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골목길에 접어들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현우의 뺨을 스쳤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걸었을 법한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은 늘 새로운 희망과 아련한 과거의 조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손에 든 낡은 사진 한 장이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서연의 얼굴이었다. 스무 살, 벚꽃이 흩날리던 봄날의 미소.
이번 단서는 낡은 은색 로켓이었다. 그녀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그녀의 흔적일지도 모를 물건. 한 달 전,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던 그 로켓을 현우는 간발의 차이로 놓쳤었다. 그 로켓이 한 고미술상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우는 망설임 없이 이곳으로 달려왔다.
“정말 제가 찾는 그 로켓이 맞습니까?” 현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오래된 목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고미술상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쿰쿰한 세월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 쌓인 진열장과 희미한 전등 아래, 백발의 주인이 돋보기를 쓴 채 그를 맞았다.
“아, 그 은색 로켓 말이지요? 아주 섬세하고 오래된 물건이라 기억에 선명합니다. 하지만 일주일 전에 이미 팔렸습니다.” 주인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또다시 놓쳤다는 상실감과 함께, 이번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함이 뒤섞였다.
“부탁드립니다. 누구에게 팔았는지, 혹시 연락처라도 알 수 없을까요? 제게는 정말 중요한 물건입니다.” 현우는 손에 든 사진을 내밀었다. “이 여자분을 찾고 있습니다. 이 로켓은 이 분의 유일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주인은 돋보기 너머로 사진을 응시했다. “음…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였군요. 하지만 로켓을 사 간 분은 이 분이 아닙니다. 이 근처에 사시는 박 여사님이라는 분인데, 고미술에 조예가 깊으시죠.”
좌절감이 현우를 덮쳤다. 또 헛걸음인가. 하지만 그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박 여사님께 혹시 로켓을 판매한 분에 대해 들은 것이 없습니까? 젊은 여자분이 팔았다고 들었습니다만…” 현우는 희미하게 기억나는 경매 사이트의 판매자 정보를 떠올렸다. 익명의 판매자였다.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로켓을 팔러 온 아가씨 말입니까? 젊고 수척해 보였던 기억이 나는군요. 많이 지쳐 보였어요. 급전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그 아가씨가 박 여사님께 직접 판 건 아닙니다. 저에게 팔았고, 제가 다시 박 여사님께 판 것입니다.”
현우는 주인의 말에서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 “그 아가씨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서연 씨와 아는 사이였을까요?”
“음… 이름은 ‘아영’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로켓을 팔면서 참 애틋해 보였어요. ‘선생님께 받은 소중한 물건인데, 이렇게 팔게 되어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선생님’이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더군요. 아마도 그 ‘선생님’이 아가씨의 은인이거나, 아주 존경하는 분이었겠죠.”
현우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서연은 한때 작은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그림을 가르치던 그녀를 따르던 제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늘 아이들에게 따뜻한 은인 같은 존재였다. 혹시, 그 ‘선생님’이 서연일까?
“그 아영이라는 분, 연락처는 없습니까? 꼭 만나봐야겠습니다.” 현우는 간절하게 물었다. 주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개인 정보라… 쉽지 않지요. 저도 딱히 연락처를 받아두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급하게 팔고 떠났을 뿐이니까요.”
현우는 주인이 마음을 바꿀 때까지 기다릴 참으로 굳게 서 있었다. 오래된 탁자 위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자, 주인이 현우의 진심에 조금 움직인 듯했다.
“딱 한 가지, 아주 사소한 정보가 있습니다. 아영이라는 아가씨가 로켓을 팔고 나서, 돈을 받은 다음 작은 쪽지에 무언가 적고는 제게 버려달라고 했는데, 제가 깜빡하고 쓰레기통 옆에 잠시 두었었지요.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봤는데, ‘화양동 작업실’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더군요. 왜 버려달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화양동 작업실’. 현우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서연이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던 작은 작업실이 화양동에 있었다. 폐허가 된 건물 사이에 숨겨진 듯 자리한,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그곳은 10년도 더 전에 문을 닫았지만, 서연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살아있는 공간이었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우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작은 쪽지 하나가 수백 번의 추적보다 더 큰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아영이라는 이름, 선생님이라는 호칭, 그리고 화양동 작업실. 이 모든 조각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고미술상을 나선 현우는 차가운 밤공기에도 불구하고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오름을 느꼈다. 어쩌면 그는, 마침내 서연에게 다가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찾아 헤매던 긴 여정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일까.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함께 밀려들었다. 로켓을 팔아야 할 만큼 아영은 왜 급하게 돈이 필요했을까. 그리고 ‘선생님’인 서연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답이 가까워질수록, 그 답이 가져올 무게감에 현우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제 그는 화양동으로 향할 참이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향한 그의 탐색은, 이제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