된 일이라고만 들었습니다. 그는 현재, 오래전 멸망했다고 알려진 고대 왕국의 흔적을 쫓고 있습니다. 그곳에… 세상을 뒤바꿀 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시간의 문. 고대 왕국. 서연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거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준우의 사라진 7년이 그저 허무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그가 살아 숨 쉬며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음을 알게 되자, 그녀의 마음속에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 선생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절망의 그림자가 없었다. 오직 강렬한 결단과 희망만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준우가 제게 전해달라 한 것이라면,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봄바람이 다시 서재 안으로 불어와 양피지 두루마리를 살짝 들췄다. 바람에 실려 온 들꽃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그것은 단순히 후각적인 자극이 아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전해진 봄바람의 속삭임은, 잊고 있던 희망의 씨앗을 그녀의 가슴에 다시 심는 소식이었다. 준우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그 소식은 서연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벅찬 서곡이 되었다.

    서연은 팬던트를 꽉 쥐었다. 차가운 은의 감촉은 이제 따뜻한 온기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는, 오랫동안 잃었던 퍼즐 조각을 드디어 찾았다는 안도감과 준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그녀의 삶은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과 함께.

  • 꿈을 파는 상점 – 제759화

    세상의 모든 색채가 바래고, 시간의 흐름마저 잊힌 듯한 거리의 끝자락에 ‘꿈을 파는 상점’이 있었다. 간판조차 희미해 흐릿한 글자만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그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언제나 망설임 없이 정확했다. 상점의 창문은 늘 먼지로 덮여 있었으나, 그 너머에서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든 염원과 미련, 그리고 사라진 희망의 조각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늘, 제759화의 문을 연 이는 유진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낡은 나무 바닥을 삐걱이게 했고, 그 소리는 상점 안의 정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유진의 눈은 수많은 진열장 사이를 헤매었다. 어떤 진열장에는 어린 시절의 환희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 다른 진열장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맹세가 서린 낡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누군가의 꿈이었다.

    상점지기 심연과의 대면

    상점의 가장 안쪽,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고요히 책을 읽고 있던 이는 상점지기 심연이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지만, 눈빛만은 세상 모든 슬픔과 기쁨을 꿰뚫어 보는 듯 영롱했다. 유진은 심연의 앞에 섰고,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찾으시는 꿈이 있으신가요, 손님?” 심연의 목소리는 오래된 종소리처럼 낮고 울림이 있었다.

    유진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고민했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지만 그녀의 가슴속 깊이 박힌 그리움은 모든 이성을 잠재웠다. “네… 제 동생, 수아의 꿈을 찾고 싶습니다.”

    심연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이미 떠난 이의 꿈이라… 드문 요청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이지요.”

    “수아는… 어린 나이에 떠났어요. 스물셋, 꿈 많던 나이에. 늘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자신의 색깔로 물들이고 싶어 했죠. 하지만 그 꿈이 어떻게 펼쳐졌을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유진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저는 보고 싶어요. 수아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어떤 꿈을 이루며 살았을지.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그 빛나는 미래를… 한 번만이라도.”

    심연은 조용히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유진의 가장 깊은 곳, 슬픔으로 얼룩진 영혼의 조각까지 꿰뚫는 듯했다. “이루지 못한 꿈,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꿈은 가장 강력한 염원이 깃들어야만 형상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대가가 필요하지요.”

    꿈의 대가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수아의 꿈은 자신의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다.

    “대가란 돈이나 물질이 아닙니다, 손님. 꿈을 사기 위해서는, 당신의 소중한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특히나 이처럼 강렬한 소망의 꿈은… 당신의 일부를 가져가지요.” 심연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이 수아의 빛나는 미래를 사는 대가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가장 최근의 ‘완벽한 기쁨의 기억’ 하나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질 겁니다.”

    유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최근의 완벽한 기쁨의 기억이라니.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달, 오랜만에 떠났던 바닷가 여행이 떠올랐다. 파도 소리에 맞춰 웃고, 따스한 햇살 아래서 평화로움을 만끽했던 순간. 그때만큼은 수아의 그림자가 옅어져,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 기억은 그녀가 힘든 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위안이었다.

    “그 기억을 잃으면… 전 다시는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없나요?” 유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대가로, 수아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를, 단 한 번의 꿈으로 완벽하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심연의 질문은 마치 심판의 소리 같았다.

