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메카 액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도시의 흉터가 하늘을 찢고 있었다. 한때는 번영을 노래했을 마천루의 앙상한 뼈대들이 끝없이 펼쳐진 폐허 위로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대한 기동 병기, ‘강철 파수꾼’의 조종석 안에서 카엘은 끈적한 땀을 닦아냈다. 투박한 금속 패널들로 둘러싸인 내부에는 오래된 기름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섞여 있었다. 전면 스크린 너머로는 희뿌연 먼지가 사방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철 파수꾼’의 센서들은 묵묵히 길을 밝히고 있었다.

    “카엘, 전력 수치 70%까지 떨어졌어. 이대로는 예정된 복귀 지점까지 못 돌아가.”
    리나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조종석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후방 지원 차량에서 ‘강철 파수꾼’의 모든 시스템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미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알고 있어, 리나. 그 빌어먹을 에너지 잔류파, 꼭 찾아야 해.”
    카엘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일주일째였다. 녀석들은 거의 모든 예비 전력을 갉아먹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다음 탐색은 기약할 수 없었다. ‘강철 파수꾼’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 유일한 생존 수단이자, 이동하는 요새였다.

    강철 파수꾼의 육중한 발이 무너진 도로 위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낡은 콘크리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선 대구경 운동 에너지포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했고, 왼쪽 팔뚝에는 거친 진동을 일으키는 거대한 진동 칼날이 달려 있었다. 모두 파편과 폐기된 부품들로 조립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기들이었다.

    “좌측 2시 방향, 희미하게 감지됩니다. 이전에 잡히던 것보다 훨씬 강해요. 움직임은… 불규칙적입니다.”
    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핀은 경량 수색 기체를 타고 ‘강철 파수꾼’의 전방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는 팀의 눈이었다.

    “불규칙적이라니?” 카엘이 되물었다. “오래된 감시 드론인가? 아니면… 철충?”
    “철충은 아닙니다. 최소한 패턴이 달라요. 너무… 크고, 둔탁해요.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움직이고 있어요.”
    핀의 목소리 끝에 미묘한 긴장감이 실렸다. 핀은 허세만 가득한 녀석이었지만, 그의 직감은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강철 파수꾼’은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카엘은 매니퓰레이터를 조작해 전방 스크린의 확대 배율을 높였다. 먼지와 안개 너머로, 희미한 윤곽이 잡혔다. 거대한… 기계. 하지만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마치 여러 대의 기계가 비정상적으로 엉겨 붙어 하나의 괴물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젠장… 저게 뭐야?” 카엘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형태예요. 잔류파의 근원지로 향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카엘!” 리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잔류파의 근원지. 그곳에 자신들이 찾는 에너지원이 있다면, 저 기괴한 괴물 역시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핀, 회수해. 교전한다.” 카엘이 명령했다.
    “회수? 저거 혼자서 상대하겠다고요? 보십시오, 저 기형적인 크기를!” 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어쩌겠어, 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저놈이 먼저 전력원을 손에 넣게 둘 순 없지.” 카엘의 눈이 스크린 속 괴물을 응시했다. “리나, 모든 시스템 전투 모드로 전환. 에너지포 최대 충전 대기.”

    ‘강철 파수꾼’의 거대한 몸체에서 기계음과 함께 둔탁한 진동이 울렸다. 외부 장갑판 사이로 충전 중인 에너지포의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카엘은 조종간을 꽉 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기괴한 기계 괴물은 마치 땅의 일부인 양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황량한 폐허에 울려 퍼졌다. 녀석의 몸체 곳곳에선 부식된 장갑판이 너덜거렸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이따금씩 기묘한 전기 스파크가 튀기도 했다.

    “사정거리 300, 200… 150!” 리나가 카운트다운 했다.
    “발사!” 카엘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강철 파수꾼’의 어깨 위에 장착된 대구경 운동 에너지포가 포효하며 거대한 푸른 섬광을 뿜어냈다. 수십 톤의 금속을 압축한 듯한 포탄이 음속을 뚫고 날아가 괴물의 몸통을 강타했다.

    쿠우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괴물의 몸체에서 파편과 연기가 솟구쳤다. 잠시 녀석의 움직임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녀석은 더욱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낡은 기계팔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며 비명을 질렀고, 녀석의 몸체에서 또 다른 기형적인 부속들이 튀어나왔다.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되고 있어요!” 리나가 경악했다.

    괴물은 마치 진흙 속을 기어 다니는 거대한 지네처럼, 뒤틀린 몸체를 이끌고 ‘강철 파수꾼’을 향해 돌진해왔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조종석까지 전달되었다.

    “망할…! 핀, 엄호 사격!”
    “쳇, 알겠습니다!”

    핀의 경량 기체에서 기관포탄이 쏟아져 나와 괴물의 몸통을 긁어댔다. 하지만 녀석의 단단한 외피에는 작은 흠집만을 남길 뿐이었다. 괴물의 앞부분에서 거대한 금속 갈고리가 튀어나오며 ‘강철 파수꾼’을 향해 휘둘러졌다.

    카엘은 재빨리 매니퓰레이터를 조작해 회피 기동을 지시했다. ‘강철 파수꾼’의 육중한 몸체가 간발의 차이로 갈고리를 피해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갈고리의 끝이 ‘강철 파수꾼’의 왼쪽 어깨 장갑을 스쳤고, 끔찍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조종석 내부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좌측 어깨 장갑 파손! 전력 케이블 일부 노출!” 리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강철 파수꾼’의 어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저 녀석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였다.

    “리나, 괴물의 움직임 패턴 분석해! 핀, 녀석의 약점을 찾아!” 카엘이 외쳤다.

    괴물은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낡은 유압 장치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팔들이 ‘강철 파수꾼’을 짓누르려 했다. 카엘은 맹렬히 방어하며 빈틈을 찾았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들은 전투의 격렬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더욱 무너져 내렸다. 건물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녀석의 심층 구조가 너무 복잡해요! 마치 무작위로 부품을 쌓아 올린 것 같아요!” 리나가 보고했다.
    “잠깐, 카엘! 저기! 녀석의 몸통 중앙에, 뭔가 이질적인 부품이 보입니다! 다른 부품들에 비해 유독 깨끗하고, 푸른빛을 띄고 있어요!” 핀의 목소리에 희망이 섞여 있었다.

    카엘은 핀의 지시를 따라 시야를 고정했다. 괴물의 뒤틀린 금속 덩어리 한가운데, 작지만 선명하게 푸른빛을 내뿜는 정육면체 형태의 코어가 박혀 있었다. 자신들이 찾는 에너지 잔류파의 근원지. 괴물은 그 코어를 마치 자신의 심장처럼 품고 있었다.

