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

    낡은 시계는 오래전에 멈췄다. 더 이상 초침도 분침도 의미 없는 세상이었다. 지훈은 익숙하게 손목을 짚었지만, 텅 빈 감촉에 헛웃음을 흘렸다. 시계줄이 끊어진 것도, 아니 시계가 고장 난 것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제 시간은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몸이 느끼는 허기와 갈증으로만 가늠될 뿐이었다.

    축축한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모포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칼날 같았다. 아랫배에서 울리는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남은 깡통 하나를 다 비웠지만, 그건 며칠 전부터 이어지는 허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깡통 안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혀로 핥아 먹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헛구역질이 났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선 그 어떤 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씁쓸한 확신이 들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 그나마 온전한 벽 하나를 등지고 만든 임시 거처는 좁고 어두웠다. 밖에서는 새벽녘을 알리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낮이 되면 잠시 잦아들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이 도시를 잠식하는 섬뜩한 교향곡. 이젠 그 소리마저도 배경음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지훈은 낡은 배낭을 챙겼다. 안에 든 건 거의 없었다. 녹슨 단검 한 자루, 물통, 그리고 지난 던전에서 겨우 찾아낸 금속 파편 몇 개가 전부였다. 그 외엔 이 허물어져가는 세상에서 그를 지켜줄 어떤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몸뚱이조차도.

    어깨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쓰라렸다. 지난번 ‘균열’ 근처에서 도망치다 생긴 상처였다. 운이 좋았다. 더러운 짐승 한 마리에게 물렸을 뿐이었으니. 좀 더 운이 나빴다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으려는 더 거대한 것들의 먹이가 됐을 터였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오늘은 기필코 뭔가를 찾아야 했다. 먹을 것이든, 아니면 팔아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

    폐허 밖으로 나섰다. 새벽의 도시는 잿빛이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거리엔 온갖 잔해들이 파도처럼 쌓여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위험이었다. 붕괴된 건물 잔해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르는 돌연변이 쥐 떼부터, 어두운 골목길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생존자들까지. 특히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비심 없이 서로의 것을 빼앗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죽이고,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평화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상일 뿐이었다.

    목표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균열’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던전’이라고 불렀다. 정확히는 ‘폐기된 제3하수처리장 균열’. 이름만 들어도 역한 기운이 풍기는 곳이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위험하게,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장소였다.

    고층 빌딩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태양은 구름 뒤에 숨어 그 존재를 희미하게 알릴 뿐이었다. 지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던전에 도착해야 했다.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위험 요소도 줄어들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존자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높아지는 딜레마였다.

    무너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쳤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놀이터는 흙먼지에 뒤덮여 폐허가 되었다. 녹슨 그네와 미끄럼틀은 기괴한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 떼의 그림자가 음울했다.

    지훈은 발밑에 채이는 돌멩이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었다. 그의 눈은 오직 던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올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드디어 멀리서 그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싱크홀처럼 땅이 꺼져 들어간 곳. 마치 거인이 한입 베어 문 자국 같았다. 그곳이 바로 ‘제3하수처리장 균열’이었다. 주변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고, 그 밑으로 거대한 어둠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 입에서는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단검의 날을 확인하고, 낡은 장갑을 고쳐 꼈다. 물통을 입에 대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젠장, 뭐라도 나와라.”

    낮게 읊조리며 거대한 균열의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어둠이 그의 발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습기와 함께 희미한 빛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던전의 첫 번째 관문, 거대한 철문이 녹슨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음산하게 울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어둠과, 그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미지의 위협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

    낡은 시계는 오래전에 멈췄다. 더 이상 초침도 분침도 의미 없는 세상이었다. 지훈은 익숙하게 손목을 짚었지만, 텅 빈 감촉에 헛웃음을 흘렸다. 시계줄이 끊어진 것도, 아니 시계가 고장 난 것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제 시간은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몸이 느끼는 허기와 갈증으로만 가늠될 뿐이었다.

    축축한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모포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칼날 같았다. 아랫배에서 울리는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남은 깡통 하나를 다 비웠지만, 그건 며칠 전부터 이어지는 허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깡통 안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혀로 핥아 먹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헛구역질이 났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선 그 어떤 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씁쓸한 확신이 들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 그나마 온전한 벽 하나를 등지고 만든 임시 거처는 좁고 어두웠다. 밖에서는 새벽녘을 알리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낮이 되면 잠시 잦아들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이 도시를 잠식하는 섬뜩한 교향곡. 이젠 그 소리마저도 배경음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지훈은 낡은 배낭을 챙겼다. 안에 든 건 거의 없었다. 녹슨 단검 한 자루, 물통, 그리고 지난 던전에서 겨우 찾아낸 금속 파편 몇 개가 전부였다. 그 외엔 이 허물어져가는 세상에서 그를 지켜줄 어떤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몸뚱이조차도.

    어깨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쓰라렸다. 지난번 ‘균열’ 근처에서 도망치다 생긴 상처였다. 운이 좋았다. 더러운 짐승 한 마리에게 물렸을 뿐이었으니. 좀 더 운이 나빴다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으려는 더 거대한 것들의 먹이가 됐을 터였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오늘은 기필코 뭔가를 찾아야 했다. 먹을 것이든, 아니면 팔아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

    폐허 밖으로 나섰다. 새벽의 도시는 잿빛이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거리엔 온갖 잔해들이 파도처럼 쌓여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위험이었다. 붕괴된 건물 잔해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르는 돌연변이 쥐 떼부터, 어두운 골목길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생존자들까지. 특히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비심 없이 서로의 것을 빼앗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죽이고,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평화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상일 뿐이었다.

    목표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균열’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던전’이라고 불렀다. 정확히는 ‘폐기된 제3하수처리장 균열’. 이름만 들어도 역한 기운이 풍기는 곳이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위험하게,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장소였다.

    고층 빌딩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태양은 구름 뒤에 숨어 그 존재를 희미하게 알릴 뿐이었다. 지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던전에 도착해야 했다.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위험 요소도 줄어들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존자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높아지는 딜레마였다.

    무너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쳤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놀이터는 흙먼지에 뒤덮여 폐허가 되었다. 녹슨 그네와 미끄럼틀은 기괴한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 떼의 그림자가 음울했다.

    지훈은 발밑에 채이는 돌멩이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었다. 그의 눈은 오직 던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올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드디어 멀리서 그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싱크홀처럼 땅이 꺼져 들어간 곳. 마치 거인이 한입 베어 문 자국 같았다. 그곳이 바로 ‘제3하수처리장 균열’이었다. 주변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고, 그 밑으로 거대한 어둠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 입에서는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단검의 날을 확인하고, 낡은 장갑을 고쳐 꼈다. 물통을 입에 대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젠장, 뭐라도 나와라.”

    낮게 읊조리며 거대한 균열의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어둠이 그의 발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습기와 함께 희미한 빛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던전의 첫 번째 관문, 거대한 철문이 녹슨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음산하게 울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어둠과, 그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미지의 위협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

    낡은 시계는 오래전에 멈췄다. 더 이상 초침도 분침도 의미 없는 세상이었다. 지훈은 익숙하게 손목을 짚었지만, 텅 빈 감촉에 헛웃음을 흘렸다. 시계줄이 끊어진 것도, 아니 시계가 고장 난 것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제 시간은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몸이 느끼는 허기와 갈증으로만 가늠될 뿐이었다.

    축축한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모포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칼날 같았다. 아랫배에서 울리는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남은 깡통 하나를 다 비웠지만, 그건 며칠 전부터 이어지는 허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깡통 안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혀로 핥아 먹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헛구역질이 났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선 그 어떤 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씁쓸한 확신이 들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 그나마 온전한 벽 하나를 등지고 만든 임시 거처는 좁고 어두웠다. 밖에서는 새벽녘을 알리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낮이 되면 잠시 잦아들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이 도시를 잠식하는 섬뜩한 교향곡. 이젠 그 소리마저도 배경음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지훈은 낡은 배낭을 챙겼다. 안에 든 건 거의 없었다. 녹슨 단검 한 자루, 물통, 그리고 지난 던전에서 겨우 찾아낸 금속 파편 몇 개가 전부였다. 그 외엔 이 허물어져가는 세상에서 그를 지켜줄 어떤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몸뚱이조차도.