    유진은 눈을 감았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던 시원한 바람, 햇살에 반짝이던 물결, 모래사장에 새겨진 발자국…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만큼, 스물셋에 멈춰버린 수아의 웃음소리와,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재능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수아의 못다 핀 꿈에 비하면, 자신의 한 조각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동생의 꿈을 살게요.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꿈의 여정

    심연은 조용히 일어나 진열장 중 하나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은색 벨벳으로 덮인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영롱하고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점차 커지더니 작은 구슬 형태로 변해 유진의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구슬 속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색채가 소용돌이치며, 마치 살아있는 그림처럼 움직였다.

    “이것이 당신 동생의 꿈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잠시 동안 수아가 될 것입니다. 수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수아의 마음으로 느낄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며, 당신이 내어준 기억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구슬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심연이 안내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자,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눈을 뜨자, 유진은 더 이상 유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아였다. 몸은 훨씬 가볍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색채로 가득했다. 그녀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고, 눈앞에는 거대한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작업실 창밖으로는 이름 모를 도시의 활기찬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업실 벽에는 이미 수십 점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하나같이 생동감 넘치고, 빛으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 수아가 그리던 색깔, 형태, 그리고 표현 방식이 놀랍도록 성숙하고 깊어진 모습이었다.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묘사를 넘어, 영혼을 담고 있었다.

    수아가 된 유진은 붓을 들었다. 캔버스 위로 새로운 색깔들이 물들기 시작했다. 망설임 없는 붓질은 마치 오랫동안 계획된 것처럼 정확하고 자유로웠다. 그녀는 그림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활짝 웃는 얼굴, 행복에 가득 찬 눈동자.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과 똑같이 그림을 그리며 미소 짓는, 조금 더 늙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유진의 모습이 있었다. 이 꿈속에서, 수아는 유진과 함께 나이를 먹고, 함께 꿈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수아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전시회는 전 세계를 순회했고,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 앞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작은 아이를 품에 안는 기쁨도 누렸다. 캔버스 위에 아이의 얼굴을 그리며 웃는 수아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 담겨 있었다.

    수아는 한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 주름진 손으로도 여전히 색채를 탐닉하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그녀의 그림은 점점 더 깊어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담아냈다. 늙고 지친 몸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젊은 시절처럼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아니 수아는, 충만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단 한 순간도 후회 없이, 오직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그녀는 평화롭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깨어남, 그리고 남겨진 것

    꿈에서 깨어났을 때, 유진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몸은 다시 무거워졌고, 세상의 색채는 이전처럼 평범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과 먹먹함으로 가득했다. 수아는 그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삶을 살았구나. 미처 피어보지 못했던 동생의 꿈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일어섰다. 몸에 힘이 없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그녀는 방을 나와 상점지기 심연의 앞에 다시 섰다.

    “꿈은 어떠셨습니까, 손님?” 심연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아름다웠어요… 너무나도… 찬란했어요.” 유진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제 동생은… 그렇게 행복하게, 완벽하게 꿈을 이루며 살았더군요.”

    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이제 당신이 지불한 대가를 회수할 차례입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최근의 ‘완벽한 기쁨의 기억’, 바닷가에서 보냈던 평화로운 순간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희미한 안개처럼, 그 기억은 그녀의 의식 속에서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텅 빈 공간만이 남아 있었다. 슬픔과 함께 찾아온 작은 충격.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허함이 그리 아프지만은 않았다. 수아의 꿈이 남긴 여운이 너무나도 깊었기 때문일까.

    유진은 상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거리는 여전히 희미했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바닷가의 추억으로 위안을 삼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아의 찬란한 꿈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남겨진 자에게 주어진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였고, 살아갈 용기를 주는 메시지였다.

    유진의 발걸음은 상점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비록 하나의 소중한 기억을 잃었지만, 그녀는 그보다 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잃어버린 자의 꿈을 대신 꾸는 것으로,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야 했다. 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찬란한 색채로 자신의 남은 삶을 채워나가야 할 때였다.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붓을 들고, 아직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 앞에 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꿈을 파는 상점은 그렇게, 또 한 사람의 삶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 비 내리는 골목길의 우산 수리공 – 제236화

    비 내리는 골목길의 우산 수리공 – 제236화

    빗물 스미는 골목, 시간의 잔해

    골목길은 비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새벽부터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빗줄기는 이제 가늘어졌지만, 촉촉한 습기와 눅진 흙냄새는 여전히 골목의 숨결처럼 진득했다. 지훈은 낡은 나무 작업대 위에 엎드려 부러진 살대 하나를 섬세하게 다듬고 있었다. 삐걱이는 의자 소리, 닳아버린 장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 그리고 창밖으로 끊이지 않는 빗방울 소리만이 그의 작은 수리점을 채웠다.