    “저게 녀석의 전력원이군! 어쩐지 활성화된다 싶었어!” 카엘의 얼굴에 결의가 떠올랐다. “리나, 모든 예비 전력을 진동 칼날에 집중시켜! 한 번에 끝낸다!”
    “위험해요, 카엘! 너무 근접전이에요! 실패하면…”
    “성공해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강철 파수꾼’은 돌연 괴물의 공격을 받아내지 않고 피하며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녀석의 뒤틀린 팔들이 사방에서 날아왔지만, 카엘은 베테랑 파일럿의 노련함으로 그 모든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냈다.

    괴물의 거대한 몸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녹슨 철제 뼈대가 눈앞에 가득 찼다. 썩은 금속 냄새가 조종석 내부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칼날 최대 출력! 지금입니다, 카엘!” 리나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엘은 조종간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강철 파수꾼’의 왼쪽 팔에 달린 진동 칼날이 맹렬한 굉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칼날을 따라 번쩍였다. 전력 소모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카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죽어라, 고철!”

    진동 칼날이 괴물의 몸통을 향해 맹렬하게 내리찍혔다. 쇠를 찢고 뼈를 가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녀석의 몸체를 이루고 있던 온갖 부품들이 격렬한 진동에 못 이겨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진동 칼날은 마침내 푸른 코어에 도달했고, 코어는 마치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듯 섬광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강철 파수꾼’의 눈앞에서 터져 나갔다. 충격파가 조종석을 강타했고, 카엘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움츠렸다. ‘강철 파수꾼’의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며 붉은 경고등을 뿜어냈다.

    몇 초 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조종석의 흔들림이 멈추고, 카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전방 스크린 너머로는 거대한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핀이 말했던 푸른 코어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의 그을음이 묻어 있었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공했다…!” 리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도감이 가득했다.
    카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철 파수꾼’의 시스템은 처참한 수준이었지만, 임무는 완수했다. 이 코어만 있다면, 다음 탐색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력이 바닥이야, 카엘. 지금 당장 이걸 가져가도… 복귀는 무리야.”
    리나의 차분한 목소리에 다시금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카엘은 스크린 너머로 무너진 도시의 끝없는 실루엣을 바라봤다.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지만, 이 폐허의 밤은 그 어떤 괴물보다도 잔혹했다.
    겨우 코어 하나를 손에 넣었을 뿐인데, 생존을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 메카 액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도시의 흉터가 하늘을 찢고 있었다. 한때는 번영을 노래했을 마천루의 앙상한 뼈대들이 끝없이 펼쳐진 폐허 위로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대한 기동 병기, ‘강철 파수꾼’의 조종석 안에서 카엘은 끈적한 땀을 닦아냈다. 투박한 금속 패널들로 둘러싸인 내부에는 오래된 기름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섞여 있었다. 전면 스크린 너머로는 희뿌연 먼지가 사방을 집어삼키고 있었지만, ‘강철 파수꾼’의 센서들은 묵묵히 길을 밝히고 있었다.

    “카엘, 전력 수치 70%까지 떨어졌어. 이대로는 예정된 복귀 지점까지 못 돌아가.”
    리나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조종석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녀는 후방 지원 차량에서 ‘강철 파수꾼’의 모든 시스템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목소리에는 미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알고 있어, 리나. 그 빌어먹을 에너지 잔류파, 꼭 찾아야 해.”
    카엘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일주일째였다. 녀석들은 거의 모든 예비 전력을 갉아먹었다. 이대로 물러나면 다음 탐색은 기약할 수 없었다. ‘강철 파수꾼’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 유일한 생존 수단이자, 이동하는 요새였다.

    강철 파수꾼의 육중한 발이 무너진 도로 위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낡은 콘크리트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거인의 어깨 위에선 대구경 운동 에너지포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했고, 왼쪽 팔뚝에는 거친 진동을 일으키는 거대한 진동 칼날이 달려 있었다. 모두 파편과 폐기된 부품들로 조립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기들이었다.

    “좌측 2시 방향, 희미하게 감지됩니다. 이전에 잡히던 것보다 훨씬 강해요. 움직임은… 불규칙적입니다.”
    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핀은 경량 수색 기체를 타고 ‘강철 파수꾼’의 전방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는 팀의 눈이었다.

    “불규칙적이라니?” 카엘이 되물었다. “오래된 감시 드론인가? 아니면… 철충?”
    “철충은 아닙니다. 최소한 패턴이 달라요. 너무… 크고, 둔탁해요.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움직이고 있어요.”
    핀의 목소리 끝에 미묘한 긴장감이 실렸다. 핀은 허세만 가득한 녀석이었지만, 그의 직감은 이 바닥에서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강철 파수꾼’은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카엘은 매니퓰레이터를 조작해 전방 스크린의 확대 배율을 높였다. 먼지와 안개 너머로, 희미한 윤곽이 잡혔다. 거대한… 기계. 하지만 온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마치 여러 대의 기계가 비정상적으로 엉겨 붙어 하나의 괴물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젠장… 저게 뭐야?” 카엘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형태예요. 잔류파의 근원지로 향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카엘!” 리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잔류파의 근원지. 그곳에 자신들이 찾는 에너지원이 있다면, 저 기괴한 괴물 역시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핀, 회수해. 교전한다.” 카엘이 명령했다.
    “회수? 저거 혼자서 상대하겠다고요? 보십시오, 저 기형적인 크기를!” 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어쩌겠어, 핀.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저놈이 먼저 전력원을 손에 넣게 둘 순 없지.” 카엘의 눈이 스크린 속 괴물을 응시했다. “리나, 모든 시스템 전투 모드로 전환. 에너지포 최대 충전 대기.”

    ‘강철 파수꾼’의 거대한 몸체에서 기계음과 함께 둔탁한 진동이 울렸다. 외부 장갑판 사이로 충전 중인 에너지포의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카엘은 조종간을 꽉 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기괴한 기계 괴물은 마치 땅의 일부인 양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황량한 폐허에 울려 퍼졌다. 녀석의 몸체 곳곳에선 부식된 장갑판이 너덜거렸고, 날카로운 파편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이따금씩 기묘한 전기 스파크가 튀기도 했다.

    “사정거리 300, 200… 150!” 리나가 카운트다운 했다.
    “발사!” 카엘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앙!

    ‘강철 파수꾼’의 어깨 위에 장착된 대구경 운동 에너지포가 포효하며 거대한 푸른 섬광을 뿜어냈다. 수십 톤의 금속을 압축한 듯한 포탄이 음속을 뚫고 날아가 괴물의 몸통을 강타했다.

