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창밖으로는 밤새도록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얀 융단으로 덮고 있었다. 새벽녘부터 시작된 눈발은 이제 한층 굵어져, 거대한 깃털처럼 휘몰아치며 도시의 불빛마저 희미하게 지워버리는 듯했다. 강준혁은 두툼한 외투를 걸친 채 창가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득했고,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공허함을 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 상단의 표지에는 ‘태성그룹 전략적 제휴 및 경영권 승계 합의서’라는 딱딱한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준혁은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무의식중에 주머니 속 차가운 반지를 더듬었다. 오래전,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날, 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약속을 했었다. 따스한 입김을 불어 녹여주던 그녀의 작은 손에, 영원을 맹세하는 이 반지를 끼워주면서.
“보고드립니다, 이사님. 합의서 최종 검토 완료되었습니다. 오늘 오전 중으로 서명하시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됩니다.”
정 비서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준혁의 귓가에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박혔다. 마무리. 그래, 모든 것이 오늘로 마무리될 터였다. 그가 지난 몇 달간 밤잠을 설쳐가며 준비했던,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 지독한 계획이. 준혁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휘몰아치는 눈보라 너머, 희미하게 빛나는 빌딩 숲을 향해 있었다. 그곳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 터였다. 윤지수, 그의 세상이자 그의 심장이었던 그녀가.
“정 비서, 혹시… 윤지수 씨에게 연락이 왔습니까?”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듯 물었다. 그의 질문에 정 비서는 잠시 망설였다. 평소에는 사적인 일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던 준혁의 이례적인 질문이었다. 정 비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네, 이사님. 어제부터 몇 차례 전화와 문자가 있었습니다. ‘괜찮으신지’ 걱정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준혁의 입술 끝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괜찮냐고? 괜찮을 리가.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에 스스로를 던져 넣는 이 순간,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는가. 그는 어제, 지수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별을 고했다. 아니, 이별이라기보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다. 냉정하고 잔인하게, 마치 아무런 감정 없는 타인처럼. 그녀의 눈에 비친 배신감과 상처를 보면서도, 그는 기어이 그 말들을 뱉어냈다.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모든 상처와 고통을 자신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이 비겁한 방식 외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연락받지 마십시오.”
준혁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그가 오랫동안 모셔온 강준혁 이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따뜻하고, 배려심 깊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책임을 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달, 그는 뼈대만 남은 채 영혼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사람처럼 변해갔다. 정 비서는 그 모든 변화가 ‘태성그룹’과 관련된 일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지수는 휴대폰을 든 채 멍하니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어제 준혁에게 보낸 메시지들이 읽히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빠,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제발 설명해줘….’ 그리고 그 메시지들 위로, 어제 준혁이 보낸 단 한 통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리, 더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겨우 그 한마디였다. 지난 몇 년간 함께 쌓아 올린 모든 추억과 사랑을, 고작 그 한마디로 부서뜨리려는 남자였다. 하지만 지수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늘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손길은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했다. 이별을 말하던 그의 눈빛조차,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 것처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밀어내는 그가 더 큰 상처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수는 커피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을 데워주었지만, 가슴속에는 차가운 얼음덩이가 박혀 있는 듯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분명히. 평소 같으면, 준혁은 아무리 바빠도 그녀의 작은 걱정 하나 놓치지 않고 다정하게 풀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식의 통보라니. 게다가 어제 저녁, 그녀가 준혁의 집 앞에 찾아갔을 때도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대신 정 비서가 내려와, 이사님은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니 돌아가 달라는 말만 전할 뿐이었다. 하지만 준혁의 차는 분명 주차되어 있었다. 중요한 회의? 이 한밤중에?
문득, 일주일 전 우연히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준혁의 사무실에 서류를 가져다주러 갔을 때, 비서실에서 얼핏 들었던 소리였다. ‘태성그룹의 요구가 너무 지나칩니다, 이사님. 아무리 경영권 방어라지만….’ 그리고 준혁의 나지막한 목소리. ‘상관없다. 그 조건대로 진행해.’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말들이 이제는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듯했다. 태성그룹. 준혁이 이끄는 회사와 대립각을 세우던 경쟁 그룹이었다. 경영권 방어라니. 그 일과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지수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 큰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준혁의 공허한 눈빛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자신과의 약속만큼은. 그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서로의 손을 맞잡고 영원을 맹세했던 그 약속을, 그는 누구보다 소중히 여겨왔었다.
