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눈보라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이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스한 햇살이 푸른 산등성이를 간질이던 초가을이었건만, 밤새 찾아온 한파는 세상의 색깔마저 앗아간 듯했다. 창밖으로는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세상을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차가운 눈발에 몸을 떨었고, 빵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은 순식간에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날씨에 누가 오겠어요?”
혜진이 투덜거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갓 스무 살을 넘긴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보다 짜증이 먼저 피어올랐다. 새벽부터 일어나 반죽을 치고 오븐을 예열했지만, 이 눈보라 속에서는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만 같았다.
빵집 주인 미선 씨는 혜진의 말없이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내밀었다. 그녀의 표정에도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오늘은 도저히 그 특별한 밀가루가 도착하지 못할 것 같구나.” 미선 씨는 한숨을 쉬었다. 읍내에서 특별히 공수해 오는 그 밀가루는 오늘 구워내기로 한 ‘희망의 빵’의 핵심 재료였다. 혜진이 가장 좋아하는 김 할아버지의 손녀딸, 아람이의 일곱 번째 생일을 위한 빵이었다. 늘 밝고 긍정적인 아람이가 요즘 학교 문제로 시름이 깊다는 소식을 듣고, 미선 씨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오후가 될수록 눈은 더욱 맹렬해졌다. 작은 빵집의 유리창 너머로 세상은 온통 흐릿한 백색으로 잠겨버렸다. 오븐의 열기가 빵집 안을 데우고 있었지만, 혜진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람이의 실망할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익숙한 온기 속 작은 파문
바로 그때, 빵집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설주에 쌓인 눈더미가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고, 그 사이로 눈사람이 된 김 할아버지가 들어섰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추위에 벌개져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장난스럽게 빛났다.
“이런 날씨에도 빵 굽는 소리는 여전하구먼! 미선이, 혜진이, 둘 다 얼굴이 왜 그래? 눈보라에 놀랐나?”
혜진은 얼른 의자를 끌어다 드리며 할아버지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드렸다. “할아버지, 대체 이런 날씨에 어떻게 오셨어요? 위험하게…”
“위험하긴 뭘. 이 동네에서 평생을 살았는데. 그나저나 아람이 빵은 잘 돼가나? 걔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할아버지의 천진한 물음에 미선 씨와 혜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미선 씨가 조심스럽게 밀가루 배송 문제를 설명하자,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실망감이 스쳤다.
“이런, 아람이가 많이 서운해하겠구먼…”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투박하게 생긴 말린 곶감 몇 개와 어쩐지 모르게 향긋한 쑥 한 줌이었다. “오는 길에 마침 곶감 따는 거 도와줬더니 얻어왔네. 그리고 이 쑥은… 어릴 적 내 어미가 이걸로 떡을 만들어주면 그렇게 맛있었어. 없는 재료로도 마음만 있으면 못 만들 게 없지.”
할아버지의 말은 혜진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없는 재료로도 마음만 있으면…’ 그녀의 할머니도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혜진의 할머니는 가난했지만, 늘 텃밭에서 나는 재료들로 기막힌 음식을 만들어내곤 했다. 특히, 혜진이 어릴 적 투정을 부릴 때면, 찹쌀가루와 쑥, 그리고 꿀을 넣고 투박하게 빚어내던 쑥 개떡이 있었다. 어쩌면…
혜진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결심으로 가득 찼다. “미선 씨, 저… 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기적의 향기
혜진은 미선 씨에게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아람이의 ‘희망의 빵’은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쑥과 빵집에 남아있는 찹쌀가루, 그리고 꿀을 이용해 새로운 빵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이었다. 미선 씨는 혜진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혜진아. 해보자.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
혜진은 마치 보물을 다루듯 할아버지가 가져온 쑥을 다듬고 끓는 물에 데쳐 곱게 찧었다. 남아있던 찹쌀가루와 밀가루를 적절한 비율로 섞고, 꿀을 넣어 반죽을 치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쫀득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그녀는 반죽에 정성껏 쑥을 섞어 넣었다. 연두색 반죽은 마치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 찾아온 봄의 새싹 같았다.
그녀는 반죽을 작고 동그랗게 빚어 따뜻한 오븐에 넣었다. 오븐 속에서 빵들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동안, 빵집 안은 이전에 맡아본 적 없는 은은하고 향긋한 내음으로 가득 찼다. 쑥의 푸릇한 향기와 꿀의 달콤함, 그리고 막 구워지는 빵의 고소함이 어우러져 오븐 문을 열기 전부터 모두의 기대를 한껏 높였다.
“와아…”
김 할아버지와 미선 씨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븐에서 나온 빵은 투박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연두빛을 띠고 있었다. 따끈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손으로 뜯자마자 부드럽게 찢어지는 감촉이 황홀했다.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자, 혜진은 눈을 감았다. 혀끝에 닿는 쫄깃함과 은은한 쑥 향, 그리고 꿀의 달콤함이 어우러져 어릴 적 할머니 품에 안겨 먹던 그 맛 그대로였다. 바깥은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지만, 이 작은 빵집 안에는 그 어떤 눈보라도 뚫을 수 없는 따뜻하고 진한 온기가 가득했다.
바로 그때, 미선 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람이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죄송해요, 미선 씨. 눈 때문에 길이 막혀서 아람이 생일파티를 다음 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오늘 빵은 아무래도 무리겠죠?”
미선 씨는 혜진이 만든 쑥 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빵이 있는데… 아람이에게 꼭 전해주고 싶어서요. 날이 좀 풀리면 아람이와 함께 잠깐 들러주세요.”
전화를 끊은 미선 씨는 혜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혜진아, 이게 바로 기적이란다. 없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 더 큰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네 할머니의 마음이 이 빵에 가득 담겼구나.”
혜진은 따뜻한 빵 조각을 베어 물며 창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눈보라는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쑥 빵처럼 따뜻하고 든든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오븐에서는, 눈보라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따뜻한 기적의 향기가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