    쿠우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괴물의 몸체에서 파편과 연기가 솟구쳤다. 잠시 녀석의 움직임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녀석은 더욱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낡은 기계팔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며 비명을 질렀고, 녀석의 몸체에서 또 다른 기형적인 부속들이 튀어나왔다.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오히려 활성화되고 있어요!” 리나가 경악했다.

    괴물은 마치 진흙 속을 기어 다니는 거대한 지네처럼, 뒤틀린 몸체를 이끌고 ‘강철 파수꾼’을 향해 돌진해왔다. 땅을 울리는 진동이 조종석까지 전달되었다.

    “망할…! 핀, 엄호 사격!”
    “쳇, 알겠습니다!”

    핀의 경량 기체에서 기관포탄이 쏟아져 나와 괴물의 몸통을 긁어댔다. 하지만 녀석의 단단한 외피에는 작은 흠집만을 남길 뿐이었다. 괴물의 앞부분에서 거대한 금속 갈고리가 튀어나오며 ‘강철 파수꾼’을 향해 휘둘러졌다.

    카엘은 재빨리 매니퓰레이터를 조작해 회피 기동을 지시했다. ‘강철 파수꾼’의 육중한 몸체가 간발의 차이로 갈고리를 피해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갈고리의 끝이 ‘강철 파수꾼’의 왼쪽 어깨 장갑을 스쳤고, 끔찍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조종석 내부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좌측 어깨 장갑 파손! 전력 케이블 일부 노출!” 리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강철 파수꾼’의 어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저 녀석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였다.

    “리나, 괴물의 움직임 패턴 분석해! 핀, 녀석의 약점을 찾아!” 카엘이 외쳤다.

    괴물은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낡은 유압 장치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팔들이 ‘강철 파수꾼’을 짓누르려 했다. 카엘은 맹렬히 방어하며 빈틈을 찾았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들은 전투의 격렬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더욱 무너져 내렸다. 건물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녀석의 심층 구조가 너무 복잡해요! 마치 무작위로 부품을 쌓아 올린 것 같아요!” 리나가 보고했다.
    “잠깐, 카엘! 저기! 녀석의 몸통 중앙에, 뭔가 이질적인 부품이 보입니다! 다른 부품들에 비해 유독 깨끗하고, 푸른빛을 띄고 있어요!” 핀의 목소리에 희망이 섞여 있었다.

    카엘은 핀의 지시를 따라 시야를 고정했다. 괴물의 뒤틀린 금속 덩어리 한가운데, 작지만 선명하게 푸른빛을 내뿜는 정육면체 형태의 코어가 박혀 있었다. 자신들이 찾는 에너지 잔류파의 근원지. 괴물은 그 코어를 마치 자신의 심장처럼 품고 있었다.

    “저게 녀석의 전력원이군! 어쩐지 활성화된다 싶었어!” 카엘의 얼굴에 결의가 떠올랐다. “리나, 모든 예비 전력을 진동 칼날에 집중시켜! 한 번에 끝낸다!”
    “위험해요, 카엘! 너무 근접전이에요! 실패하면…”
    “성공해야 해. 다른 방법은 없어!”

    ‘강철 파수꾼’은 돌연 괴물의 공격을 받아내지 않고 피하며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녀석의 뒤틀린 팔들이 사방에서 날아왔지만, 카엘은 베테랑 파일럿의 노련함으로 그 모든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려보냈다.

    괴물의 거대한 몸체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녹슨 철제 뼈대가 눈앞에 가득 찼다. 썩은 금속 냄새가 조종석 내부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칼날 최대 출력! 지금입니다, 카엘!” 리나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엘은 조종간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강철 파수꾼’의 왼쪽 팔에 달린 진동 칼날이 맹렬한 굉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칼날을 따라 번쩍였다. 전력 소모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카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죽어라, 고철!”

    진동 칼날이 괴물의 몸통을 향해 맹렬하게 내리찍혔다. 쇠를 찢고 뼈를 가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녀석의 몸체를 이루고 있던 온갖 부품들이 격렬한 진동에 못 이겨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진동 칼날은 마침내 푸른 코어에 도달했고, 코어는 마치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듯 섬광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강철 파수꾼’의 눈앞에서 터져 나갔다. 충격파가 조종석을 강타했고, 카엘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움츠렸다. ‘강철 파수꾼’의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며 붉은 경고등을 뿜어냈다.

    몇 초 후,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조종석의 흔들림이 멈추고, 카엘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전방 스크린 너머로는 거대한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검은 연기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핀이 말했던 푸른 코어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의 그을음이 묻어 있었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공했다…!” 리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도감이 가득했다.
    카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철 파수꾼’의 시스템은 처참한 수준이었지만, 임무는 완수했다. 이 코어만 있다면, 다음 탐색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력이 바닥이야, 카엘. 지금 당장 이걸 가져가도… 복귀는 무리야.”
    리나의 차분한 목소리에 다시금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카엘은 스크린 너머로 무너진 도시의 끝없는 실루엣을 바라봤다.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지만, 이 폐허의 밤은 그 어떤 괴물보다도 잔혹했다.
    겨우 코어 하나를 손에 넣었을 뿐인데, 생존을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27화: 심연의 비수

    지하 벙커의 공기는 늘 습하고 차가웠다. 눅눅한 흙냄새와 희미한 촛농 냄새가 뒤섞여 희망 없는 현실처럼 폐부를 찔렀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은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에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는 좁은 공간에 모인 이들의 불안한 실루엣을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새벽의 그림자’라고 자칭하는 반란 조직의 지도부, 스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들이 삐걱거리는 나무 테이블 주위에 모여 있었다. 각자의 얼굴에는 수개월간 지속된 굶주림과 피로, 그리고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테이블 중앙에는 도시 지도가 펼쳐져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외우고 외워서 눈을 감아도 모든 골목과 순찰 경로를 꿰뚫고 있었다. 문제는 지도가 아니라, 지도 밖의 현실이었다. 제국의 압박은 날마다 숨통을 조여왔고, 식량과 물자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우는 축 늘어진 어깨로 촛불을 응시했다. 그의 손은 이미 굳은살이 박히고 거칠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짊어진 무게가 손끝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젊은 나이에 이들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늘 한정적이었다.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그들은 그저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진우 님.”

    정적을 깬 건 수아였다. 그녀는 열기로 가득 찬 눈으로 진우를 똑바로 바라봤다. 스무 살 초반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황제는 계속 우리의 목을 조여올 겁니다. ‘충성 맹세’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어요. 더 이상 숨어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숨다가는 결국 굶어 죽거나, 제국 놈들의 발톱에 찢겨 죽을 뿐이에요. 공격해야 합니다. 보급선 공격! 저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야 합니다!”

