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14화

차가운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지훈은 두터운 코트 깃을 더욱 여몄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부터 낡은 항구의 적막을 깨트리며 밀려왔다. 흐린 하늘 아래, 썰물처럼 물러난 마을은 고요했고, 오래된 건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듯 묵묵히 서 있었다. 지훈의 손에는 낡고 바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해변 축제 인파 속,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그녀의 뒷모습. 수백 번을 들여다본 사진이었다.

수년째 이어진 이 지루하고도 가슴 저릿한 추적의 끝이 과연 존재할까.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었지만, 그녀의 이름 석 자가, 그녀와 함께했던 희미한 기억 조각들이 그를 끈질기게 붙들었다. 214번째의 발걸음은 잊힌 듯한 이 작은 어촌 마을, ‘해오름리’로 그를 이끌었다.

해오름리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걷던 지훈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낡은 슈퍼 앞 평상에 앉아 햇볕을 쬐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그의 마지막 단서는, 이 마을에서 10년 전 열렸던 작은 해변 예술제였다. 사진 속 배경과 유사한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할머님,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지훈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찌푸린 미간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온 양반인고? 여긴 외지인 발길이 뜸한데.”

“서울에서 왔습니다. 10년 전쯤, 여기서 해변 예술제가 열렸던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꺼내 들고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쭈글쭈글한 손가락이 사진 위를 더듬었다.

“아이고, 벌써 10년이라니… 세월 참 빠르지. 그랬었지. 그때 젊은 작가들이 많이 왔었어. 마을이 아주 시끌벅적했지.”

기대에 찬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혹시, 그때 오셨던 분 중에, 이 사진 속의 여자를 기억하시는지요?”

할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워낙 사람이 많았어야지. 다들 비슷비슷해 보였고.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익숙한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많은 헛걸음 끝에 찾아낸 희망은 늘 이렇게 연기처럼 사라지곤 했다. 지훈은 애써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발길을 돌렸다.

방파제 끝에 홀로 앉아 그는 망망대해를 응시했다. 차가운 바닷물이 쉴 새 없이 하얀 포말을 부수며 바위에 부딪혔다. 저 파도처럼, 그녀를 향한 그의 그리움도 끝없이 밀려왔다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민서.

“지훈아, 나 언젠가 꼭 바다에 가서 그림을 그릴 거야.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바닷가에서, 나만의 색깔을 담아낼 거야.”

어린 시절, 낡은 스케치북을 펼쳐 보이며 해맑게 웃던 민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녀의 꿈은 언제나 그림이었고, 그 그림 속에는 늘 푸른 바다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다를 찾아 헤매는 지도 모른다.

터벅터벅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지훈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낡은 건물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아담하고 예스러운 분위기의 작은 카페 겸 공방이었다. ‘바다 내음 공방’이라는 간판이 낡았지만 정겹게 걸려 있었다. 문득, 카페 문가에 매달린 작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투명한 유리 조각과 함께 엮인, 한 쌍의 조개껍데기 풍경이었다. 조개껍데기는 흔했지만, 그 안에 그려진 작은 그림이 지훈의 심장을 쿵 떨어뜨렸다. 그림은 단순했지만 섬세했다. 옅은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바람에 흩날리는 한 줄기 들꽃. 마치 그녀의 그림 같았다.

그녀는 들꽃을 좋아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작은 꽃잎에도 그녀는 삶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들꽃은 늘 민서의 그림 속 한구석을 차지했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지훈은 홀린 듯 공방 문을 열었다. 짤랑, 하는 풍경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렸다. 따뜻한 커피 향과 희미한 흙냄새, 그리고 물감 냄새가 섞여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공방 안은 아기자기한 도자기와 그림, 그리고 바다에서 주워온 듯한 온갖 공예품들로 가득했다. 그의 눈은 다시 그 들꽃 그림을 찾았다.

벽 한쪽에는 액자에 담긴 수채화가 걸려 있었다. 역시나 들꽃 그림이었다. 풍경에 그려진 것과 같은 화풍, 같은 색감. 숨 막히는 듯한 기시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어서 오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안쪽에서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스물 후반에서 서른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앞치마를 두른 채 나타났다. 그녀의 눈은 온화했지만 어딘가 서글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혹시 이 그림을 그리신 분이 누구신가요?”

그의 손가락은 벽에 걸린 들꽃 그림을 가리켰다. 여자의 시선이 그림으로 향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슬픔과 회상이 교차하는 듯했다.

“아… 이 그림은….” 여자는 잠시 말을 멈칫하더니 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이 그림은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다시 헛된 희망이었나.

“이 그림은… 한때 이 공방을 함께 운영했던 친구가 그린 거예요.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친구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지훈은 다급하게 물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여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지훈의 간절한 눈빛 속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듯했다.

“왜 그 친구를 찾으세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설마…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그 아이인가요?”

그녀의 질문에 지훈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맞다, 이 느낌. 오랜 추적 끝에 맞닿은 희미한 실마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수없이 연습했던 그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혹시… 이민서… 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여자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눈가에 맺힌 작은 물방울이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직도… 살아있을까요?”

지훈의 숨이 멎었다. 살아있을까, 라니? 대체 무슨 말이지? 그녀의 눈물과 함께 흘러나온 그 말은, 그의 오랜 염원과 기대를 한순간에 산산조각 낼지도 모를 거대한 불안감을 예고하고 있었다. 214화의 끝에서, 지훈은 절벽 끝에 선 듯 아찔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민서의 행방을, 혹은… 그녀의 슬픈 운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