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운명이 걸린 무림 대회, ‘천무제’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을 넘어, 이름 없는 강호의 숨은 고수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고, 비룡봉 정상에 마련된 거대한 경기장에서는 기합 소리가 천지를 울릴 듯했다.
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고대에 봉인된 ‘어둠의 균열’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오직 천무제에서 우승한 자만이 그 균열을 영원히 닫을 ‘태초의 기운’을 다룰 수 있다고 전해졌다. 한마디로, 세계를 구할 ‘선택받은 자’를 가리는 자리였다.
관중석 제일 높은 곳, 특등석에 앉은 무림 맹주가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제27회 천무제, 개막을 선언한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오직 한 명에게 쏠려 있었다.
강무진.
내 이름은 한가람. ‘불꽃 검객’이라는 거창한 별호가 붙었지만, 실상은 망해가는 검문파의 외동딸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명예 회복과 동시에, 그 망할 ‘어둠의 균열’을 막는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무진이 이 대회에 참가하다니!
“저기요! 강무진 씨!”
경기장 구석, 햇볕 좋은 자리에서 졸고 있던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대충 걸친 도포, 그리고 세상만사 귀찮다는 표정. 저 사람이 바로 ‘잠자는 용’ 강무진이라 불리는 자였다. 타고난 무재(武才)는 천하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 재능을 오직 낮잠과 먹는 데만 쓰는 한량 중의 한량이었다.
“아, 한가람 씨였어요? 또 무슨 일로… 오늘은 좀 쉬고 싶은데.”
“쉬고 싶다니요! 천하의 운명이 달린 대회인데, 그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때예요? 당장 몸 풀러 나가지 못해요!”
내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 참가자들이 모두 우리를 돌아봤다. 젠장, 또 시비 거는 꼴이 되어버렸잖아!
무진은 하품을 쩍 하더니, “음… 뭐, 아직 예선이라서요. 기운은 아껴야죠.”
“기운을 아끼는 게 아니라, 존재감을 아끼는 거겠죠! 당신 같은 사람이 우승하면, 무림인들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럼 한가람 씨가 우승하면 되겠네요. 제가 굳이 나설 필요 없잖아요?”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내 속을 뒤집어 놓았다.
“젠장… 두고 봐요! 내가 이길 거예요! 그리고 그 우승컵, 당신 같은 한량한테 절대 안 넘길 거야!”
나는 이를 갈며 뒤돌아섰다. 매번 저 남자 앞에서는 이성을 잃는다. 작년에 우연히 들른 주막에서 만난 뒤로, 그는 내 인생의 최대 골칫덩이가 되어버렸다. 그때도 나를 놀리다 내 검을 빼앗아 순식간에 제압했었지. 그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다.
***
대회는 이틀에 걸쳐 예선이 진행되었다. 나 한가람은 ‘불꽃 검객’이라는 별호에 걸맞게 화려하고 강력한 검술로 연승을 거두었다. 나의 검은 불꽃처럼 춤추며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관중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강무진은… 그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첫 경기에서 그는 상대의 공격을 눈 감고 피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상대방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심판은 ‘기발한 낙법을 이용한 공격’이라며 그의 승리를 선언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상대가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게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승리했다.
“젠장, 저게 무슨 무술이야? 개그 아니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이기는 방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승리했다. 그것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말이다. 마치 거대한 힘을 숨기고 있다는 듯,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상대를 농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32강전이 시작될 무렵, 무진과 나는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되었다. 으악, 이런 운명의 장난이라니!
그는 여전히 늘어져 있었다. “한가람 씨는 체력이 참 좋네요. 저 같으면 벌써 지쳐서 쓰러졌을 텐데.”
“누구처럼 잠만 자고 게으름 피우는 사람한테 들을 말은 아니죠.”
“하하, 뭐. 어차피 이길 거라서요.”
“흥! 누가 이긴다는 거예요?”
“저요.”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이 오만한 자식!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맹세코, 내가 본 남자 중 가장 거만하게 생긴 남자였다. 번쩍거리는 금실 장식이 달린 도포에, 콧수염을 잔뜩 기른, 사자후 문파의 차기 문주, ‘철권’ 배명호였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어이, 강무진. 이런 잡것들과 어울리고 있었나? 무림의 수치로군.”
나는 잡것? 내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요, 배명호 씨! 말 다 했어요?”
“이런, 검술이나 배우다 만 애송이는 좀 빠져 있어라.” 배명호는 무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강무진, 네놈이 아무리 잠자는 용이라 불릴지언정, 이번 천무제 우승은 내 것이다. 천하의 수호자? 그런 중요한 역할은 나, 배명호만이 어울리지. 감히 네놈 같은 한량에게 맡길 수 없어.”
무진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배명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라, 얼굴에 뭔가 묻었네요.”
“뭐, 뭣이?” 배명호는 당황하며 얼굴을 문질렀다.
“아, 거만함이요.” 무진이 싱긋 웃었다.
배명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놈이! 감히 나를 놀려? 두고 보자, 언젠가 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니!”
그는 씩씩거리며 대기실을 나갔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무진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강무진 씨,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저 거만한 자식!”