    수아의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동의하는 자들도 있었고,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수아가 미처 보지 못하는 깊은 절망감이 스며 있었다.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수아를 지나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들 하나하나를 훑었다. “성급한 공격은 더 많은 희생을 부를 뿐이다. 보급선은 미끼일 수도 있어. 제국 놈들은 우리가 굶주렸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

    “미끼면 어떻습니까? 미끼를 물지 않으면 우리는 굶어 죽어요!” 수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이 하루에 하나씩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게 낫습니다!”

    수아의 말은 격정적이었고, 진심이었다. 그러나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멸하는 것이다. 너의 열정은 이해하지만, 이 결정은 단순한 감정으로 내려질 수 없어.”

    그때, 테이블 한켠에 앉아있던 강 노인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주름투성이였지만, 눈빛만큼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형형했다. 그는 한때 제국군의 보급병으로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

    “진우의 말이 맞아. 하지만 수아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구나. 우리가 언제까지 지하에서 썩을 수는 없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쥐덫에 걸릴 뿐이지.”

    강 노인은 지팡이로 낡은 지도를 톡톡 두드렸다. “제국은 거대하다. 우리가 보급선 하나를 흔든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아. 오히려 분노한 제국이 이 도시를 통째로 불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진우,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자네의 판단은 늘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었네.”

    강 노인의 질문은 진우에게 모든 무게를 실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밤 꿈에 나타났던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배고픔에 지쳐 쓰러지던 아이의 얼굴, 제국군에 끌려가던 여인의 절규, 그리고 자신을 믿고 이 지하 벙커에 몸을 숨긴 사람들의 희망이 담긴 눈빛. 그들의 목숨이, 그들의 미래가 오롯이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모든 순간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짓눌렀다. 평범한 삶을 살던 자신에게 이런 짐이 지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그저 고향 마을의 평범한 농부였다. 제국의 횡포에 가족과 친구를 잃고, 분노와 절망 속에서 이 무모한 반란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뿐이다.

    싸우지 않으면 죽는다. 싸워도 죽는다. 그러나 싸우면… 어쩌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눈이 다시 떠졌다. 촛불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제국의 보급선은 항상 삼엄한 경계를 받고 있다. 우리가 습격한다 해도 온전한 물자를 확보하기는 어려울 거야. 오히려 제국군 본대가 즉시 출동하여 우리를 포위할 가능성이 더 커.” 진우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모두가 그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우리는 미끼를 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끼를 역이용할 순 있다.”

    수아의 눈이 커졌다. “역이용이요?”

    진우는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시 외곽, 제국군의 주요 병영과 식량 창고가 있는 지역이었다. “제국은 우리가 식량에 굶주렸다는 것을 알고 보급선을 일부러 노출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식량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진우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진짜 노려야 할 것은, 그들의 ‘정보’다. 보급선 습격을 유인책으로 쓰고, 그 혼란 속에서 제국군 병영 내의 통신탑을 노린다. 제국의 통신망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정보 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거다.”

    “하지만… 통신탑은 삼엄한 경비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급선 습격보다 훨씬 위험해요.”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유인책이 필요한 거다.” 진우는 말했다. “보급선에 시선을 돌리게 한 후, 정예 요원들이 침투하는 거야. 제국이 보급선 방어에 집중하는 사이, 우리는 그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이 도시가 들고일어설 기회다.”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과 함께 더 큰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건 훨씬 더 대담하고, 훨씬 더 위험한 계획이었다. 성공한다면 제국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그들은 단 한 번의 시도로 모든 것을 잃게 될 터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땀으로 범벅된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했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등 뒤에서는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지하 벙커로는 어울리지 않는 희미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급… 급보입니다! 제국 순찰대가… 저희 출입구에서 불과 백 보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습니다! 광견들처럼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주변을 맴돌았다고 합니다!”

    청년의 절규에 벙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웅성거림은 비명으로 변했고, 몇몇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 했다. 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제국의 촉수가 마침내 여기까지 뻗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나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다.

    모든 시선이 진우에게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할 시간도, 논쟁할 시간도 없었다. 바로 지금, 당장 결정해야 했다. 수아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이판사판의 결의가 떠올랐다. 강 노인은 지팡이를 꽉 쥐고 진우를 묵묵히 응시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은 촛불보다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피 비린내가 날 것 같은 철의 의지가 벼려지는 순간이었다.

    “수아! 네 말이 옳았다.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어. 모두 준비해! 지금 당장, 계획을 앞당긴다! 통신탑을 노려라! 오늘 밤, 우리는 제국의 눈을 뽑고 귀를 찢을 것이다!”

    그의 명령과 함께 벙커 안의 모든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그들은 오늘 밤,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제국의 칼날 아래 영원히 잠들게 될까.

    출입구에서 들려오는 금속음은 이제 너무나 선명했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두워진 숲의 심장부,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윤설아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비단 저고리 위로 덧입은 진한 색의 두루마기가 밤의 어둠에 그녀를 숨겨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기다림은 늘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숲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부엉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 인간의 소리는 일절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설아의 예민한 귀에 아주 미세한 소리가 포착됐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러나 그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였다.

    숲 깊은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나뭇가지 사이에서,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 달빛을 받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흰 목덜미, 짙은 밤색의 피부, 그리고 머리 위로 솟아난 뿔은 마치 새벽 안개 속의 고목처럼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숲의 공기가 마법처럼 변하는 듯했다.

    “카인.”

    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속삭임이었지만, 숲의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카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려한 뿔을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깊은 밤의 호수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설아를 향한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그의 종족, ‘어둠사슴족’은 인간에게는 오래전부터 ‘숲의 악마’ 혹은 ‘이계의 망령’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히 그들을 마주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속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설아에게 카인은 그저 카인이었다.
    오직 그녀만의 카인.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에게서는 숲의 향기와, 은은한 풀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따스한 체향이 느껴졌다. 설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두루마기 위로도 그의 단단한 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뼈마디가 굵고 힘줄이 도드라진 손이었지만, 설아의 허리를 감싼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늦었어.”

    설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새어 나오는 투정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미안하다. 순찰이 강화되었다. 네 종족의 사냥꾼들이 어젯밤부터 숲 어귀까지 들쑤시고 다니더군.” 카인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길고 섬세한 눈썹, 오뚝한 콧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각 같았다. 다만 귓가에 솟아난 작은 뿔과 길게 찢어진 동공만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이 숲 안쪽까지 들어온 건 오랜만이잖아.” 설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인간과 어둠사슴족은 수백 년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설아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 불문율이 깨진 날은 언제나 피의 비극이 뒤따랐다.

