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때렸다. 창밖으로는 희뿌연 눈송이들이 춤추듯 내려앉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눈보라였다. 세상은 온통 하얗게 뒤덮여 침묵에 잠긴 듯했지만, 하준의 심장은 맹렬한 폭풍우 속에 놓인 작은 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병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 은서가 가늘게 숨 쉬는 모습은 마치 유리 공예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녀는 지난 사흘 밤낮을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의사는 담담한 어조로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준은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욱 거부하고 싶었다. 그의 손은 그녀의 메마른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온기가 사라진 손목에서는 차가운 생명 유지 장치의 선들이 뻗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몇 주 전만 해도, 그녀는 그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며 환하게 웃어주던 사람이었다. 그의 세상의 전부였던 그녀가, 이제는 잿빛 병원 침대 위에서 아슬아슬한 생명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얼어붙은 시간, 다시 찾아온 눈꽃
하준은 눈을 감았다. 오래전, 너무나도 선명해서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한 겨울날의 기억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도 눈이 내렸다. 지금처럼 거센 눈보라가 아니라, 손바닥에 닿으면 금세 녹아 사라지는, 작고 보드라운 눈꽃들이었다.
어린 은서는 붉은 털모자를 쓰고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밭을 걸으며, 그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꿈꿨다. 그녀의 볼은 추위에 발그레했지만, 눈빛만은 세상 그 어떤 별보다 반짝였다. “하준 오빠, 우리 약속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서로를 놓지 않겠다고. 이 세상 끝까지라도 서로를 찾아내겠다고.”
하준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속해. 어떤 시련이 와도,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함께할 거야. 영원히.”
그때 그는 열아홉 살이었고, 은서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약속은 순수한 사랑과 굳건한 믿음으로 겨울 눈꽃처럼 투명하고 아름답게 맺어졌다. 그들은 그 약속이 그들의 모든 것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켜지지 못한 맹세의 무게
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그들의 약속은 현실의 무게 아래 수도 없이 휘청거렸다. 하준은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했고, 은서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멀리 떨어져 지내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언제나 새로운 벽에 부딪혔다. 하준은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점점 더 냉철하고 무감각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고, 은서는 홀로 고군분투하며 그와의 거리를 실감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재회는 은서가 병상에 눕게 된 후에야 이루어졌다.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은서는 홀로 남겨졌고, 하준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뒤늦게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지만,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녀의 몸은 병마와 싸우느라 지쳐 있었고, 마음속의 상처는 깊고 넓었다.
하준은 후회와 자책감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약속했잖아.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내가 널 놓지 않겠다고. 그런데 난 뭘 한 거지?’ 그의 눈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를 맴돌았다. 미안함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슬픔이 그를 짓눌렀다.
희망을 잡으려는 손길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백발의 의사, 강 교수님이 들어섰다. 그는 차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준 씨, 은서 씨의 몸은…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지만…”
강 교수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준은 그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시선이 은서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이었지만, 하준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빛을 담은 듯이 보였다.
그는 즉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은서야… 내 말 들려? 너 정말 이렇게 날 떠나버릴 거야? 우리의 약속은… 우리의 겨울 눈꽃 아래 맺었던 그 약속은?”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그 안에는 필사적인 외침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어떠한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뇌리 속에는, 어릴 적 은서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 끝까지라도 서로를 찾아내겠다’던 그녀의 눈빛이.
강 교수님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작은 손가락의 움직임은 의학적으로는 거의 무의미한 반응일지 몰라도, 하준에게는 생명의 끈이었다. 그는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었다. 절대로.
새로운 약속의 시작
하준은 결심했다. 지난날의 후회와 죄책감에 갇혀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 교수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교수님, 은서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정말 없습니까? 어떤 방법이든 좋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저는 은서를 살릴 겁니다.”
강 교수님은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결의를 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매우 위험하고 성공률이 낮지만… 마지막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해외에서 개발 중인 새로운 임상 치료법인데, 아직 대규모 적용 사례가 적고 부작용도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비용도…”
“상관없습니다.” 하준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비용이든, 위험이든,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은서가 살 수만 있다면, 저는 그 어떤 대가도 치를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은서의 침대로 다시 돌아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과거의 그날처럼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은서야, 들어. 나는 널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나는 널 찾아낼 거고, 널 지켜낼 거야. 이번엔 내가 약속을 지킬게. 우리의 겨울 눈꽃 아래 맺은 그 약속을.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 마. 제발… 나에게 돌아와 줘.”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꽃이 흩날렸다. 하지만 하준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차가운 절망이 아닌, 뜨거운 결의와 희미하지만 단단한 희망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제208화, 하준은 새로운 약속을 맹세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처음 맺었던 약속보다 더 강력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절박한 사랑의 맹세였다. 이 약속이 과연 얼어붙은 시간을 녹이고, 은서의 희미한 숨결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겨울의 긴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