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심장은 언제나처럼 쿵쾅거렸지만, 지아의 심장은 잿빛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 매일 똑같은 무게로 짓눌리는 삶은 촘촘한 그물처럼 그녀를 옥죄어 왔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끝자락,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린 지아는 발걸음을 멈췄다. 골목 어귀에 놓인 낡고 작은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필연처럼 느껴졌다.
꿈의 실타래를 찾아서
’꿈을 파는 상점’.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상점의 이름은 밤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아는 홀린 듯 낡은 나무 문을 열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코끝을 스치는 달콤하고도 아련한 향기. 말린 허브와 오래된 책,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아련한 기억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상점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아늑했다. 벽면 가득 채운 유리병들 안에는 형형색색의 액체와 반짝이는 가루들이 담겨 있었고, 천장에서는 이름 모를 작은 장식품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은은한 소리를 냈다. 한쪽 구석, 낡은 오르골 위에는 먼지 쌓인 시계가 째깍거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발의 남자가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희고 긴 손가락으로 그는 낡은 책 한 권을 조용히 덮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지아를 향했다. 그의 눈빛은 꿰뚫어 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따뜻한 위로를 담고 있는 듯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손님?”
지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이 세상에 자신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사무치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꿈을 판다고 해서요.” 지아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어떤 꿈을 파시나요?”
남자는 옅게 미소 지었다. “세상 모든 이가 가슴속에 품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을 팝니다. 잊어버린 행복, 잃어버린 사랑,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어떤 꿈이든 형태를 부여해 드리죠.”
지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삶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시간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할머니의 따뜻한 품, 나른한 오후의 햇살 아래 함께 읽던 그림책, 손을 잡고 걷던 시골길의 냄새…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영혼을 지탱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시간은 냉혹하게 흘러갔고, 할머니의 온기는 손끝에서 멀어져 이제는 희미한 기억의 조각으로만 남아있었다.
“…저는요,” 지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의 할머니를 만나고 싶어요. 아주 잠깐이라도… 다시 그 따뜻한 손을 잡고 싶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놀라움도, 판단도 없었다. 마치 이런 소망을 수없이 들어온 사람처럼 담담했다.
“오직 한 번뿐입니다. 현실과 구별할 수 없는 꿈을 선물해 드리죠. 하지만 꿈은 꿈일 뿐, 깨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겁니다. 그 대가로 무엇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지아는 잠시 망설였다. 돈? 물질적인 것? 그녀는 할머니와의 추억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다. 그녀의 삶의 의미는 할머니와의 시간에 묶여 있었다.
“저의… 저의 미래를 드릴게요. 지금 제가 붙들고 있는 작은 희망들… 그걸 다 드려도 좋아요.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요.”
남자는 지아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아니요, 손님. 당신의 미래는 이미 충분히 소중합니다. 저의 상점은 그런 것을 취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맡겨주십시오. 할머니와의 추억이 아닌, 당신의 가장 빛나던 순간 중 하나를… 이곳에 잠시 보관하겠습니다. 꿈의 대가로.”
지아는 생각했다. 가장 빛나던 순간. 어떤 것일까. 그녀의 기억 속에는 할머니와의 순간들이 가장 빛났지만,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들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첫사랑의 설렘, 대학 합격의 기쁨, 친구들과 밤새 웃고 떠들던 시간들… 그녀는 주저 없이 그 순간들 중 하나를 선택했다. 그녀의 스무 살,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여행에서 마주했던 드넓은 바다의 풍경.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던 그 순간.
“좋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아에게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이 차를 마시고, 잠시 눈을 감으십시오. 당신의 꿈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따뜻한 꿈의 품속으로
지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꽃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고,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눈을 감자, 세상은 이내 부드러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을 떴을 때, 지아는 익숙한 부엌 한가운데 서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한여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마루에는 할머니가 직접 짜주신 예쁜 꽃무늬 방석이 놓여 있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구성진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할머니가 계셨다.
흰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고운 한복 치마를 입은 할머니가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고, 손은 능숙하게 만두피를 빚고 있었다.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할머니 표 만두소가 풍기는 향기가 부엌 가득했다.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 하고 외치며 달려갔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으셨다. “어이고, 우리 강아지 왔네! 학교는 잘 갔다 왔어?”
지아는 할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할머니의 품은 언제나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오래된 비누 향과 흙냄새가 섞인,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냄새였다. 지아는 할머니의 등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너무나 그리웠던 온기, 너무나 그리웠던 목소리, 너무나 그리웠던 그 존재감.
“왜 우니, 우리 애기. 배고파? 할미가 만두 맛있게 해줄게.”
할머니는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지아는 고개를 젓고는 할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주름진 눈가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희미한 햇살이 비추는 볼에는 나이가 주는 지혜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꿈속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순간은 너무나 생생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투박한 그 손의 감촉은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할머니는 지아의 손에 갓 쪄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 하나를 쥐여주셨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만두야.”
지아는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뜨겁고 육즙 가득한 만두소의 맛이 혀끝에 닿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맛이었다. 그녀는 할머니 옆에 앉아, 하릴없이 재잘거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당의 감나무에 열린 감 이야기, 옆집 순이 할머니의 소식, 장터에서 새로 생긴 가게 이야기… 시시콜콜하지만 소중했던 일상들이 다시금 그녀의 귀를 채웠다. 지아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할머니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감촉을 오롯이 느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영원히 이 순간 속에 머물고 싶었다.
깨어난 현실, 남겨진 온기
문득, 부드러운 빛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아는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차가운 침대 시트. 그녀는 자신의 방에, 홀로 누워 있었다. 꿈이었다. 너무나 생생해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던 꿈.
뺨은 눈물로 축축했고, 베개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가슴 한구석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손끝에는 만두의 촉촉한 감촉과 따스함이, 혀끝에는 고소한 만두 맛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 강아지, 항상 행복해야 해.’
지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저 멀리 동쪽에서 희미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꿈은 끝났지만, 그녀의 마음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잃어버렸던 할머니와의 추억을 다시금 생생하게 경험한 것만으로도, 그녀의 영혼은 다시금 채워진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며칠 전 사다 놓았던 만두를 꺼냈다. 할머니의 만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오늘 아침에는 뜨거운 만두를 먹고 싶었다. 만두를 찌는 동안, 그녀는 작은 노트를 꺼내들었다. 할머니와의 꿈속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었다. 만두 냄새, 라디오 소리, 할머니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손길의 감촉까지도.
문득, 그녀는 스무 살의 바다 풍경을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한 조각이,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약간의 허전함이 밀려왔지만, 지아는 이내 미소 지었다. 그 바다의 기억을 잃은 대신, 할머니의 따뜻함을 다시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그녀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꿈을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지아는 갓 쪄낸 만두 하나를 접시에 담아 창가로 향했다. 동이 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할머니에게 말하듯 속삭였다.
“할머니, 고마워요. 이제 저는 괜찮을 거예요. 다시 저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어요.”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던 상점의 카운터. 백발의 남자는 조용히 닫힌 책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동이 트는 도시의 거리, 그 위로 분주하게 움직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누군가는 잊고 있던 꿈을 찾아 이 상점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를 찾아 나설 것이다. 꿈을 파는 상점은 그렇게,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의 손가락은 어느새 낡은 오르골 위를 스치고 있었다. 잔잔한 멜로디가 상점 안에 울려 퍼졌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