“뭐, 그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거겠죠.” 무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게 오히려 편하달까.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것보단.”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무진은 겉으로는 게으르지만, 내면은 꽤나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
대회는 8강, 4강으로 치달았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 나와 무진, 그리고 배명호는 모두 4강에 진출했다. 문제는 대진표였다. 나는 배명호와 겨루게 되었고, 무진은 다른 강력한 문파의 고수와 맞붙게 되었다.
배명호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그의 ‘철권 무공’은 바위를 부술 듯 강력했고, 나는 ‘불꽃 검술’로 그의 파괴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경기장은 그의 우렁찬 기합과 나의 날카로운 검기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 찼다.
“흐읍! 하아!”
나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불꽃 베기!”
내 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배명호에게 날아갔다. 그는 비웃듯 팔뚝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내 검술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검 끝이 그의 도포 소매를 스치며 미세한 상처를 냈다.
“크윽!”
“이게 끝이 아니에요!” 나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때, 갑자기 경기장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지진인가?”
“아니, 저것 봐! 하늘이…!”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 상공에 닿았다. 먹구름이 휘몰아치며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거대한 시공의 균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검고 푸른 빛이 뒤섞인 균열에서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림 맹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이런… 어둠의 균열이 벌써…!”
경기가 중단되고, 모든 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왔다. 배명호도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말도 안 돼… 아직 천무제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때, 무진이 성큼성큼 균열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졸린 표정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용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태산처럼 거대했다.
“강무진 씨! 위험해요!” 내가 소리쳤다.
“아니요, 저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네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어둠의 균열에서 음산한 괴물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형체의 그림자 괴물들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림 고수들은 일제히 그 괴물들을 향해 무공을 펼쳤다.
무진은 균열 바로 아래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만물을 감싸 안는 듯한 따뜻하고도 강대한 기운이었다.
“태초의 기운…!” 무림 맹주가 경악했다. “어떻게… 아직 대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무진이 그 기운을 다루고 있단 말인가!”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줬던 게으르고 어설픈 모습은 모두 연기였던가? 아니,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건 평온한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기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무진의 푸른 기운이 균열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던 괴물들이 그 기운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하지만 균열은 너무 커져 있었다. 그의 기운만으로는 역부족인 듯 균열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었다.
“젠장, 혼자서는 안 돼!”
나는 순간적으로 결심했다. 무진이 천하 제일의 고수일지 몰라도, 이 거대한 균열을 막는 건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강무진 씨! 내가 도와줄게요!”
나는 내 모든 내공을 검에 불어넣었다. 내 몸에서 붉은 불꽃이 솟아올랐다. 배명호도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한가람! 너 지금…!”
“이 천하의 운명, 당신 혼자 짊어지게 둘 순 없어요!”
내 붉은 검기가 푸른 기운을 향해 뻗어나갔다. 무진은 놀란 듯 나를 돌아봤지만,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한가람 씨.”
내 붉은 불꽃과 무진의 푸른 기운이 합쳐지자, 그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이며 보랏빛 오라를 뿜어냈다. 그 오라가 균열을 감싸 안자, 균열의 확장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괴물들의 생성도 멎었다.
배명호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자신의 ‘철권’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흥! 천하의 운명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까 보냐! 받으시오, 내 모든 기운!”
그의 몸에서 황금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보랏빛 오라에 합류했다. 다른 문파의 고수들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기운을 보탰다. 장풍, 검기, 권기, 온갖 무공의 기운이 무진과 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처럼,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균열을 향해 쏘아졌다.
쿠오오오오!
엄청난 빛이 하늘을 뒤덮었고, 균열은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먹구름은 걷히고, 청명한 하늘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동시에 휘청였다. 온몸의 내공을 다 쏟아부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진은 나를 붙잡아주려 했지만, 그 역시 비틀거렸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살았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덕분에 살았네요.” 무진이 내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그의 체향이 느껴져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 누가 누구 덕분에 살았다고…!”
“아, 그럼 제가 혼자서 다 막았다고 할까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뭐래요! 으이그!”
주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 맹주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강무진! 한가람! 그리고 모든 무림인들이여! 진정으로 천하를 구했노라!”
나는 무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다. 게으른 한량인 척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보다 강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때, 무진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한가람 씨.”
“네, 넷?”
“저 배고파요.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 어때요?”
나는 그의 엉뚱한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하를 구하고 나서는 고작 한다는 소리가 순대국밥이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좋아요. 하지만 밥값은 강무진 씨가 내는 거예요! 내가 천하를 구하는 데 일조했으니까!”
“음… 그래요. 그럼 제가 소주값을 낼게요.”
우리는 서로에게 기댄 채 피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할 거대한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청춘 남녀처럼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다. 무림의 운명을 건 대결은 이렇게 로맨틱 코미디처럼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무진과의 만남 자체가 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좀 일으켜 주세요, 강무진 씨. 다리가 풀려서 못 걷겠어요.”
“네네, 공주님. 업어드릴까요?”
“누, 누가 공주님이에요! 얼른 일으켜요!”
그의 놀림에 또다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번에는 왠지 싫지 않았다. 햇살이 비추는 비룡봉 정상에서,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무림의 새로운 역사는, 순대국밥과 소주 한 잔을 향한 길에서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