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은 망루의 창밖은 별들의 군무로 수놓아져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빛나는 점들이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덧없이 흘러갔다. 시온은 차가운 금속 난간을 붙잡고 서서, 그 광경 속에서 자신을 잃으려 애썼다. 그러나 새로이 떠오른 기억의 조각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퍼즐이 되어 맞춰지고 있었고, 그 완성된 그림은 밤하늘의 장엄함조차 압도할 만큼 잔혹하고 분명했다.
“괜찮아요, 시온?”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유리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따스했지만, 지금 시온의 귀에는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을 리 없었다. 방금 전, 유물이 촉발한 연쇄 반응으로 인해 그의 의식 깊숙이 봉인되어 있던 마지막 조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하나의 세계를 뒤흔든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온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었다.
그는 떠올렸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잿빛 하늘, 마지막까지 버티고 서 있던 첨탑의 그림자,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울려 퍼지던 한 소녀의 울음소리. 그녀의 이름은 에리였다. 자신의 누이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존재. 시간을 넘나들며 인류의 기록을 수호했던 고대 종족의 마지막 남은 씨앗. 그리고 시온 자신이, 그녀를 직접 파멸의 문턱으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내가… 내가 그랬어.” 시온의 목소리가 굵은 나뭇가지처럼 갈라졌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어. 하지만 그건… 그건 옳은 선택이 아니었어.”
유리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그녀의 작은 손이 시온의 굳게 쥔 주먹 위에 조심스럽게 놓였다. “무슨 일이에요, 시온? 모든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
시온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래. 모든 것이. 내가 누구인지, 왜 이 시간에 갇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까지.” 그의 시선이 다시 창밖의 별들로 향했다. “나는 시간의 수호자였어. 모든 역사와 모든 가능성을 지키는 자. 하지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때, 나는 선택해야만 했어. 수십억의 생명과, 단 한 명의 소녀. 나의 에리…”
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에리를 선택했어. 단 한 명의 생존자가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지만 그 선택은… 수십억의 죽음을 묵인하는 것과 같았지. 나는 에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존재를 시간 흐름에서 완전히 지워야만 했어. 그녀가 가진 잠재력이 너무나도 거대해서, 어떤 세력도 그녀를 손에 넣는 것을 막아야 했으니까.”
유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시온이 그동안 짊어져 온 고통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잔혹한 진실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에리가 사라진 건가요? 당신이… 직접…”
“그래.” 시온은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녀를 안전한 시간의 틈새로 보냈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의 모든 기억을 지워야 했고, 나 또한 그 영향으로 이곳에 고립되고 말았지. 그리고 지금, 나는 깨달았어. 에리를 살리기 위한 나의 그 처절한 몸부림이, 오히려 그녀를 더 큰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을.”
시온의 눈에 불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어딘가에 살아있어. 하지만 그녀의 기억이 지워졌다면, 그녀는 자신의 힘을 알지 못할 거야. 그리고 그녀를 노리는 그림자들은 분명히 존재할 테고. 내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갔을지도 모른다.”
망루의 차가운 공기가 정적 속에서 맴돌았다. 유리는 시온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요?”
시온은 심호흡을 했다. 그의 눈빛은 고통으로 일렁였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결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지우고, 내가 나를 지웠으니… 이제 내가 그녀를 찾아야 해.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해. 설령 그것이 나를 더 큰 파멸로 이끌지라도.”
그는 유리의 손을 잡았다. “나의 존재 자체가 시간의 오류가 되었어. 에리를 보호하기 위해 행했던 나의 행위는, 오히려 시간의 균열을 만들었고, 그 균열을 통해 다른 존재들이 침투하기 시작했지. 그들이 원하는 건 에리의 힘, 그리고 그 힘으로 세상을 다시 쓰는 것. 나는 그들을 막아야 해.”
“하지만 당신의 힘은 아직…” 유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시간 이동의 부작용으로 시온의 육체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그의 시간 조작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알아.” 시온은 고통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어. 에리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만든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야 해. 내가 다시 나 자신을 찾아야만, 그 시작점에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
그는 창밖의 무한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 별들 어딘가에 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동시에, 그들을 추적하는 검은 그림자의 존재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간의 균열 속에서 기회를 엿보는 존재들. 시온은 그들과 맞서야 했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사랑했던 소녀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을 끝내기 위해.
“유리,” 시온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시간을 가로질러야 해. 그들의 추격이 시작될 거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아.”
유리는 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과 함께 흔들림 없는 충성심이 담겨 있었다. “어디로 가든, 저는 당신과 함께 할 거예요. 당신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건, 이제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안다는 뜻이잖아요.”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존재가, 이 모든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다.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 대답은 끔찍한 진실이었지만, 동시에 그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그는 과거의 죄를 짊어지고, 미래의 불확실성 속으로 다시 뛰어들 준비를 해야만 했다.
망루의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별들은 여전히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그들 아래에서 시간의 수호자는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은 채,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에리, 반드시 너를 찾을 거야. 시온은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고통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