    어깨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쓰라렸다. 지난번 ‘균열’ 근처에서 도망치다 생긴 상처였다. 운이 좋았다. 더러운 짐승 한 마리에게 물렸을 뿐이었으니. 좀 더 운이 나빴다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으려는 더 거대한 것들의 먹이가 됐을 터였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오늘은 기필코 뭔가를 찾아야 했다. 먹을 것이든, 아니면 팔아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

    폐허 밖으로 나섰다. 새벽의 도시는 잿빛이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거리엔 온갖 잔해들이 파도처럼 쌓여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위험이었다. 붕괴된 건물 잔해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르는 돌연변이 쥐 떼부터, 어두운 골목길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생존자들까지. 특히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비심 없이 서로의 것을 빼앗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죽이고,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평화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상일 뿐이었다.

    목표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균열’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던전’이라고 불렀다. 정확히는 ‘폐기된 제3하수처리장 균열’. 이름만 들어도 역한 기운이 풍기는 곳이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위험하게,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장소였다.

    고층 빌딩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태양은 구름 뒤에 숨어 그 존재를 희미하게 알릴 뿐이었다. 지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던전에 도착해야 했다.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위험 요소도 줄어들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존자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높아지는 딜레마였다.

    무너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쳤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놀이터는 흙먼지에 뒤덮여 폐허가 되었다. 녹슨 그네와 미끄럼틀은 기괴한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 떼의 그림자가 음울했다.

    지훈은 발밑에 채이는 돌멩이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었다. 그의 눈은 오직 던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올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드디어 멀리서 그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싱크홀처럼 땅이 꺼져 들어간 곳. 마치 거인이 한입 베어 문 자국 같았다. 그곳이 바로 ‘제3하수처리장 균열’이었다. 주변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고, 그 밑으로 거대한 어둠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 입에서는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단검의 날을 확인하고, 낡은 장갑을 고쳐 꼈다. 물통을 입에 대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젠장, 뭐라도 나와라.”

    낮게 읊조리며 거대한 균열의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어둠이 그의 발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습기와 함께 희미한 빛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던전의 첫 번째 관문, 거대한 철문이 녹슨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음산하게 울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어둠과, 그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미지의 위협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

    낡은 시계는 오래전에 멈췄다. 더 이상 초침도 분침도 의미 없는 세상이었다. 지훈은 익숙하게 손목을 짚었지만, 텅 빈 감촉에 헛웃음을 흘렸다. 시계줄이 끊어진 것도, 아니 시계가 고장 난 것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이제 시간은 그저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그리고 그의 몸이 느끼는 허기와 갈증으로만 가늠될 뿐이었다.

    축축한 흙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모포 사이로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칼날 같았다. 아랫배에서 울리는 통증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어젯밤 남은 깡통 하나를 다 비웠지만, 그건 며칠 전부터 이어지는 허기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깡통 안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혀로 핥아 먹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헛구역질이 났지만,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선 그 어떤 추한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씁쓸한 확신이 들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 그나마 온전한 벽 하나를 등지고 만든 임시 거처는 좁고 어두웠다. 밖에서는 새벽녘을 알리는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낮이 되면 잠시 잦아들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이 도시를 잠식하는 섬뜩한 교향곡. 이젠 그 소리마저도 배경음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지훈은 낡은 배낭을 챙겼다. 안에 든 건 거의 없었다. 녹슨 단검 한 자루, 물통, 그리고 지난 던전에서 겨우 찾아낸 금속 파편 몇 개가 전부였다. 그 외엔 이 허물어져가는 세상에서 그를 지켜줄 어떤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의 몸뚱이조차도.

    어깨를 가로지르는 흉터가 쓰라렸다. 지난번 ‘균열’ 근처에서 도망치다 생긴 상처였다. 운이 좋았다. 더러운 짐승 한 마리에게 물렸을 뿐이었으니. 좀 더 운이 나빴다면, 그의 살점을 뜯어 먹으려는 더 거대한 것들의 먹이가 됐을 터였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오늘은 기필코 뭔가를 찾아야 했다. 먹을 것이든, 아니면 팔아서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

    폐허 밖으로 나섰다. 새벽의 도시는 잿빛이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거리엔 온갖 잔해들이 파도처럼 쌓여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사방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위험이었다. 붕괴된 건물 잔해 아래 숨어 있을지 모르는 돌연변이 쥐 떼부터, 어두운 골목길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생존자들까지. 특히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은 자비심 없이 서로의 것을 빼앗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숨을 죽이고,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이 삭막한 세상에서 평화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환상일 뿐이었다.

    목표는 도시 외곽에 위치한 ‘균열’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던전’이라고 불렀다. 정확히는 ‘폐기된 제3하수처리장 균열’. 이름만 들어도 역한 기운이 풍기는 곳이었지만, 그곳이야말로 이 도시에서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위험하게,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장소였다.

    고층 빌딩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태양은 구름 뒤에 숨어 그 존재를 희미하게 알릴 뿐이었다. 지훈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던전에 도착해야 했다. 밤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위험 요소도 줄어들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존자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높아지는 딜레마였다.

    무너진 아파트 단지를 지나쳤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놀이터는 흙먼지에 뒤덮여 폐허가 되었다. 녹슨 그네와 미끄럼틀은 기괴한 조형물처럼 서 있었다. 그 위로 날아가는 까마귀 떼의 그림자가 음울했다.

    지훈은 발밑에 채이는 돌멩이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었다. 그의 눈은 오직 던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가올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드디어 멀리서 그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싱크홀처럼 땅이 꺼져 들어간 곳. 마치 거인이 한입 베어 문 자국 같았다. 그곳이 바로 ‘제3하수처리장 균열’이었다. 주변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고, 그 밑으로 거대한 어둠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 입에서는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지훈은 마지막으로 단검의 날을 확인하고, 낡은 장갑을 고쳐 꼈다. 물통을 입에 대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생생했다.

    “젠장, 뭐라도 나와라.”

    낮게 읊조리며 거대한 균열의 입구로 발을 내딛었다. 어둠이 그의 발을 집어삼켰다. 차가운 습기와 함께 희미한 빛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던전의 첫 번째 관문, 거대한 철문이 녹슨 채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음산하게 울렸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어둠과, 그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을 미지의 위협들뿐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살아남아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무림 대회, ‘천무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넘어, 이름 없는 강호의 숨은 고수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고, 비룡봉 정상에 마련된 거대한 경기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고대에 봉인된 ‘어둠의 균열’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오직 천무제에서 우승한 자만이 그 균열을 영원히 닫을 ‘태초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전해졌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자’를 가리는 자리였다.

    관중석 제일 높은 곳, 특등석에 앉은 무림 맹주가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제27회 천무제, 개막을 선언한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오직 한 명에게 쏠려 있었다.

    강무진.

    내 이름은 한가람. ‘불꽃 검객’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었지만, 실상은 망해가는 검문파의 외동딸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그 망할 ‘어둠의 균열’을 막는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무진이 이 대회에 참가하다니!

    “저기요! 강무진 씨!”

    경기장 구석, 햇볕 좋은 자리에서 졸고 있던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대충 걸친 도포, 그리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 저 사람이 바로 ‘잠자는 용’ 강무진이라 불리는 자였다. 타고난 무재(武才)는 천하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 재능을 오직 낮잠과 먹는 데만 쓰는 한량 중의 한량이었다.

    “아, 한가람 씨였어요? 또 무슨 일로…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쉬고 싶다니요! 천하의 운명이 달린 대회인데,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때예요? 당장 몸 풀러 나가지 못해요!”

    내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참가자들이 모두 우리를 돌아봤다. 젠장, 또 시비 거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무진은 하품을 쩍 하더니, “음… 뭐, 아직 예선이라서요. 기운은 아껴야죠.”