    236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는 오늘, 지훈의 마음속은 유난히 더 먹먹했다. 지난밤 꿈속에서 그는 잊고 지내던 얼굴을 다시 마주했다. 환한 미소, 비에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손에 들린 낡은 붉은 우산.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는 꿈속의 그녀가 들고 있던 우산처럼, 이제는 형태만 남은 추억의 잔해들을 끊임없이 이어 붙이는 삶을 살고 있었다.

    비 내리는 골목길의 우산 수리점

    오래된 기억을 담은 우산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에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낡은 방풍문 너머로 한 노부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얇은 무명 치마저고리에 검은색 고무신을 신은 그녀의 손에는, 지훈의 오랜 경험으로도 드물게 보는,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천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고, 살대는 녹슬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인은 그 우산을 마치 보물처럼 소중히 안고 있었다.

    “수리… 될까요?”

    갈라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지훈은 우산을 받아들었다. 검은색 바탕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붉은 동백꽃 무늬는 바래고 바래서 겨우 윤곽만 보였다. 손잡이는 닳고 닳아 맨들거렸고, 천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산이 아니었다. 이 우산에는 오랜 세월의 바람과 비,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할머니. 거의 새로 만드는 수준이 될 겁니다.” 지훈은 솔직하게 말했다.

    노부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래도… 꼭 고쳐야 해요. 이건… 이건 내 영감탱이가 첫 월급으로 사준 우산이에요. 평생을 같이 했어요. 내 새끼들 어릴 때 소풍 갈 때도, 영감 발인 때도 이 우산이 같이 있었어요. 이거 없으면… 내가 비 오는 날 어디 나설 용기가 안 나요.”

    지훈의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오래전, 그 역시 같은 무게의 우산을 들고 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손에 있던 것은 붉은 동백꽃 대신 작은 들꽃 무늬가 수놓아진 우산이었다. 그 우산은 그에게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한 약속과 함께 비극적으로 사라진 사랑을 상기시켰다.

    장인의 손길, 시간의 재봉

    지훈은 망설임 없이 우산을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닳아버린 덧댐 천을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녹슨 살대를 하나하나 분리했다. 오래된 천을 다루는 그의 손은 신중하고도 부드러웠다. 마치 부서진 기억의 파편들을 다루는 것처럼, 그는 우산의 모든 조각에 집중했다.

    부러진 살대는 새것으로 교체하고, 찢어진 천은 비슷한 색감의 튼튼한 천으로 조심스럽게 덧대었다. 그러나 노부인이 말한 동백꽃 무늬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지훈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단순히 기능적인 수리를 넘어, 이 우산에 담긴 의미와 추억까지도 복원해 줄 수는 없을까.

    작업실 한구석, 오래된 바느질 상자에서 그는 낡은 자수실 뭉치를 찾아냈다. 젊은 시절, 어머니가 쓰시던 것이었다. 실타래 속에서 잊고 있던 붉은색 실을 발견했을 때, 지훈의 눈가에 미세한 물기가 맺혔다. 그는 바늘에 실을 꿰어, 바래버린 검은색 우산 천 위에 조심스럽게 동백꽃 무늬를 수놓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그의 손끝에서 붉은 꽃잎이 다시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히 우산을 수리하는 행위를 넘어, 한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신성한 의식 같았다.

    바늘이 천을 꿰뚫고 지나갈 때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 붉은 우산과 그 우산 아래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약속했던 재회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고, 그 붉은 우산은 비 오는 날의 마지막 작별 인사와 함께 그의 곁을 떠났다. 우산 수리공으로서 수많은 우산을 고쳐왔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속 부러진 살대는 고칠 수 없었다.

    비밀 없는 약속

    며칠 후, 노부인이 다시 가게를 찾았다. 비는 그쳤지만,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지훈은 깨끗하게 수리된 우산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낡은 천은 새로운 천으로 덧대어져 있었고, 녹슨 살대는 매끄럽게 교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바래버렸던 동백꽃 무늬가, 그의 손끝에서 다시 선명한 붉은색으로 피어 있었다.

