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심장이 얼어붙은 듯한 밤이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창밖의 세계를 온통 희뿌연 안개 속으로 가두고 있었다. 바람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낡은 산장을 때렸고, 나뭇가지들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팔처럼 창문을 할퀴었다. 벽난로의 불꽃만이 유일한 생명의 온기인 양 흔들리고 있었지만, 하윤의 마음속 서늘함은 어떤 불로도 녹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창가에 선 그녀의 눈동자에는 만년설처럼 쌓인 회한과 지난날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888번째의 겨울, 아니, 정확히는 888번째의 고통과 인내의 밤이었다. 그날의 약속은 뼛속 깊이 박힌 가시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좀먹고 있었다. 사랑, 희망, 그리고 평범한 행복까지도. 모두 그 약속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었다.
“하윤 씨.”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강태오였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듯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젊은 날의 집착과 광기를 담고 있었다. 그는 손에 낡은 가죽 상자를 들고 있었다. 하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저 상자… 그 안에 든 것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잃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또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이제는 끝을 내야 할 때입니다.” 태오가 말했다. “이 모든 지옥 같은 시간을.”
하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신은 이 지옥을 만든 장본인이야, 태오.”
“그래요. 인정합니다.” 태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당신도 다르지 않아. 그 약속에 갇혀 스스로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것은 당신 자신이야.”
태오가 들고 있던 상자를 벽난로 앞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뚜껑이 열리자,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건 아주 오래된 오르골이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유리 구슬 안에는 눈꽃이 흩날리는 작은 마을 풍경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 구슬 아래, 작은 금속 명판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하윤의 눈가가 떨렸다. 그녀는 그 오르골을 알고 있었다. 지훈과 그녀의… 유일한 연결고리이자, 동시에 그녀를 옥죄는 족쇄.
“지훈이가 죽어가고 있어요.” 태오가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더 이상 시간이 없어. 당신이 이걸 내게 넘겨주지 않으면… 그는 영영 눈을 감을 겁니다.”
하윤은 숨을 들이켰다. 지훈. 그녀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그녀의 영혼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사람. 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를 위해 수십 년을 버텨왔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현실에 직면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 하윤이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태오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약속을 파기하는 것. 당신이 지훈을 영원히 놓아주는 것. 그리고… 나를 선택하는 것.”
하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미쳤군. 당신은 여전히.”
“그래, 미쳤지!” 태오가 소리쳤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는 불꽃처럼 위태로웠다. “당신을 사랑해서 미쳤고, 당신이 날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아서 미쳤어! 지훈 그 자식이 당신의 전부를 앗아갔을 때, 난 그를 증오했고… 그 약속을 증오했어!”
그의 손이 오르골 위에 맴돌았다. “당신이 내게 이 오르골을 넘겨준다면, 지훈은 최고의 치료를 받을 거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당신만을 바라볼 기회를 얻을 거라고.”
하윤은 창밖의 눈보라를 다시 바라봤다. 그날도 눈이 내렸다. 첫눈이 소리 없이 세상을 덮던 날. 어린 지훈과 그녀는 비밀스러운 오두막에서 떨리는 손을 맞잡고 오르골을 선물하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서로를 찾아내리라던… 어리고 순수했던 맹세.
그 맹세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지훈과의 강제적인 이별,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지난한 싸움. 태오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지훈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 약속이, 그 오르골이 지훈을 죽게 만들고 있었다. 지훈은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그가 없다면, 그 약속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윤은 천천히 태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심장은 마치 깨질 듯이 아파왔다. 그녀의 손이 떨림을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손끝이 오르골의 차가운 금속 표면에 닿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르골에 박힌 유리 구슬 속 눈꽃이 그녀의 눈물에 번져 흐릿해졌다.
“약속을 파기하라니…” 하윤은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그 약속은 내 삶 그 자체인데…”
태오는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하윤 씨…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요. 지훈도 그걸 바랄 거야. 그가 살아야 당신도 살 수 있는 거야.”
정적. 바람 소리만이 그녀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듯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천 길 낭떠러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훈을 살리기 위해, 그녀의 전부였던 약속을 버려야 한다니. 이 무슨 잔인한 운명의 장난인가.
그녀는 오르골을 들어 올렸다. 작고 가벼웠지만, 그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녀의 손아귀에 든 것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었다. 그녀의 젊은 날, 그녀의 사랑, 그녀의 모든 희망과 꿈이 담긴 심장이었다. 그것을 태오에게 넘기는 것은, 자신의 심장을 찢어내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오르골의 뚜껑을 열었다. 작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지훈이 그녀에게 들려주었던 그 노래였다. 그 노래와 함께, 그녀의 기억 속에서 어린 지훈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윤아,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약속 잊으면 안 돼. 다시 만날 때까지…’
그 노래가 칼날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지훈의 생명과 자신의 약속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절망적인 순간에 서 있었다. 그가 죽는다면, 약속은 영원히 지킬 수 없다. 그는 살아야 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잃더라도.
하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오르골을 태오에게 건넸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겨우 한 단어가 새어 나왔다.
“…가져가.”
태오의 얼굴에 미묘한 감정의 그림자가 스쳤다. 승리감과 함께, 그녀의 고통을 목격하는 자의 복잡한 감정. 그는 조용히 오르골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하윤은 마치 몸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삶의 모든 빛이 꺼지는 듯한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거친 바람 소리를 뚫고, 산장 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마치 문이 부서질 듯한 기세였다.
태오와 하윤, 두 사람 모두 동시에 문 쪽을 바라봤다. 이 폭설 속에, 누가?
이변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 태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고, 하윤은 고통 속에서도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문 밖의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이 지옥 같은 거래를 막으러 온 구원자일까, 아니면 이 비극을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을 또 다른 파멸의 서곡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울렸다. 벽난로의 불꽃이 세차게 흔들렸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눈보라는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산장 안의 두 사람은 마치 얼어붙은 듯 굳어 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이제 문 밖의 존재에게 달려 있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