    “기운을 아끼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아끼는 거겠죠! 당신 같은 사람이 우승하면, 무림인들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럼 한가람 씨가 우승하면 되겠네요. 제가 굳이 나설 필요 없잖아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젠장… 두고 봐요! 내가 이길 거예요! 그리고 그 우승컵, 당신 같은 한량한테 절대 안 넘길 거야!”

    나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매번 저 남자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작년에 우연히 들른 주막에서 만난 뒤로, 그는 내 인생의 최대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나를 놀리다 내 검을 빼앗아 순식간에 제압했었지. 그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

    대회는 이틀에 걸쳐 예선이 진행되었다. 나 한가람은 ‘불꽃 검객’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화려하고 강력한 검술로 연승을 거두었다. 나의 검은 불꽃처럼 춤추며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강무진은… 그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첫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공격을 눈 감고 피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상대방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심판은 ‘기발한 낙법을 이용한 공격’이라며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상대가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게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승리했다.

    “젠장, 저게 무슨 무술이야? 개그 아니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기는 방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말이다. 마치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농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32강전이 시작될 무렵, 무진과 나는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되었다. 으악,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니!

    그는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한가람 씨는 체력이 참 좋네요.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쓰러졌을 텐데.”

    “누구처럼 잠만 자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니죠.”

    “하하, 뭐. 어차피 이길 거라서요.”

    “흥! 누가 이긴다는 거예요?”

    “저요.”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오만한 자식!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맹세코,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거만하게 생긴 남자였다. 번쩍거리는 금실 장식이 달린 도포에, 콧수염을 잔뜩 기른, 사자후 문파의 차기 문주, ‘철권’ 배명호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이, 강무진. 이런 잡것들과 어울리고 있었나? 무림의 수치로군.”

    나는 잡것? 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배명호 씨! 말 다 했어요?”

    “이런, 검술이나 배우다 만 애송이는 좀 빠져 있어라.” 배명호는 무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강무진, 네놈이 아무리 잠자는 용이라 불릴지언정, 이번 천무제 우승은 내 것이다. 천하의 수호자? 그런 중요한 역할은 나, 배명호만이 어울리지. 감히 네놈 같은 한량에게 맡길 수 없어.”

    무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배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라, 얼굴에 뭔가 묻었네요.”

    “뭐, 뭣이?” 배명호는 당황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아, 거만함이요.” 무진이 싱긋 웃었다.

    배명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놈이! 감히 나를 놀려? 두고 보자, 언젠가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는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무진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강무진 씨,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저 거만한 자식!”

    “뭐,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거겠죠.” 무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게 오히려 편하달까.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것보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무진은 겉으로는 게으르지만, 내면은 꽤나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

    대회는 8강, 4강으로 치달았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나와 무진, 그리고 배명호는 모두 4강에 진출했다. 문제는 대진표였다. 나는 배명호와 겨루게 되었고, 무진은 다른 강력한 문파의 고수와 맞붙게 되었다.

    배명호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그의 ‘철권 무공’은 바위를 부술 듯 강력했고, 나는 ‘불꽃 검술’로 그의 파괴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경기장은 그의 우렁찬 기합과 나의 날카로운 검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흐읍! 하아!”

    나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불꽃 베기!”

    내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배명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비웃듯 팔뚝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내 검술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검 끝이 그의 도포 소매를 스치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크윽!”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나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경기장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아니, 저것 봐! 하늘이…!”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 상공에 닿았다. 먹구름이 휘몰아치며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시공의 균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검고 푸른 빛이 뒤섞인 균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림 맹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어둠의 균열이 벌써…!”

    경기가 중단되고, 모든 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왔다. 배명호도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아직 천무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무진이 성큼성큼 균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졸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용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처럼 거대했다.

    “강무진 씨!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다.

    “아니요, 저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어둠의 균열에서 음산한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형체의 그림자 괴물들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림 고수들은 일제히 그 괴물들을 향해 무공을 펼쳤다.

    무진은 균열 바로 아래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만물을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하고도 강대한 기운이었다.

    “태초의 기운…!” 무림 맹주가 경악했다. “어떻게… 아직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무진이 그 기운을 다루고 있단 말인가!”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게으르고 어설픈 모습은 모두 연기였던가? 아니,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평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기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무진의 푸른 기운이 균열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들이 그 기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하지만 균열은 너무 커져 있었다. 그의 기운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균열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었다.

    “젠장, 혼자서는 안 돼!”

    나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무진이 천하 제일의 고수일지 몰라도, 이 거대한 균열을 막는 건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강무진 씨!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내 모든 내공을 검에 불어넣었다. 내 몸에서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배명호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한가람! 너 지금…!”

    “이 천하의 운명, 당신 혼자 짊어지게 둘 순 없어요!”

    내 붉은 검기가 푸른 기운을 향해 뻗어나갔다. 무진은 놀란 듯 나를 돌아봤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한가람 씨.”

    내 붉은 불꽃과 무진의 푸른 기운이 합쳐지자, 그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이며 보랏빛 오라를 뿜어냈다. 그 오라가 균열을 감싸 안자, 균열의 확장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괴물들의 생성도 멎었다.

    배명호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자신의 ‘철권’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흥! 천하의 운명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까 보냐! 받으시오, 내 모든 기운!”

    그의 몸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보랏빛 오라에 합류했다. 다른 문파의 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장풍, 검기, 권기, 온갖 무공의 기운이 무진과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균열을 향해 쏘아졌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빛이 하늘을 뒤덮었고, 균열은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먹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동시에 휘청였다. 온몸의 내공을 다 쏟아부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진은 나를 붙잡아주려 했지만, 그 역시 비틀거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덕분에 살았네요.” 무진이 내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그의 체향이 느껴져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 누가 누구 덕분에 살았다고…!”

    “아, 그럼 제가 혼자서 다 막았다고 할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뭐래요! 으이그!”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 맹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강무진! 한가람! 그리고 모든 무림인들이여! 진정으로 천하를 구했노라!”

    나는 무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다. 게으른 한량인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때, 무진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가람 씨.”

    “네, 넷?”

    “저 배고파요.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 어때요?”

    나는 그의 엉뚱한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구하고 나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순대국밥이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좋아요. 하지만 밥값은 강무진 씨가 내는 거예요! 내가 천하를 구하는 데 일조했으니까!”

    “음… 그래요. 그럼 제가 소주값을 낼게요.”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할 거대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춘 남녀처럼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무림의 운명을 건 대결은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처럼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무진과의 만남 자체가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좀 일으켜 주세요, 강무진 씨. 다리가 풀려서 못 걷겠어요.”

    “네네, 공주님. 업어드릴까요?”

    “누, 누가 공주님이에요! 얼른 일으켜요!”

    그의 놀림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에는 왠지 싫지 않았다. 햇살이 비추는 비룡봉 정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림의 새로운 역사는, 순대국밥과 소주 한 잔을 향한 길에서 시작될 참이었다.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무림 대회, ‘천무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넘어, 이름 없는 강호의 숨은 고수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고, 비룡봉 정상에 마련된 거대한 경기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고대에 봉인된 ‘어둠의 균열’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오직 천무제에서 우승한 자만이 그 균열을 영원히 닫을 ‘태초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전해졌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자’를 가리는 자리였다.

    관중석 제일 높은 곳, 특등석에 앉은 무림 맹주가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제27회 천무제, 개막을 선언한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오직 한 명에게 쏠려 있었다.

    강무진.

    내 이름은 한가람. ‘불꽃 검객’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었지만, 실상은 망해가는 검문파의 외동딸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그 망할 ‘어둠의 균열’을 막는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무진이 이 대회에 참가하다니!

    “저기요! 강무진 씨!”

    경기장 구석, 햇볕 좋은 자리에서 졸고 있던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대충 걸친 도포, 그리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 저 사람이 바로 ‘잠자는 용’ 강무진이라 불리는 자였다. 타고난 무재(武才)는 천하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 재능을 오직 낮잠과 먹는 데만 쓰는 한량 중의 한량이었다.

    “아, 한가람 씨였어요? 또 무슨 일로…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쉬고 싶다니요! 천하의 운명이 달린 대회인데,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때예요? 당장 몸 풀러 나가지 못해요!”