    카인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쪽 곶에서 너희 종족 상인들이 우리 종족의 성지를 훼손했어. 오래된 나무의 가지를 꺾고, 신성한 샘물을 더럽혔지. 우리는 경고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설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래서…” 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었으나, 설아는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제, 그 상인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숲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응당한 벌’이라는 말에 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할 수 없는 피의 복수. 어둠사슴족이 인간에게 품는 증오, 그리고 인간이 그들을 향해 품는 두려움은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얽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기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설아는 그의 품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들이 너를 찾기 위해 더 혈안이 될 거야. 지금 인간들은 그대 종족을 미쳤다고 여길 게 분명해.”

    “두렵지 않으냐, 설아?” 카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한 얼굴. “나를 만나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

    설아는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예상외로 차가웠다. “그대 없는 삶이 더 두렵소, 카인. 나는… 나는 이 금지된 숲 속에서 그대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껴.”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힘을 얻었다. “인간들은 그대들을 모르오. 그대들의 강인함과 고결함을. 그대들의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카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길에 맞춰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얼굴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설아의 눈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달빛이 가장 고요하게 쏟아지는 이 숲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갑작스러운 소리에 설아의 몸이 굳었다. 숲의 바깥쪽, 덤불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인간의 발소리! 설아는 본능적으로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숲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는 듯, 그의 귓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재빨리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 “인간이다. 수가 많다.”

    “안 돼! 그들에게 들키면…!” 설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인이 습격당한 것에 분노하여, 어둠사슴족을 사냥하기 위해 무장한 채 숲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설아와 카인의 만남을 목격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찾아올 것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니. 들킬 수 없다.”

    그는 설아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달리는 대로 달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

    “카인…!” 설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헤어지면, 그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서둘러!” 카인은 마지막으로 설아를 품에 강하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카인은 망설임 없이 숲의 더 깊은 곳, 인간들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조각의 밤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인!” 설아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숲의 어둠은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타닥타닥!*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횃불의 불빛.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카인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숲의 지형은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발은 자꾸만 엉키는 듯했다. 나뭇가지에 옷이 긁히고, 얼굴에 차가운 잎사귀가 스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작은 바위 뒤에 몸을 숨겼을 때, 그녀의 귀에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놈들이 이 근처에 숨어있을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찾아라!”
    “나무 위도 확인해!”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횃불이 설아가 숨어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곳을 지나갔다. 설아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카인은… 카인은 무사할까? 그녀를 위해 미끼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카인이 선물해 준, 숲의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밤의 이슬’을 머금은 푸른 빛깔의 돌이 들어 있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카인…”

    간절한 속삭임이 밤의 숲에 흩어졌다. 설아는 이 모든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이 단 한 순간도 식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는 눈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리라. 인간과 어둠사슴족의 금지된 장막을 걷어내고, 그와 함께 이 숲을 영원히 거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더 이상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의 떨림이었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두워진 숲의 심장부,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윤설아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비단 저고리 위로 덧입은 진한 색의 두루마기가 밤의 어둠에 그녀를 숨겨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기다림은 늘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숲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부엉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 인간의 소리는 일절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설아의 예민한 귀에 아주 미세한 소리가 포착됐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러나 그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였다.

    숲 깊은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나뭇가지 사이에서,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 달빛을 받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흰 목덜미, 짙은 밤색의 피부, 그리고 머리 위로 솟아난 뿔은 마치 새벽 안개 속의 고목처럼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숲의 공기가 마법처럼 변하는 듯했다.

    “카인.”

    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속삭임이었지만, 숲의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카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려한 뿔을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깊은 밤의 호수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설아를 향한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그의 종족, ‘어둠사슴족’은 인간에게는 오래전부터 ‘숲의 악마’ 혹은 ‘이계의 망령’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히 그들을 마주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속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설아에게 카인은 그저 카인이었다.
    오직 그녀만의 카인.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에게서는 숲의 향기와, 은은한 풀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따스한 체향이 느껴졌다. 설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두루마기 위로도 그의 단단한 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뼈마디가 굵고 힘줄이 도드라진 손이었지만, 설아의 허리를 감싼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늦었어.”

    설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새어 나오는 투정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미안하다. 순찰이 강화되었다. 네 종족의 사냥꾼들이 어젯밤부터 숲 어귀까지 들쑤시고 다니더군.” 카인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길고 섬세한 눈썹, 오뚝한 콧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각 같았다. 다만 귓가에 솟아난 작은 뿔과 길게 찢어진 동공만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이 숲 안쪽까지 들어온 건 오랜만이잖아.” 설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인간과 어둠사슴족은 수백 년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설아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 불문율이 깨진 날은 언제나 피의 비극이 뒤따랐다.

    카인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쪽 곶에서 너희 종족 상인들이 우리 종족의 성지를 훼손했어. 오래된 나무의 가지를 꺾고, 신성한 샘물을 더럽혔지. 우리는 경고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설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래서…” 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었으나, 설아는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제, 그 상인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숲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응당한 벌’이라는 말에 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할 수 없는 피의 복수. 어둠사슴족이 인간에게 품는 증오, 그리고 인간이 그들을 향해 품는 두려움은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얽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기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설아는 그의 품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들이 너를 찾기 위해 더 혈안이 될 거야. 지금 인간들은 그대 종족을 미쳤다고 여길 게 분명해.”

    “두렵지 않으냐, 설아?” 카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한 얼굴. “나를 만나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

    설아는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예상외로 차가웠다. “그대 없는 삶이 더 두렵소, 카인. 나는… 나는 이 금지된 숲 속에서 그대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껴.”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힘을 얻었다. “인간들은 그대들을 모르오. 그대들의 강인함과 고결함을. 그대들의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카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길에 맞춰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얼굴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설아의 눈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달빛이 가장 고요하게 쏟아지는 이 숲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갑작스러운 소리에 설아의 몸이 굳었다. 숲의 바깥쪽, 덤불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인간의 발소리! 설아는 본능적으로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숲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는 듯, 그의 귓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재빨리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 “인간이다. 수가 많다.”

    “안 돼! 그들에게 들키면…!” 설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인이 습격당한 것에 분노하여, 어둠사슴족을 사냥하기 위해 무장한 채 숲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설아와 카인의 만남을 목격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찾아올 것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니. 들킬 수 없다.”

