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하얀 수의를 입은 듯했다. 창밖으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발은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지수(Jisu)의 심장 소리만이 방 안의 고요를 불규칙하게 깨트렸다.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그녀의 볼은 차가웠지만, 그 냉기가 오히려 뜨겁게 달아오른 생각을 식혀주는 듯했다.
한 손에는 낡은 은색 목걸이를 쥐고 있었다. 손때 묻은 펜던트 안에는 빛바랜 작은 사진 두 장이 들어있었다. 눈밭 위에서 활짝 웃는 어린 현우(Hyunwoo)와 자신. 그날이었다. 겨울 눈꽃이 처음으로 수줍게 땅을 덮던 날, 서로의 작은 손을 맞잡고 영원히 함께하자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를 지켜주자고 맹세했던 날. 그 순진무구했던 약속이, 지금 그녀의 목을 옥죄는 가장 잔인한 족쇄가 될 줄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깊어지는 그림자
차게 식은 찻잔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현우의 병실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과 힘없이 늘어진 손을 보며 지수는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교통사고. 그리고 심각한 뇌 손상. 그에게 필요한 건 고가의 수술과, 기증받기 거의 불가능한 특정 유형의 신경 줄기세포였다. 의사는 희박한 가능성에 대해 말했지만, 지수는 그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지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 시간에 누가? 문을 열자, 현우의 어머니, 서 회장님(Seo Hwejang-nim)이 차가운 눈발을 등에 지고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코트와 명품 가방, 그리고 지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얼음장 같은 시선.
“할 이야기가 있어.” 서 회장님의 목소리는 눈만큼이나 차가웠다. 지수는 말없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현우와 지수의 관계를 단 한 번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현우의 재벌가 배경과 지수의 평범한 출신은 늘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피할 수 없는 거래
따뜻한 차를 내주었지만, 서 회장님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지수의 눈을 향했다. “현우가 깨어나려면 당신이 사라져야 해.”
지수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말하지. 현우는 당신을 잊지 못해서 그토록 방황했어. 이번 사고도 어쩌면… 당신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는지도 몰라.” 서 회장님의 눈빛에 미세한 흔들림이 스쳤지만, 이내 냉혹함으로 뒤덮였다. “현우에게 필요한 줄기세포… 내가 찾았어. 해외의 저명한 연구팀과도 접촉했고, 모든 경비를 지원할 거야. 그 팀의 권위 있는 의사들도 현우를 담당하게 될 거야.”
지수는 희망과 동시에 절망을 느꼈다. 현우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과,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는 비극적인 예감. “조건이 뭐예요…?”
“간단해. 현우가 완치되어 깨어나면, 당신은 그의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해. 아무도 모르게, 흔적도 없이.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도록. 어쩌면… 그에게 당신이 죽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지.”
지수의 손에서 은색 목걸이가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쨍,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날의 약속,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순수했던 맹세. 서로를 지켜주자던 그 약속이 이렇게 비틀린 형태로 돌아올 줄이야. 현우를 살리기 위해, 그녀는 그와의 모든 추억과 미래를 지워야 하는 것이었다.
선택의 기로
서 회장님은 지수의 눈물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아. 현우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건 당신도 알 테니.”
그녀가 떠난 후에도 지수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창밖은 여전히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린 시절의 현우는 눈덩이를 던지며 웃었고, 자신은 그 뒤를 쫓으며 행복해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를 지켜주자’는 약속. 지금 현우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안에서 얼음처럼 느껴졌다. 펜던트를 열자, 어린 현우의 웃는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는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지지 않으면, 현우는 죽을지도 모른다. 이 딜레마는 그녀의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지수는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지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아니면 그와의 약속을 가장 잔인하게 배신하는 것일까? 겨울 눈꽃처럼 차갑고 순수한 고통이 그녀를 감쌌다.
결심이 선 듯,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고, 단단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현우를 살리는 것. 그것이 지금 그녀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었다. 비록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그녀는 코트를 걸치고 문을 열었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얼굴을 때렸다.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눈밭 위로, 그녀의 작은 발걸음이 첫 흔적을 남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차가운 겨울 눈꽃 속으로, 지수는 현우를 위한 마지막 선택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그녀의 심장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를 향한 맹세로 고동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