    내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참가자들이 모두 우리를 돌아봤다. 젠장, 또 시비 거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무진은 하품을 쩍 하더니, “음… 뭐, 아직 예선이라서요. 기운은 아껴야죠.”

    “기운을 아끼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아끼는 거겠죠! 당신 같은 사람이 우승하면, 무림인들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럼 한가람 씨가 우승하면 되겠네요. 제가 굳이 나설 필요 없잖아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젠장… 두고 봐요! 내가 이길 거예요! 그리고 그 우승컵, 당신 같은 한량한테 절대 안 넘길 거야!”

    나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매번 저 남자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작년에 우연히 들른 주막에서 만난 뒤로, 그는 내 인생의 최대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나를 놀리다 내 검을 빼앗아 순식간에 제압했었지. 그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

    대회는 이틀에 걸쳐 예선이 진행되었다. 나 한가람은 ‘불꽃 검객’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화려하고 강력한 검술로 연승을 거두었다. 나의 검은 불꽃처럼 춤추며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강무진은… 그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첫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공격을 눈 감고 피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상대방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심판은 ‘기발한 낙법을 이용한 공격’이라며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상대가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게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승리했다.

    “젠장, 저게 무슨 무술이야? 개그 아니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기는 방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말이다. 마치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농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32강전이 시작될 무렵, 무진과 나는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되었다. 으악,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니!

    그는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한가람 씨는 체력이 참 좋네요.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쓰러졌을 텐데.”

    “누구처럼 잠만 자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니죠.”

    “하하, 뭐. 어차피 이길 거라서요.”

    “흥! 누가 이긴다는 거예요?”

    “저요.”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오만한 자식!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맹세코,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거만하게 생긴 남자였다. 번쩍거리는 금실 장식이 달린 도포에, 콧수염을 잔뜩 기른, 사자후 문파의 차기 문주, ‘철권’ 배명호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이, 강무진. 이런 잡것들과 어울리고 있었나? 무림의 수치로군.”

    나는 잡것? 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배명호 씨! 말 다 했어요?”

    “이런, 검술이나 배우다 만 애송이는 좀 빠져 있어라.” 배명호는 무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강무진, 네놈이 아무리 잠자는 용이라 불릴지언정, 이번 천무제 우승은 내 것이다. 천하의 수호자? 그런 중요한 역할은 나, 배명호만이 어울리지. 감히 네놈 같은 한량에게 맡길 수 없어.”

    무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배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라, 얼굴에 뭔가 묻었네요.”

    “뭐, 뭣이?” 배명호는 당황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아, 거만함이요.” 무진이 싱긋 웃었다.

    배명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놈이! 감히 나를 놀려? 두고 보자, 언젠가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는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무진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강무진 씨,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저 거만한 자식!”

    “뭐,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거겠죠.” 무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게 오히려 편하달까.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것보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무진은 겉으로는 게으르지만, 내면은 꽤나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

    대회는 8강, 4강으로 치달았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나와 무진, 그리고 배명호는 모두 4강에 진출했다. 문제는 대진표였다. 나는 배명호와 겨루게 되었고, 무진은 다른 강력한 문파의 고수와 맞붙게 되었다.

    배명호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그의 ‘철권 무공’은 바위를 부술 듯 강력했고, 나는 ‘불꽃 검술’로 그의 파괴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경기장은 그의 우렁찬 기합과 나의 날카로운 검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흐읍! 하아!”

    나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불꽃 베기!”

    내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배명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비웃듯 팔뚝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내 검술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검 끝이 그의 도포 소매를 스치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크윽!”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나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경기장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아니, 저것 봐! 하늘이…!”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 상공에 닿았다. 먹구름이 휘몰아치며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시공의 균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검고 푸른 빛이 뒤섞인 균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림 맹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어둠의 균열이 벌써…!”

    경기가 중단되고, 모든 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왔다. 배명호도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아직 천무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무진이 성큼성큼 균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졸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용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처럼 거대했다.

    “강무진 씨!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다.

    “아니요, 저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어둠의 균열에서 음산한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형체의 그림자 괴물들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림 고수들은 일제히 그 괴물들을 향해 무공을 펼쳤다.

    무진은 균열 바로 아래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만물을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하고도 강대한 기운이었다.

    “태초의 기운…!” 무림 맹주가 경악했다. “어떻게… 아직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무진이 그 기운을 다루고 있단 말인가!”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게으르고 어설픈 모습은 모두 연기였던가? 아니,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평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기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무진의 푸른 기운이 균열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들이 그 기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하지만 균열은 너무 커져 있었다. 그의 기운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균열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었다.

    “젠장, 혼자서는 안 돼!”

    나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무진이 천하 제일의 고수일지 몰라도, 이 거대한 균열을 막는 건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강무진 씨!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내 모든 내공을 검에 불어넣었다. 내 몸에서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배명호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한가람! 너 지금…!”

    “이 천하의 운명, 당신 혼자 짊어지게 둘 순 없어요!”

    내 붉은 검기가 푸른 기운을 향해 뻗어나갔다. 무진은 놀란 듯 나를 돌아봤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한가람 씨.”

    내 붉은 불꽃과 무진의 푸른 기운이 합쳐지자, 그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이며 보랏빛 오라를 뿜어냈다. 그 오라가 균열을 감싸 안자, 균열의 확장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괴물들의 생성도 멎었다.

    배명호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자신의 ‘철권’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흥! 천하의 운명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까 보냐! 받으시오, 내 모든 기운!”

    그의 몸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보랏빛 오라에 합류했다. 다른 문파의 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장풍, 검기, 권기, 온갖 무공의 기운이 무진과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균열을 향해 쏘아졌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빛이 하늘을 뒤덮었고, 균열은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먹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동시에 휘청였다. 온몸의 내공을 다 쏟아부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진은 나를 붙잡아주려 했지만, 그 역시 비틀거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덕분에 살았네요.” 무진이 내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그의 체향이 느껴져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 누가 누구 덕분에 살았다고…!”

    “아, 그럼 제가 혼자서 다 막았다고 할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뭐래요! 으이그!”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 맹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강무진! 한가람! 그리고 모든 무림인들이여! 진정으로 천하를 구했노라!”

    나는 무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다. 게으른 한량인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때, 무진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가람 씨.”

    “네, 넷?”

    “저 배고파요.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 어때요?”

    나는 그의 엉뚱한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구하고 나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순대국밥이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좋아요. 하지만 밥값은 강무진 씨가 내는 거예요! 내가 천하를 구하는 데 일조했으니까!”

    “음… 그래요. 그럼 제가 소주값을 낼게요.”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할 거대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춘 남녀처럼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무림의 운명을 건 대결은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처럼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무진과의 만남 자체가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좀 일으켜 주세요, 강무진 씨. 다리가 풀려서 못 걷겠어요.”

    “네네, 공주님. 업어드릴까요?”

    “누, 누가 공주님이에요! 얼른 일으켜요!”

    그의 놀림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에는 왠지 싫지 않았다. 햇살이 비추는 비룡봉 정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림의 새로운 역사는, 순대국밥과 소주 한 잔을 향한 길에서 시작될 참이었다.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무림 대회, ‘천무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넘어, 이름 없는 강호의 숨은 고수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고, 비룡봉 정상에 마련된 거대한 경기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고대에 봉인된 ‘어둠의 균열’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오직 천무제에서 우승한 자만이 그 균열을 영원히 닫을 ‘태초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전해졌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자’를 가리는 자리였다.

    관중석 제일 높은 곳, 특등석에 앉은 무림 맹주가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제27회 천무제, 개막을 선언한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오직 한 명에게 쏠려 있었다.

    강무진.

    내 이름은 한가람. ‘불꽃 검객’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었지만, 실상은 망해가는 검문파의 외동딸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그 망할 ‘어둠의 균열’을 막는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무진이 이 대회에 참가하다니!

    “저기요! 강무진 씨!”

    경기장 구석, 햇볕 좋은 자리에서 졸고 있던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대충 걸친 도포, 그리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 저 사람이 바로 ‘잠자는 용’ 강무진이라 불리는 자였다. 타고난 무재(武才)는 천하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 재능을 오직 낮잠과 먹는 데만 쓰는 한량 중의 한량이었다.

