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65화

밤이 짙어지는 시간, 거실의 스탠드만이 희미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도시의 소음마저 저 멀리 희미해진 듯했다. 나는 낡은 소파에 깊이 몸을 파묻고 앉아, 손에 들린 책도 잊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요즘 들어,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과 함께 가슴 한편이 시리고 저려오는 날이 많았다. 팍팍한 현실의 무게는 어깨를 짓누르고, 미래는 안개 낀 강 건너 풍경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곁에서 잠들어 있던 온기 덩어리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갈색빛 털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박힌, 어느새 나의 세상에서 가장 익숙하고 소중한 존재가 된 그 고양이였다. 녀석은 하품을 길게 하더니, 늘 그랬듯 무심한 듯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툭, 내 옆구리에 머리를 기댔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과, 미세하게 전해져 오는 녀석의 체온이 퍽 위안이 되었다.

나는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어 조심스레 등을 쓸어주었다. 녀석은 만족스러운 듯 ‘그르렁’ 하는 낮은 소리를 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작고 조용했지만, 어쩐지 내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마치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밤을 함께 보냈고, 수많은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어왔다. 녀석의 눈빛, 녀석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하나의 온전한 언어였다.

“별아….” 나는 낮은 목소리로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이 고양이에게 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어둡고 차가운 길 위에서 작은 빛처럼 반짝이던 녀석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오늘은 좀 힘들었어. 모든 게 다 버겁게 느껴지는 날이야.”

별이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고 깊은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내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나는 녀석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거야. 쉬운 날도 있고, 어려운 날도 있지.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모든 순간이 다 지나간다는 거야.’
‘봐, 너는 지금 여기 있고, 나는 네 옆에 있어.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세상이 아무리 거칠고 차가워도, 너의 온기를 잃지 마. 너의 빛을 잃지 마.’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내가 녀석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녀석이 나의 마음을 읽어 대신 말해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처음 녀석이 허름한 골목길 모퉁이에서 나를 따라왔을 때를 기억한다. 작고 여윈 몸으로 세상의 모든 경계를 담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 그때 나는 녀석의 눈에서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살아남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런 녀석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내가 잊고 살았던 삶의 어떤 단단한 의지를, 녀석은 작은 존재만으로도 일깨워주곤 했다.

한번은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나는 어쩐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혀 잠 못 들고 있었다. 그때 별이가 조용히 내 침대 위로 올라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녀석은 불안한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포근하게 몸을 말고 잠이 들었다. 녀석의 작은 심장 박동과 규칙적인 숨소리가 마치 세상의 모든 소란을 잠재우는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녀석 덕분에 나는 비로소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녀석은 그저 존재함으로, 나에게 가장 강력한 위로를 건네곤 했다.

이제 녀석은 내 옆에서 편안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었다. 녀석에게서는 고양이 특유의 따뜻하고 포근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녀석의 존재 자체가 주는 고요함과 따뜻함은, 복잡했던 내 머릿속을 차분하게 정리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거창한 조언이나 위로의 말보다, 녀석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가 나에게는 더 큰 힘이 되었다.

삶은 계속될 것이고, 앞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파도에 부딪히는 날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이 작은 고양이, 별이가 내 곁을 지켜주는 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녀석의 묵묵한 위로와 흔들림 없는 존재감은 나의 인생 여정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되어주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별이의 털빛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별아. 내 곁에 있어줘서.” 녀석은 작게 ‘냐앙’ 하고 대답하는 듯했다. 그 소리에, 나는 비로소 평화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