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지고, 창밖에서는 가을비가 가늘게 내렸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지혜의 심장을 조용히 울리는 비트처럼 느껴졌다. 손에 들린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수백 페이지를 넘어서,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의 빛나는 사랑과 아픔, 그리고 깊은 고뇌가 고스란히 담긴 그 기록들은 지혜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오늘 펼친 페이지에는, 빛바랜 잉크로 힘겹게 눌러 쓴 글씨가 이어졌다. 날짜는 1950년대 중반,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였다.
잊혀진 이름, 현수
“…그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아야만 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기차역 플랫폼에서, 현수의 얼굴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줄기도 마찬가지였겠지. 가난과 전쟁의 상흔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우리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원치 않는 혼인을 해야만 했다. 현수는 나에게 도망치자고, 어디든 함께라면 좋다고 애원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 어린 동생들과 병든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나만 행복을 찾아갈 수 있단 말인가…”
지혜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할머니의 필체는 이 부분에서 유난히 흐트러져 있었다. 글씨는 번지고, 종이 위에는 오래된 눈물 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얼룩져 있었다.
“…그는 나의 손에 작은 나무 조각 하나를 쥐여 주었다. 직접 깎은 참새 조각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이 참새가 너의 행복을 지켜주고 있기를 바란다’ 현수는 그렇게 말하며 흐느꼈다. 기적처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그 희망은 그를 태운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사라지는 순간, 산산조각 났다. 나는 그 뒤로 현수라는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다만 가슴속에만 묻어두었다. 죄스러웠다. 그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참새 조각. 지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참새 조각… 할머니가 늘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던, 낡았지만 소중한 나무 조각. 할머니는 그 참새 조각을 볼 때마다 항상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곤 했다. 지혜는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되살아난 기억
일기장을 덮은 지혜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할머니의 오래된 슬픔이 이렇게나 선명하고 아팠다니. 지금껏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이름, 현수. 지혜는 현수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불현듯, 며칠 전 동네 경로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만났던 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현수 할아버지. 그는 늘 조용하고 친절했다. 지혜가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귀 기울여 듣곤 했고, 할머니의 젊은 시절에 대해 궁금해하는 듯한 묘한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 그저 우연한 호기심이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날 경로당 한켠에서 김현수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지혜를 돕다가, 그의 주머니에서 살짝 흘러나왔던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잊을 수 없는 모습. 날개를 접은 채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 마리 참새 조각. 할머니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지혜의 머릿속에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똑같은 이름, 그리고 똑같은 참새 조각.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름 끼치는 일치였다. 김현수 할아버지… 그가 설마 할머니의 일기장에 기록된, 그 현수란 말인가?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운명처럼 다시 만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지혜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할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 할머니는 최근 들어 기억이 흐려져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김현수 할아버지는 혹시 할머니를 알아보았지만,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던 걸까?
가슴이 벅차오르면서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할머니에게 이 진실을 알려드려야 할까?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아픔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이 과연 할머니에게 좋은 일일까? 아니면, 이 사실을 함구한 채 두 사람이 각자의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도록 해야 할까?
지혜는 망설였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장 속 현수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토록 사무치는 한이 이제야 풀릴 기회가 온 것이라면….
창밖의 빗소리는 여전히 지혜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지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김현수 할아버지를 찾아가야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아니, 그 전에 할머니의 참새 조각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일기장과 참새 조각, 그리고 김현수 할아버지. 이 모든 조각을 맞추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혜의 손은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서랍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그녀에게 내린 숙제,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지혜는 망설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