    “아, 한가람 씨였어요? 또 무슨 일로…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쉬고 싶다니요! 천하의 운명이 달린 대회인데,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때예요? 당장 몸 풀러 나가지 못해요!”

    내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참가자들이 모두 우리를 돌아봤다. 젠장, 또 시비 거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무진은 하품을 쩍 하더니, “음… 뭐, 아직 예선이라서요. 기운은 아껴야죠.”

    “기운을 아끼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아끼는 거겠죠! 당신 같은 사람이 우승하면, 무림인들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럼 한가람 씨가 우승하면 되겠네요. 제가 굳이 나설 필요 없잖아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젠장… 두고 봐요! 내가 이길 거예요! 그리고 그 우승컵, 당신 같은 한량한테 절대 안 넘길 거야!”

    나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매번 저 남자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작년에 우연히 들른 주막에서 만난 뒤로, 그는 내 인생의 최대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나를 놀리다 내 검을 빼앗아 순식간에 제압했었지. 그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

    대회는 이틀에 걸쳐 예선이 진행되었다. 나 한가람은 ‘불꽃 검객’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화려하고 강력한 검술로 연승을 거두었다. 나의 검은 불꽃처럼 춤추며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강무진은… 그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첫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공격을 눈 감고 피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상대방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심판은 ‘기발한 낙법을 이용한 공격’이라며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상대가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게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승리했다.

    “젠장, 저게 무슨 무술이야? 개그 아니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기는 방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말이다. 마치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농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32강전이 시작될 무렵, 무진과 나는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되었다. 으악,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니!

    그는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한가람 씨는 체력이 참 좋네요.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쓰러졌을 텐데.”

    “누구처럼 잠만 자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니죠.”

    “하하, 뭐. 어차피 이길 거라서요.”

    “흥! 누가 이긴다는 거예요?”

    “저요.”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오만한 자식!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맹세코,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거만하게 생긴 남자였다. 번쩍거리는 금실 장식이 달린 도포에, 콧수염을 잔뜩 기른, 사자후 문파의 차기 문주, ‘철권’ 배명호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이, 강무진. 이런 잡것들과 어울리고 있었나? 무림의 수치로군.”

    나는 잡것? 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배명호 씨! 말 다 했어요?”

    “이런, 검술이나 배우다 만 애송이는 좀 빠져 있어라.” 배명호는 무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강무진, 네놈이 아무리 잠자는 용이라 불릴지언정, 이번 천무제 우승은 내 것이다. 천하의 수호자? 그런 중요한 역할은 나, 배명호만이 어울리지. 감히 네놈 같은 한량에게 맡길 수 없어.”

    무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배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라, 얼굴에 뭔가 묻었네요.”

    “뭐, 뭣이?” 배명호는 당황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아, 거만함이요.” 무진이 싱긋 웃었다.

    배명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놈이! 감히 나를 놀려? 두고 보자, 언젠가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는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무진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강무진 씨,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저 거만한 자식!”

    “뭐,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거겠죠.” 무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게 오히려 편하달까.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것보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무진은 겉으로는 게으르지만, 내면은 꽤나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

    대회는 8강, 4강으로 치달았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나와 무진, 그리고 배명호는 모두 4강에 진출했다. 문제는 대진표였다. 나는 배명호와 겨루게 되었고, 무진은 다른 강력한 문파의 고수와 맞붙게 되었다.

    배명호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그의 ‘철권 무공’은 바위를 부술 듯 강력했고, 나는 ‘불꽃 검술’로 그의 파괴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경기장은 그의 우렁찬 기합과 나의 날카로운 검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흐읍! 하아!”

    나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불꽃 베기!”

    내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배명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비웃듯 팔뚝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내 검술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검 끝이 그의 도포 소매를 스치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크윽!”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나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경기장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아니, 저것 봐! 하늘이…!”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 상공에 닿았다. 먹구름이 휘몰아치며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시공의 균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검고 푸른 빛이 뒤섞인 균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림 맹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어둠의 균열이 벌써…!”

    경기가 중단되고, 모든 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왔다. 배명호도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아직 천무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무진이 성큼성큼 균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졸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용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처럼 거대했다.

    “강무진 씨!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다.

    “아니요, 저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어둠의 균열에서 음산한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형체의 그림자 괴물들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림 고수들은 일제히 그 괴물들을 향해 무공을 펼쳤다.

    무진은 균열 바로 아래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만물을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하고도 강대한 기운이었다.

    “태초의 기운…!” 무림 맹주가 경악했다. “어떻게… 아직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무진이 그 기운을 다루고 있단 말인가!”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게으르고 어설픈 모습은 모두 연기였던가? 아니,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평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기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무진의 푸른 기운이 균열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들이 그 기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하지만 균열은 너무 커져 있었다. 그의 기운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균열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었다.

    “젠장, 혼자서는 안 돼!”

    나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무진이 천하 제일의 고수일지 몰라도, 이 거대한 균열을 막는 건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강무진 씨!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내 모든 내공을 검에 불어넣었다. 내 몸에서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배명호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한가람! 너 지금…!”

    “이 천하의 운명, 당신 혼자 짊어지게 둘 순 없어요!”

    내 붉은 검기가 푸른 기운을 향해 뻗어나갔다. 무진은 놀란 듯 나를 돌아봤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한가람 씨.”

    내 붉은 불꽃과 무진의 푸른 기운이 합쳐지자, 그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이며 보랏빛 오라를 뿜어냈다. 그 오라가 균열을 감싸 안자, 균열의 확장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괴물들의 생성도 멎었다.

    배명호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자신의 ‘철권’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흥! 천하의 운명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까 보냐! 받으시오, 내 모든 기운!”

    그의 몸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보랏빛 오라에 합류했다. 다른 문파의 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장풍, 검기, 권기, 온갖 무공의 기운이 무진과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균열을 향해 쏘아졌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빛이 하늘을 뒤덮었고, 균열은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먹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동시에 휘청였다. 온몸의 내공을 다 쏟아부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진은 나를 붙잡아주려 했지만, 그 역시 비틀거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덕분에 살았네요.” 무진이 내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그의 체향이 느껴져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 누가 누구 덕분에 살았다고…!”

    “아, 그럼 제가 혼자서 다 막았다고 할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뭐래요! 으이그!”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 맹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강무진! 한가람! 그리고 모든 무림인들이여! 진정으로 천하를 구했노라!”

    나는 무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다. 게으른 한량인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때, 무진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가람 씨.”

    “네, 넷?”

    “저 배고파요.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 어때요?”

    나는 그의 엉뚱한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구하고 나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순대국밥이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좋아요. 하지만 밥값은 강무진 씨가 내는 거예요! 내가 천하를 구하는 데 일조했으니까!”

    “음… 그래요. 그럼 제가 소주값을 낼게요.”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할 거대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춘 남녀처럼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무림의 운명을 건 대결은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처럼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무진과의 만남 자체가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좀 일으켜 주세요, 강무진 씨. 다리가 풀려서 못 걷겠어요.”

    “네네, 공주님. 업어드릴까요?”

    “누, 누가 공주님이에요! 얼른 일으켜요!”

    그의 놀림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에는 왠지 싫지 않았다. 햇살이 비추는 비룡봉 정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림의 새로운 역사는, 순대국밥과 소주 한 잔을 향한 길에서 시작될 참이었다.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무림 대회, ‘천무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넘어, 이름 없는 강호의 숨은 고수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고, 비룡봉 정상에 마련된 거대한 경기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고대에 봉인된 ‘어둠의 균열’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오직 천무제에서 우승한 자만이 그 균열을 영원히 닫을 ‘태초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전해졌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자’를 가리는 자리였다.

    관중석 제일 높은 곳, 특등석에 앉은 무림 맹주가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제27회 천무제, 개막을 선언한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오직 한 명에게 쏠려 있었다.

    강무진.

    내 이름은 한가람. ‘불꽃 검객’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었지만, 실상은 망해가는 검문파의 외동딸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그 망할 ‘어둠의 균열’을 막는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무진이 이 대회에 참가하다니!

