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지친 눈으로 벽에 걸린 낡은 시계를 응시했다. 무려 328번째 밤이었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그녀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어우러져,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영원히 멈출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졌다. 손목시계도 아닌, 그 거대한 벽시계는 그녀의 삶이자 저주였다. 매번 같은 날의 전야, 그녀는 이 시계 앞에 섰다. 내일이면 동생, 은지가 사라지는 날. 다시금 시간을 되돌릴지 말지, 아니, ‘어떻게’ 되돌릴지 고민하는 밤이었다.
시계의 태엽은 과거를,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과거가 그 작은 톱니바퀴에 갈려나갔고, 수없이 많은 미래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서연은 이제 어떤 날이 진짜 ‘처음’이었는지조차 희미해졌다. 그녀의 기억은 조각난 거울 파편처럼, 각기 다른 평행우주에서의 은지의 모습들로 가득했다. 때로는 병원에서, 때로는 사고 현장에서, 때로는 그저 홀연히 사라진 그림자처럼. 그녀는 모든 시나리오를 막으려 애썼고, 매번 실패했다.
지난 327번의 시도는 모두 ‘은지를 구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오늘 밤, 서연의 마음속에는 처음으로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이것이 은지를 위한 일일까? 아니,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일까?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
서연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매번 시간을 되돌린 대가였다. 사라진 기억과 뒤섞인 기억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는 파편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직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의 존재조차 모르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따스한 햇살이 비치던 어느 봄날 오후였다. 은지는 작은 손으로 흙장난을 하고 있었고, 서연은 그런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은지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갓 피어난 작은 꽃을 따서 서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언니, 예쁘지?” 그 작은 꽃잎은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서연의 마음에 박혔다. 평범했지만, 너무나도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이제 어떤 시공간에서도 재현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짜 기억처럼 서연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때의 은지는 아무런 걱정 없이 그저 햇살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을, 그 기억의 순수함을, 서연은 지키고 싶었다. 단순히 은지의 ‘생존’을 넘어선, 어떤 형태의 ‘행복’을 그녀는 갈구하고 있었다.
바랜 사진 한 장
책상 서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은지와, 그 옆에서 어색하게 미소 짓는 서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사진은 수많은 시간 여행 속에서도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한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어떤 시간선에서는 이 사진이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시간선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었다. 하지만 서연이 간직한 이 사진만큼은, 처음 그녀가 이 시계를 만났던 그 시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서연은 손가락으로 은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은지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되돌리고 싶었던 것은 비단 은지의 죽음이나 사라짐만이 아니었다. 그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 온전히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손을 잡았던 그 평범한 날들이었다. 시계는 과거를 되돌릴 수 있었지만, 사라진 시간을 다시 채워주지는 못했다. 매번 새로운 미래를 만들 뿐, 진정한 과거의 온기는 복원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실패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기억’을 되돌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훼손된 자신의 기억, 그리고 은지와 함께했던 순수한 행복의 기억을.
328번째의 선택
시계의 째깍거림이 더욱 크게 들리는 듯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또다시 수많은 시뮬레이션이 펼쳐졌다. 내일 은지가 겪을 사고의 모든 경우의 수.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했던 지난날의 노력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알았다. 완벽한 통제란 없다는 것을. 삶이란 예상치 못한 변수로 가득하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그 변수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이번에는 다르게 해봐야 할까. 은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대신, 그저 그녀 옆에 머물러야 할까. 혹은,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 시간을 멈춰야 할까? 아니,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려보내야 할까?
손이 저절로 시계의 용두를 향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수없이 만져왔던 익숙한 촉감이었다. 이 용두를 돌리면 모든 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328번째의 처음으로.
하지만 이번에는 망설임이 길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해!’ 하는 비장한 각오 대신, ‘이번에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하는 애처로운 질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여정의 끝은 은지를 영원히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온전히 보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한 번 더, 그녀의 웃음을,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의 온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
서연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번 328번째의 시간은, ‘구원’이 아닌 ‘기억’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그녀의 손가락이 용두를 부드럽게 감쌌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지만, 서연의 마음속에서 어떤 결의의 톱니바퀴가 조용히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