    “어… 어쩜…”

    노부인은 떨리는 손으로 우산을 어루만졌다. 찢어졌던 천을 넘어, 사라졌던 동백꽃이 다시 살아난 것을 본 그녀의 눈가에는 이내 물기가 번졌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수리공님. 이걸… 이걸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영감탱이가 이거 보면 참 좋아할 텐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 눈물은 단지 우산이 고쳐져서가 아니었다. 잊었던 추억이, 희미해졌던 사랑이, 다시 선명한 형태로 그녀의 삶 속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지훈은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수리비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며 그녀의 슬픔과 기쁨을 나누었다.

    골목길의 또 다른 비

    노부인이 새로 고쳐진 우산을 들고 골목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며, 지훈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은 아직도 붉은 자수실의 감촉을 기억하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닳고 닳은 연장들, 부서진 우산들의 조각들, 그리고 아직 꿰매지 못한 채 놓여 있는 새로운 상처들.

    그의 마음속 붉은 우산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고칠 수 없는 상처, 영원히 덮어두어야 할 기억. 그러나 노부인의 우산을 고치며 그 역시 작은 위안을 얻었다. 어쩌면 모든 상처가 치유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다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였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덜 마른 우산 하나를 들고 가게 문을 열었다. 빗줄기 속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쓸쓸했지만, 동시에 단단해 보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낡고 찢어진 우산을 들고 이 골목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그들의 부서진 기억을, 또다시 섬세한 손길로 이어 붙일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비 내리는 골목길의 우산 수리공, 지훈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었다.

  •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748화

    새벽 공기를 가르는 오븐의 따스한 열기, 그리고 밀가루 반죽이 빚어내는 고소한 향기가 산모퉁이 작은 빵집을 가득 채웠다. 새벽 4시, 빵집 주인 세준은 여느 때처럼 가장 먼저 가게 문을 열고 빵을 구웠다. 그의 손길은 묵묵하고도 정성스러웠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창밖 풍경과 대비되는 빵집 안의 온기는, 매일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자 희망이었다.

    갓 구워낸 호밀빵이 식힘망 위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크루아상은 황금빛 바삭함을 자랑하며 진열대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릴 김 할머니는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일찍 나와 세준이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우유를 사 가곤 했다. 항상 잔잔한 미소를 띠고 마을의 소소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빈자리는 어쩐지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새벽녘, 드리워진 그림자

    “세준 씨, 오늘 할머니 안 오시네?”

    동이 틀 무렵, 빵집 문이 열리고 큼지막한 바게트를 사러 온 박 씨 아저씨가 물었다. 박 씨는 할머니가 자주 앉던 창가 자리를 힐끗 보며 말했다. 세준은 그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네, 오늘따라 안 보이시네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

    말을 잇던 세준의 표정에도 걱정이 묻어났다. 김 할머니는 이 빵집의 산증인 같은 분이셨다. 그의 할머니가 이 빵집을 처음 열었을 때부터 단골이셨고, 세준이 대를 이어 빵을 굽는 지금도 한결같이 빵집을 찾아주셨다. 항상 밝고 긍정적인 할머니였기에, 불길한 예감은 빵집 안의 훈훈한 공기마저도 식게 하는 듯했다.

    오전 내내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갈 무렵, 빵집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마을 통장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세준아! 김 할머니네 손주, 지훈이 말이야… 병원에서 안 좋은 소식이 있단다.”

    세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훈이는 김 할머니의 유일한 손주로, 어릴 때부터 지병을 앓고 있었다. 최근 들어 상태가 악화되어 큰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통장 아저씨의 다급한 목소리는 최악의 상황을 짐작게 했다.

    “갑자기 왜요? 괜찮다고 하셨는데….”

    세준은 굽던 빵을 그대로 두고 통장 아저씨에게 달려갔다.

    “지훈이 병이… 더 깊어졌다고 해. 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비용이 너무 엄청나서 할머니가 지금 망연자실해 계신다.”

    통장 아저씨의 말에 세준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늘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손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아끼지 않던 김 할머니였다. 병원비가 할머니에게 얼마나 큰 부담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희망을 빚는 손길

    그날 저녁, 세준은 빵집 문을 닫고도 한참을 가게에 남아 있었다. 빵 반죽을 치대는 손길이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빵을 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빵은 그저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란다. 빵 한 조각에 온 마음을 담으면, 그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져 작은 기적을 만들 수도 있지.’