    “저기요! 강무진 씨!”

    경기장 구석, 햇볕 좋은 자리에서 졸고 있던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대충 걸친 도포, 그리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 저 사람이 바로 ‘잠자는 용’ 강무진이라 불리는 자였다. 타고난 무재(武才)는 천하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 재능을 오직 낮잠과 먹는 데만 쓰는 한량 중의 한량이었다.

    “아, 한가람 씨였어요? 또 무슨 일로…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쉬고 싶다니요! 천하의 운명이 달린 대회인데,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때예요? 당장 몸 풀러 나가지 못해요!”

    내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참가자들이 모두 우리를 돌아봤다. 젠장, 또 시비 거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무진은 하품을 쩍 하더니, “음… 뭐, 아직 예선이라서요. 기운은 아껴야죠.”

    “기운을 아끼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아끼는 거겠죠! 당신 같은 사람이 우승하면, 무림인들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럼 한가람 씨가 우승하면 되겠네요. 제가 굳이 나설 필요 없잖아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젠장… 두고 봐요! 내가 이길 거예요! 그리고 그 우승컵, 당신 같은 한량한테 절대 안 넘길 거야!”

    나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매번 저 남자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작년에 우연히 들른 주막에서 만난 뒤로, 그는 내 인생의 최대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나를 놀리다 내 검을 빼앗아 순식간에 제압했었지. 그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

    대회는 이틀에 걸쳐 예선이 진행되었다. 나 한가람은 ‘불꽃 검객’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화려하고 강력한 검술로 연승을 거두었다. 나의 검은 불꽃처럼 춤추며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강무진은… 그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첫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공격을 눈 감고 피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상대방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심판은 ‘기발한 낙법을 이용한 공격’이라며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상대가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게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승리했다.

    “젠장, 저게 무슨 무술이야? 개그 아니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기는 방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말이다. 마치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농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32강전이 시작될 무렵, 무진과 나는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되었다. 으악,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니!

    그는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한가람 씨는 체력이 참 좋네요.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쓰러졌을 텐데.”

    “누구처럼 잠만 자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니죠.”

    “하하, 뭐. 어차피 이길 거라서요.”

    “흥! 누가 이긴다는 거예요?”

    “저요.”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오만한 자식!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맹세코,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거만하게 생긴 남자였다. 번쩍거리는 금실 장식이 달린 도포에, 콧수염을 잔뜩 기른, 사자후 문파의 차기 문주, ‘철권’ 배명호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이, 강무진. 이런 잡것들과 어울리고 있었나? 무림의 수치로군.”

    나는 잡것? 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배명호 씨! 말 다 했어요?”

    “이런, 검술이나 배우다 만 애송이는 좀 빠져 있어라.” 배명호는 무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강무진, 네놈이 아무리 잠자는 용이라 불릴지언정, 이번 천무제 우승은 내 것이다. 천하의 수호자? 그런 중요한 역할은 나, 배명호만이 어울리지. 감히 네놈 같은 한량에게 맡길 수 없어.”

    무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배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라, 얼굴에 뭔가 묻었네요.”

    “뭐, 뭣이?” 배명호는 당황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아, 거만함이요.” 무진이 싱긋 웃었다.

    배명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놈이! 감히 나를 놀려? 두고 보자, 언젠가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는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무진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강무진 씨,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저 거만한 자식!”

    “뭐,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거겠죠.” 무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게 오히려 편하달까.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것보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무진은 겉으로는 게으르지만, 내면은 꽤나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

    대회는 8강, 4강으로 치달았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나와 무진, 그리고 배명호는 모두 4강에 진출했다. 문제는 대진표였다. 나는 배명호와 겨루게 되었고, 무진은 다른 강력한 문파의 고수와 맞붙게 되었다.

    배명호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그의 ‘철권 무공’은 바위를 부술 듯 강력했고, 나는 ‘불꽃 검술’로 그의 파괴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경기장은 그의 우렁찬 기합과 나의 날카로운 검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흐읍! 하아!”

    나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불꽃 베기!”

    내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배명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비웃듯 팔뚝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내 검술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검 끝이 그의 도포 소매를 스치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크윽!”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나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경기장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아니, 저것 봐! 하늘이…!”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 상공에 닿았다. 먹구름이 휘몰아치며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시공의 균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검고 푸른 빛이 뒤섞인 균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림 맹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어둠의 균열이 벌써…!”

    경기가 중단되고, 모든 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왔다. 배명호도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아직 천무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무진이 성큼성큼 균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졸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용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처럼 거대했다.

    “강무진 씨!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다.

    “아니요, 저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어둠의 균열에서 음산한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형체의 그림자 괴물들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림 고수들은 일제히 그 괴물들을 향해 무공을 펼쳤다.

    무진은 균열 바로 아래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만물을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하고도 강대한 기운이었다.

    “태초의 기운…!” 무림 맹주가 경악했다. “어떻게… 아직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무진이 그 기운을 다루고 있단 말인가!”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게으르고 어설픈 모습은 모두 연기였던가? 아니,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평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기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무진의 푸른 기운이 균열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들이 그 기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하지만 균열은 너무 커져 있었다. 그의 기운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균열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었다.

    “젠장, 혼자서는 안 돼!”

    나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무진이 천하 제일의 고수일지 몰라도, 이 거대한 균열을 막는 건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강무진 씨!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내 모든 내공을 검에 불어넣었다. 내 몸에서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배명호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한가람! 너 지금…!”

    “이 천하의 운명, 당신 혼자 짊어지게 둘 순 없어요!”

    내 붉은 검기가 푸른 기운을 향해 뻗어나갔다. 무진은 놀란 듯 나를 돌아봤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한가람 씨.”

    내 붉은 불꽃과 무진의 푸른 기운이 합쳐지자, 그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이며 보랏빛 오라를 뿜어냈다. 그 오라가 균열을 감싸 안자, 균열의 확장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괴물들의 생성도 멎었다.

    배명호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자신의 ‘철권’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흥! 천하의 운명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까 보냐! 받으시오, 내 모든 기운!”

    그의 몸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보랏빛 오라에 합류했다. 다른 문파의 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장풍, 검기, 권기, 온갖 무공의 기운이 무진과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균열을 향해 쏘아졌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빛이 하늘을 뒤덮었고, 균열은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먹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동시에 휘청였다. 온몸의 내공을 다 쏟아부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진은 나를 붙잡아주려 했지만, 그 역시 비틀거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덕분에 살았네요.” 무진이 내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그의 체향이 느껴져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 누가 누구 덕분에 살았다고…!”

    “아, 그럼 제가 혼자서 다 막았다고 할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뭐래요! 으이그!”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 맹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강무진! 한가람! 그리고 모든 무림인들이여! 진정으로 천하를 구했노라!”

    나는 무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다. 게으른 한량인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때, 무진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가람 씨.”

    “네, 넷?”

    “저 배고파요.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 어때요?”

    나는 그의 엉뚱한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구하고 나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순대국밥이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좋아요. 하지만 밥값은 강무진 씨가 내는 거예요! 내가 천하를 구하는 데 일조했으니까!”

    “음… 그래요. 그럼 제가 소주값을 낼게요.”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할 거대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춘 남녀처럼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무림의 운명을 건 대결은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처럼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무진과의 만남 자체가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좀 일으켜 주세요, 강무진 씨. 다리가 풀려서 못 걷겠어요.”

    “네네, 공주님. 업어드릴까요?”

    “누, 누가 공주님이에요! 얼른 일으켜요!”

    그의 놀림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에는 왠지 싫지 않았다. 햇살이 비추는 비룡봉 정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림의 새로운 역사는, 순대국밥과 소주 한 잔을 향한 길에서 시작될 참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에피소드 1. 잿빛 도시의 숨결**

    **장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장면 1: 회색빛 폐허]**

    **[패널 1]**
    바싹 마른 흙먼지가 부유하는 회색빛 도시.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철골들이 뼈대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 아래, 거대한 시체처럼 널려 있는 건물 잔해들 사이로 억센 잡초들이 끈질기게 비집고 솟아나, 역설적인 생명의 기운을 뿜어낸다. 화면 중앙에는 낡고 닳은 배낭을 메고,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한 청년, 진우(20대 초반)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그의 손에는 끝이 뾰족하게 가공된 쇠 파이프가 단단히 쥐여 있다.