지수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이대로 그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려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서, 함께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꽉 쥐었다. 이제 그녀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강준혁을 찾아가 모든 것을 듣는 것. 그리고 그와의 약속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그녀는 외투를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거리, 굵어진 눈발이 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차갑고 혹독한 겨울 눈꽃 속에서도, 지수의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준혁을 향한 흔들림 없는 사랑이자,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굳건한 의지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준혁이 있는 곳으로.
***
준혁은 서류에 서명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지만, 억지로 힘을 주어 펜을 움직였다. 날카로운 펜촉이 종이에 닿으려는 순간,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찬 바람과 함께 눈꽃이 휘날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바람을 뚫고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윤지수였다.
“오빠!”
지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깨에는 하얀 눈꽃이 내려앉아 있었고, 붉어진 두 뺨은 차가운 바람을 맞았음을 말해주었다. 준혁은 펜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지수에게 다가섰다.
“윤지수 씨, 죄송하지만 지금은….”
“비켜주세요, 비서님! 전 오빠와 할 말이 있어요!”
지수는 단호하게 정 비서를 밀어내고 준혁의 테이블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로 향했다. ‘태성그룹 전략적 제휴 및 경영권 승계 합의서’. 그리고 그 서류 바로 옆에 놓인, 준혁이 들고 있던 펜. 그녀는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게 뭐야, 오빠. 이 서류, 대체 뭐냐고!”
지수는 서류를 낚아채듯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합의서의 세부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전략적 제휴. 그리고 경영권 승계. 가장 중요한 내용은 태성그룹 회장의 장녀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양사의 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조항이었다. 지수의 손에서 서류가 파르르 떨렸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 그녀를 강타했다.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지수는 서류를 떨어뜨렸다. 합의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깊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자, 그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이런 식으로 나를… 나를 버리려고 해? 우리 약속은… 우리의 약속은 대체 뭐가 돼?”
지수의 목소리는 비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준혁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표정을 깨부수고 싶었다. 그 안의 진실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말해줘, 오빠! 왜 이러는지 말해달라고! 우리 사랑은… 우리의 사랑은 고작 이깟 서류 한 장보다 못한 거였어?”
준혁은 지수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눈빛은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일부러 차갑고 비정한 가면을 더 깊이 눌러썼다. 그녀가 자신을 더 미워하게 만들어서라도, 그녀를 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야만 했다. 이것이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 그랬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보잘것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내 회사를 지켜야 했고, 널 감당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야.”
그의 잔인한 말에 지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이 마치 칼에 꿰뚫린 듯 아팠다. 그녀는 겨우 숨을 들이쉬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지수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에서,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진실이 아닌 무언가를 읽어냈다. 그녀의 직감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그의 가면을 꿰뚫어 보려는 듯,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오빠는… 오빠는 절대 그럴 리 없어. 나 알아. 오빠가 날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다 안단 말이야!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말해줘, 제발….”
지수의 애원에도 준혁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뿌려진 눈꽃처럼 차갑고 무정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기대를 줄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죽어버린 것이어야만 했다.
“더 이상 할 말 없어.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이건… 나를 위한 선택이고, 너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지수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삼켰다. 그의 말은 너무나 잔인했지만, 그의 눈빛 속 깊이 감춰진 고통은 그녀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준혁의 차가운 눈빛 너머로, 눈꽃처럼 부서지는 그의 영혼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꽃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하얗게 변한 세상 속에서, 지수는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분노가 아닌, 깊은 슬픔과 함께 새로운 결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물은 말랐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더욱 선명해졌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아니, 오빠. 이 모든 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야. 오빠의 일은… 언제나 나의 일이었으니까.”
지수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어떤 비수보다도 강하게 준혁의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테이블 위, 준혁이 서명하려다 멈춘 펜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펜을 들고 서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눈물 자국이 남은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을 넘어선 강인한 빛이 서려 있었다. 준혁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하며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지수야, 멈춰!”
하지만 지수는 그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 서류를 찢어버리려는 듯이 꽉 움켜쥐었다. 아니, 찢는 대신, 그녀는 펜으로 서류 위에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합의서의 빈 공간, 혹은 그 위에 겹쳐지는 다른 다짐처럼. 그녀의 펜 끝에서 나온 글자들은 준혁의 심장을 꿰뚫는 것과 같았다.
‘우리의 약속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변치 않는다. 나의 사랑은… 너를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준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했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이 지독한 겨울 눈꽃 속에서, 그들의 약속은 결코 부서지지 않을 불꽃처럼, 그렇게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