    그는 설아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달리는 대로 달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

    “카인…!” 설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헤어지면, 그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서둘러!” 카인은 마지막으로 설아를 품에 강하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카인은 망설임 없이 숲의 더 깊은 곳, 인간들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조각의 밤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인!” 설아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숲의 어둠은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타닥타닥!*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횃불의 불빛.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카인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숲의 지형은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발은 자꾸만 엉키는 듯했다. 나뭇가지에 옷이 긁히고, 얼굴에 차가운 잎사귀가 스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작은 바위 뒤에 몸을 숨겼을 때, 그녀의 귀에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놈들이 이 근처에 숨어있을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찾아라!”
    “나무 위도 확인해!”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횃불이 설아가 숨어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곳을 지나갔다. 설아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카인은… 카인은 무사할까? 그녀를 위해 미끼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카인이 선물해 준, 숲의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밤의 이슬’을 머금은 푸른 빛깔의 돌이 들어 있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카인…”

    간절한 속삭임이 밤의 숲에 흩어졌다. 설아는 이 모든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이 단 한 순간도 식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는 눈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리라. 인간과 어둠사슴족의 금지된 장막을 걷어내고, 그와 함께 이 숲을 영원히 거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더 이상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의 떨림이었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두워진 숲의 심장부,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윤설아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비단 저고리 위로 덧입은 진한 색의 두루마기가 밤의 어둠에 그녀를 숨겨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기다림은 늘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숲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부엉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 인간의 소리는 일절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설아의 예민한 귀에 아주 미세한 소리가 포착됐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러나 그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였다.

    숲 깊은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나뭇가지 사이에서,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 달빛을 받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흰 목덜미, 짙은 밤색의 피부, 그리고 머리 위로 솟아난 뿔은 마치 새벽 안개 속의 고목처럼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숲의 공기가 마법처럼 변하는 듯했다.

    “카인.”

    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속삭임이었지만, 숲의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카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려한 뿔을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깊은 밤의 호수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설아를 향한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그의 종족, ‘어둠사슴족’은 인간에게는 오래전부터 ‘숲의 악마’ 혹은 ‘이계의 망령’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히 그들을 마주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속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설아에게 카인은 그저 카인이었다.
    오직 그녀만의 카인.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에게서는 숲의 향기와, 은은한 풀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따스한 체향이 느껴졌다. 설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두루마기 위로도 그의 단단한 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뼈마디가 굵고 힘줄이 도드라진 손이었지만, 설아의 허리를 감싼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늦었어.”

    설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새어 나오는 투정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미안하다. 순찰이 강화되었다. 네 종족의 사냥꾼들이 어젯밤부터 숲 어귀까지 들쑤시고 다니더군.” 카인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길고 섬세한 눈썹, 오뚝한 콧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각 같았다. 다만 귓가에 솟아난 작은 뿔과 길게 찢어진 동공만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이 숲 안쪽까지 들어온 건 오랜만이잖아.” 설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인간과 어둠사슴족은 수백 년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설아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 불문율이 깨진 날은 언제나 피의 비극이 뒤따랐다.

    카인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쪽 곶에서 너희 종족 상인들이 우리 종족의 성지를 훼손했어. 오래된 나무의 가지를 꺾고, 신성한 샘물을 더럽혔지. 우리는 경고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설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래서…” 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었으나, 설아는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제, 그 상인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숲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응당한 벌’이라는 말에 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할 수 없는 피의 복수. 어둠사슴족이 인간에게 품는 증오, 그리고 인간이 그들을 향해 품는 두려움은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얽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기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설아는 그의 품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들이 너를 찾기 위해 더 혈안이 될 거야. 지금 인간들은 그대 종족을 미쳤다고 여길 게 분명해.”

    “두렵지 않으냐, 설아?” 카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한 얼굴. “나를 만나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

    설아는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예상외로 차가웠다. “그대 없는 삶이 더 두렵소, 카인. 나는… 나는 이 금지된 숲 속에서 그대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껴.”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힘을 얻었다. “인간들은 그대들을 모르오. 그대들의 강인함과 고결함을. 그대들의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카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길에 맞춰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얼굴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설아의 눈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달빛이 가장 고요하게 쏟아지는 이 숲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갑작스러운 소리에 설아의 몸이 굳었다. 숲의 바깥쪽, 덤불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인간의 발소리! 설아는 본능적으로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숲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는 듯, 그의 귓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재빨리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 “인간이다. 수가 많다.”

    “안 돼! 그들에게 들키면…!” 설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인이 습격당한 것에 분노하여, 어둠사슴족을 사냥하기 위해 무장한 채 숲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설아와 카인의 만남을 목격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찾아올 것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니. 들킬 수 없다.”

    그는 설아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달리는 대로 달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

    “카인…!” 설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헤어지면, 그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서둘러!” 카인은 마지막으로 설아를 품에 강하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카인은 망설임 없이 숲의 더 깊은 곳, 인간들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조각의 밤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인!” 설아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숲의 어둠은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타닥타닥!*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횃불의 불빛.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카인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숲의 지형은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발은 자꾸만 엉키는 듯했다. 나뭇가지에 옷이 긁히고, 얼굴에 차가운 잎사귀가 스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작은 바위 뒤에 몸을 숨겼을 때, 그녀의 귀에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놈들이 이 근처에 숨어있을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찾아라!”
    “나무 위도 확인해!”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횃불이 설아가 숨어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곳을 지나갔다. 설아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카인은… 카인은 무사할까? 그녀를 위해 미끼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카인이 선물해 준, 숲의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밤의 이슬’을 머금은 푸른 빛깔의 돌이 들어 있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카인…”

    간절한 속삭임이 밤의 숲에 흩어졌다. 설아는 이 모든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이 단 한 순간도 식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는 눈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리라. 인간과 어둠사슴족의 금지된 장막을 걷어내고, 그와 함께 이 숲을 영원히 거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더 이상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의 떨림이었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두워진 숲의 심장부,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윤설아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비단 저고리 위로 덧입은 진한 색의 두루마기가 밤의 어둠에 그녀를 숨겨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기다림은 늘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숲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부엉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 인간의 소리는 일절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설아의 예민한 귀에 아주 미세한 소리가 포착됐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러나 그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였다.

    숲 깊은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나뭇가지 사이에서,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 달빛을 받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흰 목덜미, 짙은 밤색의 피부, 그리고 머리 위로 솟아난 뿔은 마치 새벽 안개 속의 고목처럼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숲의 공기가 마법처럼 변하는 듯했다.

    “카인.”

    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속삭임이었지만, 숲의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카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려한 뿔을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깊은 밤의 호수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설아를 향한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그의 종족, ‘어둠사슴족’은 인간에게는 오래전부터 ‘숲의 악마’ 혹은 ‘이계의 망령’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히 그들을 마주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속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설아에게 카인은 그저 카인이었다.
    오직 그녀만의 카인.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에게서는 숲의 향기와, 은은한 풀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따스한 체향이 느껴졌다. 설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두루마기 위로도 그의 단단한 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뼈마디가 굵고 힘줄이 도드라진 손이었지만, 설아의 허리를 감싼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늦었어.”