    **(내레이션)**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그리고 내 희망마저도.

    **[패널 2]**
    진우의 클로즈업. 텅 빈 눈동자 속에는 짙은 피로와 희미한 갈증이 비친다.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다. 입김이 거칠게 터져 나온다.

    **진우**
    (작게 중얼거린다)
    물… 물 한 모금만… 제발…

    **[패널 3]**
    진우의 시선이 향하는 곳. 멀리 떨어진 곳에 반쯤 무너진 거대한 건물이 보인다. 간판은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져 있지만, 거대한 외형만은 겨우 백화점의 흔적을 드러낸다. 건물 옆으로는 오래된 버스 잔해가 뒤집힌 채 녹슨 껍데기만 남아 썩어가고 있다.

    **(내레이션)**
    살아남으려면, 찾아야 했다.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찾을 단서라도.

    **[패널 4]**
    진우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발밑의 콘크리트 조각과 유리 파편들이 ‘바스락, 사그락’ 소리를 낸다. 주변을 경계하듯 좌우를 살피는 진우의 눈빛이 매섭다. 그의 그림자가 폐허 위로 길게 늘어진다.

    **(SFX)**
    바스락… 사그락…

    **진우**
    (독백)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것도 못 건졌어. 이러다간… 정말 끝장이야.

    **[장면 2: 고요한 침묵 속으로]**

    **[패널 5]**
    백화점 건물 입구. 자동문은 부서져 떨어져 나간 지 오래고, 뻥 뚫린 입구 안은 어두컴컴한 심연과 같다. 입구 양옆으로 깨지고 부서진 쇼윈도에는 마네킹의 잘린 팔다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패널 6]**
    진우가 쇠 파이프를 고쳐 잡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길게 늘어진다. 텅 빈 건물 내부에는 그의 발소리가 ‘쿵… 쿵…’하고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SFX)**
    쿵… 쿵…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진다)

    **진우**
    (낮은 목소리로)
    아무도 없나…

    **[패널 7]**
    진우의 시선이 천장을 향한다. 군데군데 뚫린 구멍 사이로 한낮의 햇살이 가늘게 새어 들어와 먼지 기둥을 만든다. 그 빛줄기 아래, 한때 번화했을 매장의 잔해들이 드러난다.

    **[패널 8]**
    진우가 텅 빈 매장 내부를 지나간다. 화장품 코너였을 법한 곳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과 엎질러진 내용물이 말라붙어 있고, 의류 코너에는 찢기고 곰팡이 핀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이 모든 것 위로 두꺼운 먼지가 쌓여, 과거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오직 허무함만이 가득하다.

    **(내레이션)**
    시간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이곳은, 망각된 과거의 박물관 같았다. 먼지 속에 갇힌 유령 도시.

    **[패널 9]**
    진우가 멈춰 선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안내판. ‘식품관 3층’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진우의 눈이 번뜩인다.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이 스치는 순간이다.

    **진우**
    식품관… 그래, 아직 안 가본 곳이야. 희망은 저기에 있을지도 몰라.

    **[패널 10]**
    진우가 낡고 위태로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 칸 한 칸 밟을 때마다 ‘삐걱, 삐걱’거리는 소리가 불안하게 울려 퍼진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구조물이다.

    **(SFX)**
    삐걱… 삐걱… (계단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소리)

    **[장면 3: 희미한 희망의 빛]**

    **[패널 11]**
    3층 식품관. 예상과는 달리, 이곳은 다른 층보다 훨씬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상품 진열대는 쓰러져 내용물이 바닥에 뒹군다.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다. 진우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친다.

    **진우**
    젠장… 여기까지 와서… 이것마저…

    **[패널 12]**
    진우가 포기하지 않고 잔해 사이를 샅샅이 뒤진다. 빈 통조림 캔, 썩은 과일 조각들, 형체를 알 수 없는 말라붙은 음식물들만이 눈에 띈다.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내레이션)**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니까. 지아를 찾아야만 하니까.

    **[패널 13]**
    그때, 진우의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 고개를 숙이자, 쓰러진 진열대 틈새로 보이는 작은 상자 하나. 먼지가 잔뜩 쌓여있지만, 깨지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진우의 심장이 작게 요동친다.

    **진우**
    이건…?

    **[패널 14]**
    진우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먼지 쌓인 통조림 몇 개와 작은 생수병 두 개가 들어있다. 포장지는 조금 낡았지만, 찌그러지거나 훼손된 흔적은 없다. 기적 같은 발견이다.

    **진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런… 이런 곳에… 정말 기적이야…

    **[패널 15]**
    진우가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연다. ‘쉬익’하는 소리와 함께 봉인되어 있던 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진우는 망설임 없이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물줄기가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다.

    **(SFX)**
    쉬익… 꿀꺽… 꿀꺽… 꿀꺽…

    **진우**
    (눈을 감고,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하다)
    하아… 살 것 같다… 진짜로…

    **[패널 16]**
    물을 마신 후, 진우의 얼굴에 간만에 평온한 표정이 스친다. 그는 통조림 하나를 따서 먹기 시작한다. 짠맛과 단맛이 뒤섞인 익숙한 맛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내레이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간적인 맛이었다. 혀끝을 스치는 작은 행복이, 잠시나마 이 끔찍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이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장면 4: 낯선 시선]**

    **[패널 17]**
    진우가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툭’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작은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진우는 즉시 식사를 멈추고 쇠 파이프를 고쳐 잡는다. 그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변한다. 모든 근육이 긴장한다.

    **(SFX)**
    툭…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소리)

    **진우**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패널 18]**
    진우의 시선이 향하는 곳. 무너진 벽의 균열 너머로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적이 흐른다.

    **[패널 19]**
    진우가 숨을 죽인 채 집중한다. ‘끼이익…’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바닥을 긁는 소리 같기도 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SFX)**
    끼이익… (아주 희미하게, 반복적으로)

    **[패널 20]**
    진우의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그 소리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그의 눈이 어둠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매섭게 빛난다. 식은땀이 흐른다.

    **(내레이션)**
    이 세상에 혼자라는 건… 위안인 동시에, 가장 큰 공포였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널 21]**
    진우가 쇠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때, 어둠 속에서 아주 잠깐, 희미한 붉은색 섬광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짐승의 눈빛처럼, 섬뜩하게 빛났다가 사라진다.

    **진우**
    (크게 외친다)
    나와! 거기 누구냐! 숨지 마!

    **[패널 22]**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다. 다시 고요한 침묵만이 감돈다. 진우는 잔뜩 경계한 채 주변을 둘러본다. 아까의 소리와 섬광은 정말 착각이었을까? 아니, 착각일 리 없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린다.

    **[패널 23]**
    진우가 겨우 찾은 통조림과 물을 재빨리 배낭에 챙겨 넣는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다. 생존 본능이 그에게 속삭인다. ‘도망쳐.’

    **(내레이션)**
    잠깐의 평화는, 더 큰 위협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이 잿빛 세상에서, 나는 언제까지 이 숨 막히는 숨바꼭질을 계속해야 할까. 지아… 넌 어디에 있는 거니. 살아있는 거니…

    **[패널 24]**
    진우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식품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뒤로, 방금 그 붉은 섬광이 스쳤던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뭔가가 스윽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인다. 그것은 진우가 미처 보지 못했던, 움직이는 형체였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작은 눈동자가 진우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내레이션)**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사냥하거나 사냥당하는 존재일 뿐. 오늘도… 나는 사냥감인가.

