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229화

새벽 두 시, 스튜디오 안은 고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고, 하늘에는 듬성듬성 박힌 별들이 제각기 다른 빛을 뿌리고 있었다. 지우는 마이크 앞에 앉아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멜로디가 스르륵 사그라들고, 잔잔한 박수 소리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별밤 지기 지우입니다.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당신의 곁을 지키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도 함께하고 계신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 그녀의 손에 쥐어졌던 쪽지 한 장 때문이었다. ‘푸른별’이라는 닉네임과 함께 단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지우 언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신청곡 드립니다.
그 여름, 옥상에서 함께 듣던 그 노래.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면, 이 노래를 들으며 꼭 다시 이야기하자.’ 기억하시나요?>

지우는 쪽지를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종이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푸른별’. 그 이름은 잊고 지냈던 오랜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녀의 눈앞에 흐릿한 여름밤의 풍경이 펼쳐졌다.

십대 시절, 지우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 윤서가 있었다. 둘은 별을 유난히 좋아했다. 매주 토요일 밤이면, 동네 슈퍼에서 몰래 사 온 캔맥주 두어 개를 들고 윤서네 낡은 옥상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옥상은 그들의 비밀 아지트였다. 불 꺼진 도시의 소음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 위로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지우야, 저기 봐. 저게 푸른별이래.”

윤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유난히 밝고 푸른빛을 띠는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별은 그들의 약속의 증표였다. 낡은 카세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옥상 가득 퍼졌다. 멜로디는 감미로웠고, 가사는 왠지 모르게 애틋했다. 둘은 나란히 앉아 어깨를 기댄 채 노래를 들으며 꿈을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 언젠가 어른이 되어서도 이 라디오를 듣자.’
‘응, 그럼 우리 서로 어디 있든 서로를 기억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다시 만나면 꼭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때 못다 한 이야기 다 하는 거야!’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영원할 것 같던 우정은 그러나, 시간과 함께 흐릿해졌다. 윤서가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고, 지우는 수소문 끝에 겨우 주소를 알아냈지만 답장이 없는 편지 몇 통을 보낸 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윤서는 지우의 기억 속에서 아련한 한 조각이 되어갔다. 푸른별도, 그 여름밤의 라디오도, 모두 아픈 추억으로 묻어두었다.

“오늘은 한 청취자분의 특별한 신청곡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지우는 심호흡을 했다. 마이크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었다. ‘푸른별’. 설마 윤서일까? 정말 그녀일까?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그 모든 기억을 온전히 간직한 채 다시 나타난 걸까?

“닉네임 ‘푸른별’님이 신청해주신 곡입니다. ‘그 여름밤의 속삭임’. 이 곡은 제가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요.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리운 기억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진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익숙하면서도 잊고 지냈던 멜로디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기타 선율이 흘러나오자, 지우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꺼풀 안쪽으로, 옥상 위의 두 소녀가 손을 잡고 별을 바라보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캔맥주의 싸한 맛, 풀벌레 소리, 그리고 윤서의 웃음소리.

노래는 모든 순간을 꿰뚫고 지나갔다. 헤어짐의 아픔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노래 앞에서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오직 순수했던 그 시절의 약속만이, 별들처럼 반짝이며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땐 더 이상 헤어지지 말자.’
‘그래, 이번엔 우리가 먼저 찾을 거야, 푸른별처럼.’

노래가 끝나고, 지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스튜디오 안은 이전보다 더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마이크를 가까이 대고 말했다.

“시간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들도,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와 우리를 위로하거나, 혹은 아련한 그리움에 잠기게 하죠. ‘푸른별’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그 소중한 기억을 다시 꺼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했지만, 흐릿해진 경계선을 넘나드는 듯한 미세한 진동이 담겨 있었다. 이 밤, 그녀의 라디오를 듣고 있을 ‘푸른별’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담아냈다.

“혹시, 그 여름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다면, 다시 한 번 저에게 이야기해주세요. 저도 여전히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방송 시간이 끝나고, 지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튜디오는 어둠과 적막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푸른별’이 남긴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밤, 라디오는 잠시 침묵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별들이 다시금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별들 중 하나가, 가장 밝고 푸른빛을 띠며 그녀의 내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약속의 별이자, 다시 시작될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