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의 햇살이 창을 넘어 이소연의 작업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직은 옅은 노란빛을 띠는 햇살이었지만, 그 안에는 겨울의 냉기를 밀어낸 따스한 기운이 역력했다. 흙냄새와 물감이 뒤섞인 작업실 공기 속에서, 소연은 낡은 창고 한쪽을 정리하고 있었다. 쌓여있던 세월의 먼지 위로 바람이 실어다 준 벚꽃잎 몇 개가 살포시 내려앉는 것을 보며 그녀는 문득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몇 년째 이어진 정리였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동생 지호를 찾아 헤매던 시간만큼이나 길고 지루한 일이었다. 그의 흔적을 찾는다는 희망과, 더 이상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 사이에서 소연은 늘 위태롭게 서 있었다. 봄바람은 희망을 속삭이는 듯했으나, 때로는 잊었던 아픔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낡은 목재 상자를 들어 올리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풀풀 날렸다. 콜록이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던 소연의 눈에, 상자 아래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낡은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난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듯 고요히 놓여 있었다. 소연의 심장이 쿵, 하고 한 박자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오래전, 지호가 아끼던 오르골이었다. 어렸을 적, 지호는 이 오르골을 늘 침대맡에 두고 잠들곤 했다. 그의 작은 손으로 태엽을 감으면, 애달프도록 서정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소연은 그 소리를 들으며 지호의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소연은 망설임 없이 오르골의 태엽을 감았다. ‘딸깍,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잊고 있던 멜로디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가슴 저미는 선율이었다. 오래된 음악은 시간의 간극을 넘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치 지호가 살아 숨 쉬며 곁에서 노래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멜로디에 이끌려 오르골을 열자, 벨벳 안감이 덧대어진 내부가 드러났다. 늘 비어있던 곳이었다. 지호는 늘 무언가를 숨겨두었다고 장난스레 말했지만, 소연이 열어볼 때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안에는 낡고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종이였다.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어설프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오래전, 지호가 자신만의 보물 지도를 그릴 때 자주 등장했던 그림. 언덕 위에 서 있는 낡은 등대, 그 옆에는 가지가 기묘하게 휘어진 거대한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아래 작게 쓰여진 글씨, 틀림없는 지호의 필체였다.
“누나에게 보여줄 비밀 장소. 나만의 보물이야.”
가슴이 먹먹해졌다. 잊고 살았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호가 사라지기 며칠 전, 그는 유난히 이 등대 그림을 많이 그렸었다. 소연은 그때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이라 생각하고 흘려들었다. 지호는 항상 그곳이 자신만의 비밀 장소이며, 언젠가 누나와 함께 가자고 졸랐었다. 하지만 소연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못했다. 그 후, 지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제야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지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그곳. 어쩌면 그 그림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낙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연은 등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자주 나들이를 갔던 바닷가 마을의 랜드마크였다. 오래되어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지만,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 가끔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봄바람이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소연의 뺨을 스쳤다. 차가운 듯 따스한 바람은 그녀의 눈물을 살짝 식혀주었다. 바람은 지난날의 후회를 실어 나르는 듯했고, 동시에 잊고 있던 희미한 희망을 전하는 듯했다. 이 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지호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곳에서, 누나와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오르골의 멜로디는 어느새 끝이 났다. 정적 속에 소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수년간 짓눌렸던 무게가 잠시나마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오르골 안에 다시 넣고, 그것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작업실 밖은 온통 연둣빛 새싹과 벚꽃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봄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 그리고 오늘, 소연에게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멈춰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작은 단서였다. 그녀는 등대 그림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기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지호가 남긴 마지막 흔적, 그 비밀 장소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