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67화

차가운 병원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불안이 감돌았다. 지우는 흰 벽에 기대어 창밖을 응시했다. 밤사이 내린 눈은 이미 더럽게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창틀에 위태롭게 매달린 잔설은 여전히 차가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하진의 수술은 벌써 여섯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길고 긴 기다림은 그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식어버린 커피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진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걱정 마, 지우야. 괜찮을 거야.”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불안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꼭, 오래전 겨울, 눈꽃이 휘날리던 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순간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그날, 우리는 너무나 어렸고, 세상의 모든 약속은 영원할 줄만 알았다.

“지우야.”

나지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유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차가 들려 있었다.

“앉아 있어. 계속 서 있으니까 더 힘들어 보여.”

지우는 희미하게 웃으며 유정이 건네는 차를 받아들었다. 따뜻한 찻잔이 얼어붙었던 손을 녹였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한 불안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하진 씨, 잘 될 거야. 이번 수술만 잘 넘기면….” 유정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그녀의 눈빛 또한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사회의 압박, 병원 측의 비협조, 그리고 하진의 악화된 병세까지. 지난 몇 주간은 지우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하진의 회사를 노리는 강 이사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하진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병원에서는 예상치 못한 합병증 소식으로 지우를 절망에 빠뜨렸다.

“강 이사님 쪽에서 또 연락이 왔어.” 유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까지 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하진 씨가 가진 모든 지분을 강제로….”

지우는 눈을 감았다. 그들은 하진이 병상에 누워있는 이 순간까지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서류에 사인을 하는 순간, 하진이 평생을 바쳐 일군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분명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하진의 노력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오래된 기억 속으로 침잠했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그날, 우리는 작은 오두막 난로 앞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하진은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지우야, 언젠가 내가 너를 위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 거야. 이 눈꽃처럼 아름다운 약속을 지켜줄게.”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눈꽃송이는 이내 녹아 사라졌지만, 그 약속은 지우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의 맹세가 아니었다. 서로를 위해 어떤 역경도 헤쳐나가겠다는, 서로의 꿈을 지켜주겠다는 굳건한 다짐이었다.

“지우야….” 유정의 부름에 지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유정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결정해야 해. 하진 씨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은 없어.”

지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진의 지분을 포기하는 것은 그의 모든 노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었고, 그가 꿈꿔왔던 미래를 스스로 부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인을 거부한다면, 강 이사님은 더 교활한 방법으로 하진을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하진의 수술에도 알 수 없는 영향을 미치려 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병실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문 너머에서 하진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를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의 꿈을 지키는 것? 아니면 그의 생명을 지키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위협받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지우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강 이사님 쪽 사람들은 지금 병원 로비에서 대기 중이래. 서류는 가지고 왔어.” 유정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한 복도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결심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유정을 바라봤다.

“내가 갈게.”

“지우야, 안 돼. 하진 씨가 이걸 알면….”

“그가 알 필요 없어.” 지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금 하진 씨에게 가장 중요한 건 수술이야.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가 오직 그 싸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야.”

그녀는 비록 차갑게 녹아내리는 눈을 보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그날의 눈꽃을 기억했다. 흩날리던 눈송이 아래에서, 우리는 약속했다. 어떤 고통과 슬픔이 찾아와도,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서로의 희망이 되겠다고.

그 약속은, 오늘, 그녀의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힘이기도 했다. 지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꿈꾸던 보금자리를 지키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그가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로비로 향하는 길, 지우는 복도 끝에서 번뜩이는 플래시 세례를 발견했다. 강 이사님이 언론까지 동원해 이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고 있었다. 지우는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하진을 위해, 그 약속을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설령 그 선택이 자신을 영원한 후회 속에 가둘지라도.

지우는 결연한 표정으로 차가운 병원 문을 열고 한 발짝 내디뎠다. 겨울의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그녀의 눈앞에 강 이사님의 냉소적인 미소가 보였다. 하지만 지우의 시선은 그 너머,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오래전 눈꽃이 흩날리던 날의 약속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