    설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새어 나오는 투정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미안하다. 순찰이 강화되었다. 네 종족의 사냥꾼들이 어젯밤부터 숲 어귀까지 들쑤시고 다니더군.” 카인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길고 섬세한 눈썹, 오뚝한 콧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각 같았다. 다만 귓가에 솟아난 작은 뿔과 길게 찢어진 동공만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이 숲 안쪽까지 들어온 건 오랜만이잖아.” 설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인간과 어둠사슴족은 수백 년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설아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 불문율이 깨진 날은 언제나 피의 비극이 뒤따랐다.

    카인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쪽 곶에서 너희 종족 상인들이 우리 종족의 성지를 훼손했어. 오래된 나무의 가지를 꺾고, 신성한 샘물을 더럽혔지. 우리는 경고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설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래서…” 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었으나, 설아는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제, 그 상인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숲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응당한 벌’이라는 말에 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할 수 없는 피의 복수. 어둠사슴족이 인간에게 품는 증오, 그리고 인간이 그들을 향해 품는 두려움은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얽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기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설아는 그의 품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들이 너를 찾기 위해 더 혈안이 될 거야. 지금 인간들은 그대 종족을 미쳤다고 여길 게 분명해.”

    “두렵지 않으냐, 설아?” 카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한 얼굴. “나를 만나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

    설아는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예상외로 차가웠다. “그대 없는 삶이 더 두렵소, 카인. 나는… 나는 이 금지된 숲 속에서 그대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껴.”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힘을 얻었다. “인간들은 그대들을 모르오. 그대들의 강인함과 고결함을. 그대들의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카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길에 맞춰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얼굴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설아의 눈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달빛이 가장 고요하게 쏟아지는 이 숲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갑작스러운 소리에 설아의 몸이 굳었다. 숲의 바깥쪽, 덤불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인간의 발소리! 설아는 본능적으로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숲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는 듯, 그의 귓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재빨리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 “인간이다. 수가 많다.”

    “안 돼! 그들에게 들키면…!” 설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인이 습격당한 것에 분노하여, 어둠사슴족을 사냥하기 위해 무장한 채 숲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설아와 카인의 만남을 목격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찾아올 것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니. 들킬 수 없다.”

    그는 설아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달리는 대로 달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

    “카인…!” 설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헤어지면, 그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서둘러!” 카인은 마지막으로 설아를 품에 강하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카인은 망설임 없이 숲의 더 깊은 곳, 인간들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조각의 밤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인!” 설아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숲의 어둠은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타닥타닥!*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횃불의 불빛.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카인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숲의 지형은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발은 자꾸만 엉키는 듯했다. 나뭇가지에 옷이 긁히고, 얼굴에 차가운 잎사귀가 스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작은 바위 뒤에 몸을 숨겼을 때, 그녀의 귀에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놈들이 이 근처에 숨어있을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찾아라!”
    “나무 위도 확인해!”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횃불이 설아가 숨어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곳을 지나갔다. 설아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카인은… 카인은 무사할까? 그녀를 위해 미끼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카인이 선물해 준, 숲의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밤의 이슬’을 머금은 푸른 빛깔의 돌이 들어 있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카인…”

    간절한 속삭임이 밤의 숲에 흩어졌다. 설아는 이 모든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이 단 한 순간도 식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는 눈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리라. 인간과 어둠사슴족의 금지된 장막을 걷어내고, 그와 함께 이 숲을 영원히 거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더 이상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의 떨림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붉은 복수의 서막

    차가운 비가 내리는 폐허의 도시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뼈대만이 하늘을 향해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은 영혼 없는 눈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진우는 허물어진 백화점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축축한 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응시했다. 그의 왼쪽 눈 아래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는 빗물에 젖어 더욱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이현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비바람에 섞여 허무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증오의 무게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3년 전, 모든 것이 무너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진우는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함께 굶주리고 싸웠던 유일한 동반자.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맡겼던 동료. 그 모든 믿음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한낱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깊은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그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현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흉터는, 그 추락의 대가였다.

    그날 이후, 진우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흘러왔다. 복수. 현재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얻어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폐쇄된 통신망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정보를 입수했다. 현재가 도시 외곽에 거대한 ‘안식처’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굶주림과 약탈로 점철된 세상에서, 안식처라니. 역겨운 위선이었다.

    진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옥상 난간을 넘어섰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 손에 든 소음기가 달린 개량형 자동권총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그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빗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민첩하고 조용했다. 폐허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약육강식의 법칙뿐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는 굶주린 괴물들과, 그 괴물보다 더 잔인한 인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몇 시간의 은밀한 이동 끝에, 진우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거대한 철제 울타리를 발견했다. 현재가 ‘새로운 새벽’이라 부르며 구축했다는 요새였다. 높다란 벽 위로는 섬광탄이 주기적으로 터져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마저 들려왔다. 바깥세상이 핏빛으로 물든 절규와 고통의 연속이라면, 저 안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진우는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시야를 조정하자, 요새 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고, 온실에서는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중앙 광장에 세워진 임시 단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남자.

    이현재.

    예전보다 살이 붙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그때 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했고,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악의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자신뿐일 터였다.

    “…우리는 함께 이 역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현재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진우의 귀에까지 닿았다. 위선적인 구호들. 진우는 망원경을 내렸다. 심장이 분노로 쿵쾅거렸다. 저렇게 평화로운 척, 고귀한 척 연기하는 모습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복수는 단순히 목숨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현재가 힘들게 쌓아 올린 이 모든 기만적인 성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는 요새의 외곽을 따라 움직였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진우는 이 폐허의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더러운 기술들을 익혔다. 낡은 배수로와 버려진 시설물들 사이를 기어 다니며, 그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냈다. 요새 내부에 물을 공급하는 거대한 파이프라인.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비상 발전기.

    ‘그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날카로운 공구들이 그의 손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끈적이는 기름때가 그의 손에 묻어났다. 물 공급을 끊는 것은 너무 잔인했다. 그 안에 갇힌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전기는 달랐다. 빛과 안정은 현재의 권위를 상징했다.

    몇 분 후,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거대한 발전기는 굉음을 내며 비틀거렸고, 잠시 후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를 뿜어내며 침묵했다. 요새 전체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광장에 울려 퍼지던 현재의 목소리도, 사람들의 환호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혼란에 빠진 비명 소리와 당황한 병사들의 외침이 어둠을 가득 메웠다.

