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항구 도시의 새벽 공기는 습기와 비릿한 바다 내음으로 가득했다. 지훈은 낡은 봉고차의 조수석에 몸을 웅크린 채, 안개 낀 유리창 너머로 어둠이 걷히는 부둣가를 응시했다. 밤새 이어진 잠복근무로 눈은 시렸지만,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30년. 그 세월 동안 그를 이끌어온 하나의 이름, 하나의 얼굴. 마침내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이곳, 인적이 드문 남해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맞춰질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며칠 전, 그는 한 통의 익명 제보를 받았다. 잃어버린 첫사랑, 민서와 놀랍도록 흡사한 여인이 이 마을의 작은 수산물 시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진은 흐릿했지만, 그 눈빛과 희미한 미소는 심장을 꿰뚫었다. 지훈은 망설일 틈도 없이 모든 것을 던지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수많은 오해와 좌절,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을 따라 헤맸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정말 끝일까. 혹은, 새로운 시작일까.
날이 밝아오자 부둣가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선들이 엔진 소리를 내며 항구로 들어서고, 어부들과 상인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지훈은 숨을 죽인 채 시장 어귀에 있는 작은 생선 가게를 주시했다. 제보자가 알려준 곳이었다. 낡은 차림의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 문을 열고 조업을 마친 배에서 막 내린 해산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전 7시 15분. 그의 심장이 멎는 듯한 순간이 찾아왔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여인이 가게 안에서 나왔다. 짧은 머리, 잔주름이 살짝 팬 눈가, 그리고 손에 든 대야. 세월의 흔적은 분명했지만, 움직이는 모든 순간에서 잊을 수 없는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그녀였다. 민서였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상상하고 꿈꿔왔던 재회였다. 그러나 현실의 그녀는 그의 기억 속 스무 살의 맑고 싱그러운 소녀가 아니었다. 거친 파도와 싸워온 듯 단단해진 어깨, 햇볕에 그을린 피부, 그리고 무언가 깊은 사연을 담고 있는 듯한 눈빛.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막 하역된 생선 상자를 옮기고, 칼을 능숙하게 휘둘러 비늘을 벗겨냈다.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움직임은 유려했고, 그 속에서 지훈은 어린 시절 민서가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락을 어렴풋이 들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처음 만났던 봄날, 교정 벤치에 앉아 수줍게 웃던 민서. 헤어지던 날,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던 민서. 그리고 지난 수십 년간 그의 밤을 지배했던 민서의 환영.
잠시 후, 그녀가 허리를 펴고 멀리 바다를 응시했다. 그 시선 끝에 무언가 간절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 지훈은 그녀의 옆모습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때, 그의 시야에 낯선 존재가 들어왔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녀의 치마폭을 잡고 있었다.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무언가를 재잘거렸고, 민서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기억 속 민서의 웃음과 너무나도 똑같았지만, 동시에 너무나 달랐다. 자신을 떠난 후, 그녀는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새로운 가족을 일궈냈을 터였다.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고동쳤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민서의 모습인가.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칼날 같은 상실감과 배신감,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이 그를 덮쳤다. 이 행복한 풍경에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는 망연자실한 채 두 사람을 응시했다. 아이는 민서에게 기대어 까르르 웃었고, 민서는 그런 아이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민서가 아이의 손목을 잡고 작업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 아이의 손목에는 오래된 듯한, 희미한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지훈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 맙소사. 그 흉터는 민서가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입었던 것과 똑같은 위치와 형태였다. 민서는 그 흉터를 늘 손목시계로 가리고 다녔었다. 그리고 그는 민서의 손목시계를 기억한다. 그때 그 순간, 지훈의 뇌리에는 한 가지 끔찍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는 재빨리 봉고차에서 내려 시장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불안과 혼란으로 뒤엉켜 터질 것만 같았다. 민서. 그녀는 그 흉터에 대해 깊이 숨겨진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저 아이는… 단지 민서를 닮은 아이일까, 아니면… 그의 발걸음이 생선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민서는 상자 속 생선을 고르며 등지고 있었다. 아이는 가게 앞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멜로디는… 민서가 어린 시절 그에게 가르쳐주었던, 오직 둘만이 알던 그 멜로디였다.
지훈은 천천히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지훈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맑은 눈으로 올려다봤다. 순간, 민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지훈과 마주쳤다. 30년 만이었다. 세월의 간극과 무수한 사연들이 그 찰나의 시선 속에 압축되어 폭발했다. 민서의 눈빛은 한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깊은 경계심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수십 년간 맴돌던 이름을 겨우 내뱉었다.
“민서야…”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지훈의 심장을 찢어놓는 말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지훈을 향해 차가운 시선으로 말했다.
“누구세요? 저를 아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