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병원 복도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겨울의 첫눈이 송이송이 흩날렸다. 그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해 버린 듯, 주위를 더욱 고요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싸늘한 대리석 의자에 앉아 손안의 온기마저 빼앗긴 채, 허공만을 응시했다. 은은한 소독약 냄새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의료기기의 규칙적인 ‘삐익, 삐익’ 소리만이 이곳이 살아있는 공간임을 알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지훈에게 생명의 박동이라기보다는, 끝없이 다가오는 절망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지훈 씨.”
어깨를 톡 건드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김 박사였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밤샘 근무의 피로가 역력했지만, 그 뒤편에는 애써 감추려는 듯한 안타까움과 걱정이 서려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은 언제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은지… 괜찮은 건가요?”
메마른 목소리였다. 침을 삼키는 순간에도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김 박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한숨과 함께 무거운 소식을 전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상태가 예상보다 더 위중합니다. 폐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어요.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수단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수단’. 그 단어가 지훈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것은 곧 성공률이 희박한,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험을 의미했다. 은지는, 그의 사랑스러운 딸 은지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채 다 느껴보지도 못한 아이에게 이토록 잔인한 시련이 닥쳐오다니.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속의 고통이 육체의 그것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그때,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면서 창밖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눈송이들이 춤추듯 휘날리는 모습은, 문득 오래전의 기억을 불러왔다. 아주 오래전, 그들의 약속이 시작된 날의 풍경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
겨울 눈꽃, 그날의 맹세
십 년 전, 그날도 눈이 내렸다. 첫눈 치고는 꽤나 많은 양이었다. 서울의 작은 언덕배기 골목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발자국 하나 없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 지훈은 낡은 코트 깃을 세우고 서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은 서윤이 저 멀리서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코끝이 빨개진 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 녹일 듯 따스했다.
“미안해, 지훈아! 눈 오는 거 보다가 늦었어.”
서윤의 목소리는 언제나 맑은 종소리 같았다. 그녀는 지훈의 차가워진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아 쥐었다. 따뜻한 그녀의 손길에 지훈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
지훈은 서윤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눈 쌓인 골목을 걸었다. 어깨 위로 하얀 눈송이들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때, 서윤이 멈춰 서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그녀의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육각형의 완벽한 결정체였다.
“봐, 지훈아. 이렇게 완벽한 눈꽃은 처음 봐.”
서윤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그 눈꽃이 녹아 사라지기 전에 지훈에게 보여주려 조심스레 내밀었다. 지훈은 그녀의 손바닥 위 눈꽃을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꽃은 마치 그들의 모든 순간을 담고 있는 듯 아름다웠다.
“이 눈꽃처럼, 우리도 변치 않고 영원히 함께하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시련이 닥쳐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이겨나가자. 약속해.”
서윤은 진지한 눈빛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사랑과 굳건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사람이라면,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두 사람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굳건한 맹세를 했다. 그것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었다. 서로의 존재를 향한 깊은 신뢰와 미래를 향한 변치 않는 희망이었다.
***
메아리치는 맹세
“지훈 씨?”
김 박사의 목소리에 지훈은 긴 꿈에서 깨어나듯 눈을 깜빡였다. 거친 숨을 내쉬며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왔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의 약속이, 서윤의 따뜻한 미소와 함께 가슴을 저며왔다.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내겠다고 맹세했던 그때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작은 눈꽃이었던 은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훈은 고개를 돌려 복도 끝,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은지의 작은 침대 곁을 지키고 있는 서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은지의 작은 손을 잡고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지훈에게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굳건한 어깨선과 흔들림 없는 자세에서 지훈은 서윤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서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은지를 위해, 그리고 지훈을 위해 버티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날의 약속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에게는 서윤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김 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정은… 서윤 씨와 상의해보시겠습니까?”
지훈은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의 눈빛에 다시금 결연한 의지가 서렸다. 그래,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내겠다고 약속했었다. 마지막 수단이든, 그 무엇이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은지는 그들의 사랑의 결실이자, 그 약속의 가장 아름다운 증명이었다. 그 눈꽃처럼 여리고 귀한 아이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지훈은 김 박사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심은 단단했다.
“아닙니다.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지훈은 중환자실 유리창 너머 서윤의 뒷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눈꽃처럼 아름다웠던 서윤의 눈동자와 따뜻한 손길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가 서윤과 은지를 지킬 차례였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타올랐다. 그날의 맹세가, 그의 영혼을 관통하며 다시금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저희는… 은지를 살릴 겁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의 결심은 겨울 눈꽃처럼 차갑고도 단단했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