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저녁이었다. 지우는 낡은 목조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식어버린 차 한 잔 옆으로는 미처 읽지 못한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공허하게 창밖의 어둠을 헤매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은 듯 답답했다. 이 모든 익숙한 풍경들이 조만간 낯선 과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별이는 언제나처럼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지우의 의자 등받이 위로 사뿐히 뛰어오르더니, 부드러운 몸을 밀착시키며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년의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지우의 일부가 된 듯한 존재였다. 별이의 온기가 등 뒤로 전해지자 지우는 비로소 얼어붙었던 어깨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별아,” 지우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애써 참으며 속삭였다. “아니, 별아. 있지… 엄마가 말이야.”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지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불안을 읽었는지, 별이는 고개를 돌려 지우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묵직한 이해와 알 수 없는 연륜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오랜 친구가 건네는 침묵의 위로 같았다.
지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별이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그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끝에 닿는 별이의 심장 박동은 느리고 고요했다. “우리…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몰라. 아주 먼 곳으로.”
말이 끝나자마자 별이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는 것을 지우는 느꼈다. 어쩌면 그저 그녀의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우는 별이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낡은 집, 이 정원, 그리고 그 모든 익숙한 골목들은 별이에게도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났지만, 이곳에서 수많은 계절을 함께 보냈으니 말이다.
새로운 직장 기회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지우에게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한다는 의미였다. 특히 별이와 함께 만든 이 삶의 조각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별이를 데려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위안이었지만, 낯선 환경에 별이가 적응할 수 있을지, 혹시라도 아프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
“네가 불편해하면 어쩌지? 네가 이 정원 대신 좁은 아파트에 갇혀 지내는 걸 싫어하면 어쩌지?” 지우는 별이의 귀 뒤를 긁어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이는 만족스러운 듯 목을 길게 늘이며 골골송을 불렀다. 하지만 그 소리 속에서도 지우는 희미한 슬픔을 읽는 듯했다.
별이는 갑자기 등받이에서 내려와 지우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지우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 행동은 마치 ‘나는 괜찮아’ 혹은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지우는 별이를 품에 안고 따뜻한 온기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별이의 부드러운 털이 볼에 닿았다.
별이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랬다. 말로 주고받는 것은 없지만,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순간들. 그녀의 불안과 슬픔을 별이가 온몸으로 받아주고, 그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묵묵한 위로와 지혜로 지우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곤 했다. 226번째의 이 대화는 유난히 무거웠지만, 별이는 변함없이 지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 별아. 네가 있잖아.” 지우는 속삭였다. “네가 있다면, 어디든 우리의 집이 될 수 있겠지?”
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지우의 턱을 핥았다. 간지러운 동시에 따뜻한 그 촉감은 지우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불안마저 녹여주는 듯했다. 낯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는 말이 필요 없는 깊은 신뢰와 사랑으로 엮여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지우가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지우의 마음속에는 별이의 온기처럼 따스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별이를 더욱 깊이 품에 안고, 조용히 다가올 새로운 시작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가든, 별이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다. 이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그렇게, 또 한 번 지우의 삶에 깊은 의미를 새기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