    **[END]**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에피소드 1. 잿빛 도시의 숨결**

    **장르: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장면 1: 회색빛 폐허]**

    **[패널 1]**
    바싹 마른 흙먼지가 부유하는 회색빛 도시.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철골들이 뼈대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 아래, 거대한 시체처럼 널려 있는 건물 잔해들 사이로 억센 잡초들이 끈질기게 비집고 솟아나, 역설적인 생명의 기운을 뿜어낸다. 화면 중앙에는 낡고 닳은 배낭을 메고,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한 청년, 진우(20대 초반)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그의 손에는 끝이 뾰족하게 가공된 쇠 파이프가 단단히 쥐여 있다.

    **(내레이션)**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그리고 내 희망마저도.

    **[패널 2]**
    진우의 클로즈업. 텅 빈 눈동자 속에는 짙은 피로와 희미한 갈증이 비친다. 입술은 바싹 말라 갈라져 있다. 입김이 거칠게 터져 나온다.

    **진우**
    (작게 중얼거린다)
    물… 물 한 모금만… 제발…

    **[패널 3]**
    진우의 시선이 향하는 곳. 멀리 떨어진 곳에 반쯤 무너진 거대한 건물이 보인다. 간판은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져 있지만, 거대한 외형만은 겨우 백화점의 흔적을 드러낸다. 건물 옆으로는 오래된 버스 잔해가 뒤집힌 채 녹슨 껍데기만 남아 썩어가고 있다.

    **(내레이션)**
    살아남으려면, 찾아야 했다.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찾을 단서라도.

    **[패널 4]**
    진우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발밑의 콘크리트 조각과 유리 파편들이 ‘바스락, 사그락’ 소리를 낸다. 주변을 경계하듯 좌우를 살피는 진우의 눈빛이 매섭다. 그의 그림자가 폐허 위로 길게 늘어진다.

    **(SFX)**
    바스락… 사그락…

    **진우**
    (독백)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것도 못 건졌어. 이러다간… 정말 끝장이야.

    **[장면 2: 고요한 침묵 속으로]**

    **[패널 5]**
    백화점 건물 입구. 자동문은 부서져 떨어져 나간 지 오래고, 뻥 뚫린 입구 안은 어두컴컴한 심연과 같다. 입구 양옆으로 깨지고 부서진 쇼윈도에는 마네킹의 잘린 팔다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패널 6]**
    진우가 쇠 파이프를 고쳐 잡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길게 늘어진다. 텅 빈 건물 내부에는 그의 발소리가 ‘쿵… 쿵…’하고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SFX)**
    쿵… 쿵…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진다)

    **진우**
    (낮은 목소리로)
    아무도 없나…

    **[패널 7]**
    진우의 시선이 천장을 향한다. 군데군데 뚫린 구멍 사이로 한낮의 햇살이 가늘게 새어 들어와 먼지 기둥을 만든다. 그 빛줄기 아래, 한때 번화했을 매장의 잔해들이 드러난다.

    **[패널 8]**
    진우가 텅 빈 매장 내부를 지나간다. 화장품 코너였을 법한 곳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과 엎질러진 내용물이 말라붙어 있고, 의류 코너에는 찢기고 곰팡이 핀 옷가지들이 널려 있다. 이 모든 것 위로 두꺼운 먼지가 쌓여, 과거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오직 허무함만이 가득하다.

    **(내레이션)**
    시간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이곳은, 망각된 과거의 박물관 같았다. 먼지 속에 갇힌 유령 도시.

    **[패널 9]**
    진우가 멈춰 선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안내판. ‘식품관 3층’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진우의 눈이 번뜩인다.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이 스치는 순간이다.

    **진우**
    식품관… 그래, 아직 안 가본 곳이야. 희망은 저기에 있을지도 몰라.

    **[패널 10]**
    진우가 낡고 위태로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 칸 한 칸 밟을 때마다 ‘삐걱, 삐걱’거리는 소리가 불안하게 울려 퍼진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구조물이다.

    **(SFX)**
    삐걱… 삐걱… (계단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소리)

    **[장면 3: 희미한 희망의 빛]**

    **[패널 11]**
    3층 식품관. 예상과는 달리, 이곳은 다른 층보다 훨씬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상품 진열대는 쓰러져 내용물이 바닥에 뒹군다.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이다. 진우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친다.

    **진우**
    젠장… 여기까지 와서… 이것마저…

    **[패널 12]**
    진우가 포기하지 않고 잔해 사이를 샅샅이 뒤진다. 빈 통조림 캔, 썩은 과일 조각들, 형체를 알 수 없는 말라붙은 음식물들만이 눈에 띈다.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내레이션)**
    희망은 언제나 절망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니까. 지아를 찾아야만 하니까.

    **[패널 13]**
    그때, 진우의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 고개를 숙이자, 쓰러진 진열대 틈새로 보이는 작은 상자 하나. 먼지가 잔뜩 쌓여있지만, 깨지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진우의 심장이 작게 요동친다.

    **진우**
    이건…?

    **[패널 14]**
    진우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낸다. 상자 안에는 놀랍게도 먼지 쌓인 통조림 몇 개와 작은 생수병 두 개가 들어있다. 포장지는 조금 낡았지만, 찌그러지거나 훼손된 흔적은 없다. 기적 같은 발견이다.

    **진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런… 이런 곳에… 정말 기적이야…

    **[패널 15]**
    진우가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연다. ‘쉬익’하는 소리와 함께 봉인되어 있던 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진우는 망설임 없이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물줄기가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인다.

    **(SFX)**
    쉬익… 꿀꺽… 꿀꺽… 꿀꺽…

    **진우**
    (눈을 감고,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하다)
    하아… 살 것 같다… 진짜로…

    **[패널 16]**
    물을 마신 후, 진우의 얼굴에 간만에 평온한 표정이 스친다. 그는 통조림 하나를 따서 먹기 시작한다. 짠맛과 단맛이 뒤섞인 익숙한 맛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내레이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간적인 맛이었다. 혀끝을 스치는 작은 행복이, 잠시나마 이 끔찍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이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장면 4: 낯선 시선]**

    **[패널 17]**
    진우가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툭’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작은 돌멩이가 구르는 소리 같기도 하다. 진우는 즉시 식사를 멈추고 쇠 파이프를 고쳐 잡는다. 그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변한다. 모든 근육이 긴장한다.

    **(SFX)**
    툭…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소리)

    **진우**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패널 18]**
    진우의 시선이 향하는 곳. 무너진 벽의 균열 너머로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적이 흐른다.

    **[패널 19]**
    진우가 숨을 죽인 채 집중한다. ‘끼이익…’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바닥을 긁는 소리 같기도 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SFX)**
    끼이익… (아주 희미하게, 반복적으로)

    **[패널 20]**
    진우의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그 소리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그의 눈이 어둠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매섭게 빛난다. 식은땀이 흐른다.

    **(내레이션)**
    이 세상에 혼자라는 건… 위안인 동시에, 가장 큰 공포였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널 21]**
    진우가 쇠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준다. 그때, 어둠 속에서 아주 잠깐, 희미한 붉은색 섬광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짐승의 눈빛처럼, 섬뜩하게 빛났다가 사라진다.

    **진우**
    (크게 외친다)
    나와! 거기 누구냐! 숨지 마!

    **[패널 22]**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없다. 다시 고요한 침묵만이 감돈다. 진우는 잔뜩 경계한 채 주변을 둘러본다. 아까의 소리와 섬광은 정말 착각이었을까? 아니, 착각일 리 없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린다.

    **[패널 23]**
    진우가 겨우 찾은 통조림과 물을 재빨리 배낭에 챙겨 넣는다.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다. 생존 본능이 그에게 속삭인다. ‘도망쳐.’

    **(내레이션)**
    잠깐의 평화는, 더 큰 위협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이 잿빛 세상에서, 나는 언제까지 이 숨 막히는 숨바꼭질을 계속해야 할까. 지아… 넌 어디에 있는 거니. 살아있는 거니…

    **[패널 24]**
    진우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식품관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의 뒤로, 방금 그 붉은 섬광이 스쳤던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뭔가가 스윽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인다. 그것은 진우가 미처 보지 못했던, 움직이는 형체였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작은 눈동자가 진우의 뒷모습을 응시한다.

    **(내레이션)**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사냥하거나 사냥당하는 존재일 뿐. 오늘도… 나는 사냥감인가.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