    세준의 할머니는 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던 분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특별한 빵을 구웠다고 했다. 일명 ‘희망 빵’이라고 불리던 그 빵은, 사람들에게 뜻밖의 도움을 가져다주곤 했다.

    세준은 주방 한쪽 구석에 보관되어 있던 낡은 레시피 노트를 꺼냈다. 낡은 종이 위에는 그의 할머니가 정성스레 적어 놓은 ‘희망 빵’ 레시피가 있었다. 단순한 재료 목록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어떤 마음으로 반죽하고, 어떤 기도를 담아 구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반죽하고, 가장 따뜻한 불꽃으로 구워라. 그리고 먹는 이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기를 염원하라.’

    세준은 밤새도록 그 레시피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도 할머니처럼, 빵으로 작은 기적을 만들어보기로. 그는 ‘희망 빵’을 구워 지훈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한 작은 자선 바자회를 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세준은 마을 통장 아저씨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통장 아저씨는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내 세준의 진심에 감동하며 돕겠다고 나섰다.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

    빵집 문이 열리자마자 세준은 평소와 다른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모든 과정에 진심을 담았다. 가장 신선한 재료를 고르고, 반죽 하나하나에 지훈이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불어넣었다. 고소한 밀가루 냄새 대신, 희망의 향기가 빵집 안에 가득 차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은 세준의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달려왔다. 빵집 아르바이트생들은 물론, 평소 빵집 단골이었던 아주머니들, 옆집 과일 가게 주인, 동네 카페 사장님까지, 모두가 팔을 걷어붙였다. 어떤 이는 재료비를 보탰고, 어떤 이는 바자회 준비를 도왔다. 빵집은 순식간에 활기 넘치는 희망의 공장으로 변했다.

    “세준 씨, 할머니가 이 소식 들으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박 씨 아저씨가 포장 봉투를 접으며 말했다.

    “지훈이가 빨리 건강해져서 이 빵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븐에서 막 꺼낸 ‘희망 빵’을 바라봤다. 황금빛으로 잘 구워진 빵은 단순한 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한데 모여 빚어낸 결정체였다. 빵 위에 새겨진 작은 나뭇잎 모양은, 지훈이가 다시금 싱싱한 잎처럼 돋아나기를 바라는 모두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이틀 후, 작은 빵집 앞마당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훈이를 위한 희망 나눔’이라는 팻말 아래, 세준과 마을 사람들이 구워낸 ‘희망 빵’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빵 하나하나에는 따뜻한 손글씨로 ‘지훈아, 힘내렴!’이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빵을 사러 온 것이 아니라, 희망을 사러 온 듯했다.

    그날 오후, 김 할머니가 빵집으로 찾아왔다. 여위고 지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빵집 앞마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따뜻한 빵들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세준은 할머니에게 따뜻한 ‘희망 빵’ 하나를 건넸다.

    “할머니, 모두의 마음이 담긴 빵이에요. 지훈이에게 꼭 희망이 닿을 거예요.”

    할머니는 빵을 받아 들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닌, 감사의 눈물이었다. 그날 하루 만에, 빵집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기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돈은 지훈이의 급한 수술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기적의 씨앗, 그리고 남은 이야기

    며칠 뒤, 지훈이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병원비 전액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할머니에게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모여 기적을 만든 것이다. 김 할머니는 세준의 빵집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띠고, 손에는 직접 담근 매실차를 들고서였다.

    “세준아, 정말 고맙다. 너 덕분에… 우리 지훈이가 새 생명을 얻었어. 이 빵집은 정말 기적을 만드는 곳이구나.”

    세준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가 만든 빵이 진정으로 기적을 만들었을까. 아니, 그는 알았다. 기적은 빵 그 자체가 아니라, 빵을 통해 서로에게 마음을 전한 사람들의 따뜻한 사랑과 연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의 작은 빵집은 오늘도, 그렇게 사람들의 희망을 굽고 있었다. 지훈이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기적의 씨앗일 뿐이었다.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는 여전히 오븐의 따스한 열기와 고소한 빵 냄새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작은 기적들이 매일매일 자라나고 있었다. 세준은 오늘도 빵을 굽는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빵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것임을 알기에.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작은 빵집의 문은, 오늘도 새로운 기적을 기다리며 활짝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