    진우는 그림자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요새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안에 있는 현재의 얼굴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멀리서 불빛 하나 없는 요새를 응시했다. 혼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이현재.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다.”

    진우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의 서막은, 이제 막 올랐을 뿐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붉은 복수의 서막

    차가운 비가 내리는 폐허의 도시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뼈대만이 하늘을 향해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은 영혼 없는 눈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진우는 허물어진 백화점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축축한 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응시했다. 그의 왼쪽 눈 아래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는 빗물에 젖어 더욱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이현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비바람에 섞여 허무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증오의 무게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3년 전, 모든 것이 무너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진우는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함께 굶주리고 싸웠던 유일한 동반자.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맡겼던 동료. 그 모든 믿음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한낱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깊은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그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현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흉터는, 그 추락의 대가였다.

    그날 이후, 진우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흘러왔다. 복수. 현재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얻어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폐쇄된 통신망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정보를 입수했다. 현재가 도시 외곽에 거대한 ‘안식처’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굶주림과 약탈로 점철된 세상에서, 안식처라니. 역겨운 위선이었다.

    진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옥상 난간을 넘어섰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 손에 든 소음기가 달린 개량형 자동권총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그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빗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민첩하고 조용했다. 폐허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약육강식의 법칙뿐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는 굶주린 괴물들과, 그 괴물보다 더 잔인한 인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몇 시간의 은밀한 이동 끝에, 진우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거대한 철제 울타리를 발견했다. 현재가 ‘새로운 새벽’이라 부르며 구축했다는 요새였다. 높다란 벽 위로는 섬광탄이 주기적으로 터져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마저 들려왔다. 바깥세상이 핏빛으로 물든 절규와 고통의 연속이라면, 저 안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진우는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시야를 조정하자, 요새 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고, 온실에서는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중앙 광장에 세워진 임시 단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남자.

    이현재.

    예전보다 살이 붙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그때 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했고,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악의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자신뿐일 터였다.

    “…우리는 함께 이 역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현재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진우의 귀에까지 닿았다. 위선적인 구호들. 진우는 망원경을 내렸다. 심장이 분노로 쿵쾅거렸다. 저렇게 평화로운 척, 고귀한 척 연기하는 모습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복수는 단순히 목숨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현재가 힘들게 쌓아 올린 이 모든 기만적인 성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는 요새의 외곽을 따라 움직였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진우는 이 폐허의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더러운 기술들을 익혔다. 낡은 배수로와 버려진 시설물들 사이를 기어 다니며, 그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냈다. 요새 내부에 물을 공급하는 거대한 파이프라인.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비상 발전기.

    ‘그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날카로운 공구들이 그의 손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끈적이는 기름때가 그의 손에 묻어났다. 물 공급을 끊는 것은 너무 잔인했다. 그 안에 갇힌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전기는 달랐다. 빛과 안정은 현재의 권위를 상징했다.

    몇 분 후,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거대한 발전기는 굉음을 내며 비틀거렸고, 잠시 후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를 뿜어내며 침묵했다. 요새 전체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광장에 울려 퍼지던 현재의 목소리도, 사람들의 환호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혼란에 빠진 비명 소리와 당황한 병사들의 외침이 어둠을 가득 메웠다.

    진우는 그림자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요새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안에 있는 현재의 얼굴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멀리서 불빛 하나 없는 요새를 응시했다. 혼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이현재.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다.”

    진우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의 서막은, 이제 막 올랐을 뿐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붉은 복수의 서막

    차가운 비가 내리는 폐허의 도시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뼈대만이 하늘을 향해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은 영혼 없는 눈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진우는 허물어진 백화점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축축한 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응시했다. 그의 왼쪽 눈 아래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는 빗물에 젖어 더욱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이현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비바람에 섞여 허무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증오의 무게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3년 전, 모든 것이 무너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진우는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함께 굶주리고 싸웠던 유일한 동반자.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맡겼던 동료. 그 모든 믿음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한낱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깊은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그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현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흉터는, 그 추락의 대가였다.

    그날 이후, 진우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흘러왔다. 복수. 현재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얻어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폐쇄된 통신망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정보를 입수했다. 현재가 도시 외곽에 거대한 ‘안식처’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굶주림과 약탈로 점철된 세상에서, 안식처라니. 역겨운 위선이었다.

    진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옥상 난간을 넘어섰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 손에 든 소음기가 달린 개량형 자동권총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그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빗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민첩하고 조용했다. 폐허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약육강식의 법칙뿐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는 굶주린 괴물들과, 그 괴물보다 더 잔인한 인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몇 시간의 은밀한 이동 끝에, 진우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거대한 철제 울타리를 발견했다. 현재가 ‘새로운 새벽’이라 부르며 구축했다는 요새였다. 높다란 벽 위로는 섬광탄이 주기적으로 터져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마저 들려왔다. 바깥세상이 핏빛으로 물든 절규와 고통의 연속이라면, 저 안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진우는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시야를 조정하자, 요새 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고, 온실에서는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중앙 광장에 세워진 임시 단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남자.

    이현재.

    예전보다 살이 붙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그때 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했고,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악의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자신뿐일 터였다.

    “…우리는 함께 이 역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현재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진우의 귀에까지 닿았다. 위선적인 구호들. 진우는 망원경을 내렸다. 심장이 분노로 쿵쾅거렸다. 저렇게 평화로운 척, 고귀한 척 연기하는 모습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복수는 단순히 목숨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현재가 힘들게 쌓아 올린 이 모든 기만적인 성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는 요새의 외곽을 따라 움직였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진우는 이 폐허의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더러운 기술들을 익혔다. 낡은 배수로와 버려진 시설물들 사이를 기어 다니며, 그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냈다. 요새 내부에 물을 공급하는 거대한 파이프라인.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비상 발전기.

    ‘그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날카로운 공구들이 그의 손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끈적이는 기름때가 그의 손에 묻어났다. 물 공급을 끊는 것은 너무 잔인했다. 그 안에 갇힌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전기는 달랐다. 빛과 안정은 현재의 권위를 상징했다.

    몇 분 후,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거대한 발전기는 굉음을 내며 비틀거렸고, 잠시 후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를 뿜어내며 침묵했다. 요새 전체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광장에 울려 퍼지던 현재의 목소리도, 사람들의 환호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혼란에 빠진 비명 소리와 당황한 병사들의 외침이 어둠을 가득 메웠다.

    진우는 그림자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요새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안에 있는 현재의 얼굴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멀리서 불빛 하나 없는 요새를 응시했다. 혼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이현재.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다.”

    진우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의 서막은, 이제 막 올랐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