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스쳤다. 이안은 눈을 감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고요한 전시물 위에 올려놓았다. 시공간 연구소의 깊은 지하에 숨겨진,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원형 유물. 그것은 시간의 잔해 속에서 건져 올려진 고대 유물인 동시에, 미래의 기술로 재구성된 시간 안정 장치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희미한 전류가 흘렀고, 유물의 표면에서 파동이 일었다. 빛이 이안의 얼굴을 스쳤다. 그녀의 눈꺼풀 안쪽으로, 잊혔던 기억의 조각들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어지러운 빛 속에서,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닥터 강이 그녀의 뒤에서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간 에너지의 미약한 변화를 감지하며 초조하게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안이 유물에 접촉할 때마다 그녀의 기억은 조각난 꿈처럼 찰나의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빛이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시간의 틈새, 잊힌 조각
순간,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이안의 의식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기억의 파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잔해로 변한 도시의 풍경. 하늘을 찌르던 마천루들이 뼈대만 남긴 채 허물어져 있었다. 잿빛 연기가 자욱한 하늘 아래, 붉은 노을이 절망적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던가? 이안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기억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그의 얼굴만은 또렷했다. 다정하면서도 굳건한 눈빛,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미소.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강하고 따뜻한 손아귀.
“이안… 기억해줘.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이걸 막아야 하는지.”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주변에서는 거대한 구조물이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땅이 흔들리고, 시간이 뒤틀리는 듯한 불길한 진동이 온몸을 때렸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그녀에게 건네주려 했다. 조그맣고 푸른빛을 내는, 낯익은 기계장치. 바로 지금 이안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시간 조정 장치와 똑같은 것이었다.
“이게 있어야…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아니, 되돌리는 게 아니라… 바로잡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거대한 잔해가 그들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이안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살아남아, 이안! 기억을 찾아야 해!” 그의 외침은 끔찍한 붕괴음에 묻혔다. 이안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는 잿빛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던 마지막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뇌리 속을 떠돌았다.
이안은 흐느끼듯 숨을 들이켰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아픔과 동시에, 거대한 상실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 남자는 누구였던가? 왜 그녀의 기억은 그 순간에서 끊어졌던가? 그리고 그가 말한 ‘바로잡아야 할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이안! 괜찮아요?” 닥터 강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 그는 이안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과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고 경악했다. “몸에서 시간 에너지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기억 조각이 너무 강렬하게 돌아온 것 같아요.”
이안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유물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새로운 결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절망 속에서 겨우 한 조각을 건져 올린 듯한 아득한 슬픔. 하지만 동시에, 잊었던 사명감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경고음, 시간의 침략자들
그때였다. 연구소 전체를 뒤흔드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며 모든 화면에 ‘경계’라는 단어를 띄웠다. 이안과 닥터 강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연구원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침입입니다! 좌표 확인 불가! 차원 균열이 감지됩니다!”
닥터 강은 경악하며 모니터를 노려봤다. “말도 안 돼! 우리의 위치는 완벽하게 숨겨져 있었어! 누가 이 시공간에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이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망설임 없이 유물에서 손을 떼고 허리춤의 시간 조정 장치를 움켜쥐었다. 잊혔던 전투 본능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 모든 것이 기억의 일부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 도시를 파괴했던 존재들, 그 남자에게서 그녀를 떼어놓았던 힘. 그들이 그녀를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들이에요.” 이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시간 파괴자들. 그들은 저를 쫓아왔어요. 제가… 제가 기억을 되찾으려는 걸 방해하려는 거예요.”
닥터 강은 이안의 비장한 표정을 보고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 최첨단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거지? 그들의 기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란 말인가?”
“상상 이상이겠죠. 그들은 시간을 파괴하려 하니까요.” 이안은 연구소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들은 제가 건네받았던 그 장치를 원할 거예요. 그리고 저의 기억을 영원히 지우려 할 겁니다. 제가…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에서 시간 조정 장치가 미세한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시간 에너지와 장치의 에너지가 공명하는 듯했다. 이안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그 장치의 존재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 남자가 그녀에게 넘겨준 것은 단순히 시간을 조절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녀의 모든 기억과 사명을 담은 열쇠였을지도 모른다.
시간과의 전쟁 서막
“닥터 강, 대피 명령을 내리세요. 이곳의 모든 자료를 백업하고 다른 연구소로 옮기세요.” 이안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아니, 제가 이들을 막아야 합니다.”
“혼자서요? 그들은 숫자가 압도적입니다! 아직 그들의 능력을 전부 파악하지도 못했어요!” 닥터 강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은 아직 완전한 기억을 되찾지 못했어!”
이안은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푸른 불꽃 같았다. “기억은 조각났지만, 제 몸은 기억하고 있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할지.” 그녀의 입술에서 잊혔던 이름이 흐릿하게 맴돌았다. ‘지혁’… 그의 마지막 외침과 함께 사라진 이름.
쿵! 쿵! 쿵! 거대한 충격음이 연구소 복도를 타고 울려 퍼졌다. 침입자들이 이미 내벽에 도달한 듯했다. 복도 끝에서 섬광이 번쩍이더니, 시간 왜곡으로 일그러진 듯한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은 차갑고 무감각했으며,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이안은 그들의 선봉에 서 있는 한 인물의 얼굴을 보았다.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기시감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안은 시간 조정 장치를 움켜쥐고 자세를 낮췄다. 기억의 잔해가 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새롭게 불타오르는 사명감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했다. 시간 파괴자들의 그림자가 그녀에게 드리워졌다. 제63화, 시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절망적인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