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두워진 숲의 심장부, 햇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윤설아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붉은 비단 저고리 위로 덧입은 진한 색의 두루마기가 밤의 어둠에 그녀를 숨겨주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기다림은 늘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숲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간간이 부엉이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올 뿐, 인간의 소리는 일절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설아의 예민한 귀에 아주 미세한 소리가 포착됐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이 지나는 소리 같기도 한. 그러나 그 어떤 자연의 소리보다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였다.

숲 깊은 곳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나뭇가지 사이에서, 길고 날렵한 실루엣이 달빛을 받으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흰 목덜미, 짙은 밤색의 피부, 그리고 머리 위로 솟아난 뿔은 마치 새벽 안개 속의 고목처럼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숲의 공기가 마법처럼 변하는 듯했다.

“카인.”

설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속삭임이었지만, 숲의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카인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미려한 뿔을 살짝 숙이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눈은 깊은 밤의 호수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설아를 향한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그의 종족, ‘어둠사슴족’은 인간에게는 오래전부터 ‘숲의 악마’ 혹은 ‘이계의 망령’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감히 그들을 마주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속설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설아에게 카인은 그저 카인이었다.
오직 그녀만의 카인.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에게서는 숲의 향기와, 은은한 풀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따스한 체향이 느껴졌다. 설아는 망설임 없이 그의 넓은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꺼운 두루마기 위로도 그의 단단한 몸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팔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뼈마디가 굵고 힘줄이 도드라진 손이었지만, 설아의 허리를 감싼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늦었어.”

설아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새어 나오는 투정에는 짙은 그리움이 묻어났다.

“미안하다. 순찰이 강화되었다. 네 종족의 사냥꾼들이 어젯밤부터 숲 어귀까지 들쑤시고 다니더군.” 카인의 목소리는 깊고 낮았으며,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설아는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길고 섬세한 눈썹, 오뚝한 콧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흰 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조각 같았다. 다만 귓가에 솟아난 작은 뿔과 길게 찢어진 동공만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들이 숲 안쪽까지 들어온 건 오랜만이잖아.” 설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배어 있었다. 인간과 어둠사슴족은 수백 년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설아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 불문율이 깨진 날은 언제나 피의 비극이 뒤따랐다.

카인의 눈동자가 잠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쪽 곶에서 너희 종족 상인들이 우리 종족의 성지를 훼손했어. 오래된 나무의 가지를 꺾고, 신성한 샘물을 더럽혔지. 우리는 경고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설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래서…” 카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었으나, 설아는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희미한 분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어제, 그 상인들에게 응당한 벌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숲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응당한 벌’이라는 말에 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할 수 없는 피의 복수. 어둠사슴족이 인간에게 품는 증오, 그리고 인간이 그들을 향해 품는 두려움은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얽혀 있었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금기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설아는 그의 품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그들이 너를 찾기 위해 더 혈안이 될 거야. 지금 인간들은 그대 종족을 미쳤다고 여길 게 분명해.”

“두렵지 않으냐, 설아?” 카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한 얼굴. “나를 만나는 것이 너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을 텐데.”

설아는 옅게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피부는 예상외로 차가웠다. “그대 없는 삶이 더 두렵소, 카인. 나는… 나는 이 금지된 숲 속에서 그대와 함께하는 이 순간만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껴.” 그녀의 목소리는 갈수록 힘을 얻었다. “인간들은 그대들을 모르오. 그대들의 강인함과 고결함을. 그대들의 숲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두.”

카인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길에 맞춰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얼굴은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의 시선은 설아의 눈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뜨거운 온기가 그녀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달빛이 가장 고요하게 쏟아지는 이 숲 속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춤을 추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갑작스러운 소리에 설아의 몸이 굳었다. 숲의 바깥쪽, 덤불 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인간의 발소리! 설아는 본능적으로 카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숲의 모든 소리를 포착하는 듯, 그의 귓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재빨리 설아의 손목을 잡았다. “인간이다. 수가 많다.”

“안 돼! 그들에게 들키면…!” 설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인이 습격당한 것에 분노하여, 어둠사슴족을 사냥하기 위해 무장한 채 숲을 헤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설아와 카인의 만남을 목격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 찾아올 것이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아니. 들킬 수 없다.”

그는 설아의 손을 놓아주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에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길을 열어줄 테니, 달리는 대로 달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라.”

“카인…!” 설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대로 헤어지면, 그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서둘러!” 카인은 마지막으로 설아를 품에 강하게 안았다가 놓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카인은 망설임 없이 숲의 더 깊은 곳, 인간들이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한 조각의 밤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카인!” 설아는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숲의 어둠은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

*타닥타닥!*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횃불의 불빛.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카인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숲의 지형은 그녀에게 익숙했지만,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발은 자꾸만 엉키는 듯했다. 나뭇가지에 옷이 긁히고, 얼굴에 차가운 잎사귀가 스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작은 바위 뒤에 몸을 숨겼을 때, 그녀의 귀에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놈들이 이 근처에 숨어있을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찾아라!”
“나무 위도 확인해!”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횃불이 설아가 숨어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곳을 지나갔다. 설아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카인은… 카인은 무사할까? 그녀를 위해 미끼가 되어준 것은 아닐까?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목에 걸린 작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카인이 선물해 준, 숲의 깊은 곳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밤의 이슬’을 머금은 푸른 빛깔의 돌이 들어 있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카인…”

간절한 속삭임이 밤의 숲에 흩어졌다. 설아는 이 모든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그를 향한 사랑이 단 한 순간도 식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위기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는 눈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서려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리라. 인간과 어둠사슴족의 금지된 장막을 걷어내고, 그와 함께 이 숲을 영원히 거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어둠 속에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은 더 이상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의 떨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