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동네 이장님의 하루 – 제74화

오늘도 이장님의 하루는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동쪽 산자락에 붉은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이장님은 이미 마을회관 앞마당을 쓸고 있었다. 빗자루질 한 번에 구수한 흙먼지가 폴폴 날렸지만, 이장님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냄새가 정겹다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의 콧노래는 어딘지 모르게 투박하면서도, 묘하게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이장님, 오늘도 부지런하시네요!”
새벽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최씨 아저씨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최 반장님도 수고 많으십니다! 건강이 최고여요!”
이장님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는 마을의 모든 이웃에게 친근한 형이자, 때로는 현명한 아버지, 때로는 장난기 넘치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은 물론, 주민들의 소소한 근심까지도 그의 손을 거쳐야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했다.

마음을 닫은 목소리

아침 순찰을 돌며 주민들의 안부를 묻던 이장님의 발걸음이 김순자 할머니 댁 앞에서 멈췄다. 평소 같으면 대문 활짝 열어놓고 뜰에서 꽃을 가꾸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성진 옛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놓던 할머니였다. 하지만 오늘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순자 할머니! 할머니! 별일 없으시지요?”
이장님이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불렀다. 잠시 후, 안쪽에서 낡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이장님 왔어? 으응, 별일 없어. 그냥 몸이 좀 찌뿌둥해서.”
평소와 달리 생기 없는 목소리였다. 이장님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김순자 할머니는 90평생을 이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웃음과 노래의 근원이었다. 특히 그 옛날 할머니가 불러주시던 자장가는 마을 아이들 모두의 유년 시절을 아름답게 수놓았고, 할머니의 구성진 이야기 한마디면 어떤 고집쟁이 아이도 금세 말똥말똥 눈을 빛내곤 했다.

그날 오후, 이장님은 마을 아이들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다 할머니의 변화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

“이장님, 순자 할머니가 요새 노래를 안 불러줘요.”
대여섯 살쯤 된 민준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왜 안 불러준대?”
“몰라요. 저번에 할머니 집 앞에서 친구랑 놀다가, 제가 ‘할머니 노래는 너무 옛날 노래만 있어서 좀 시시해.’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듣고선 그 뒤로 한 번도 안 불러줬어요.”
민준이의 천진난만한 고백에 이장님은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무심한 한마디가, 어쩌면 할머니의 여린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김순자 할머니에게 노래와 이야기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삶이었고,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이었으며, 할머니 자신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잃어버린 빛을 찾아서

그날 저녁, 이장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순자 할머니의 닫힌 마음을 어떻게 다시 열어줄 수 있을까. 단순히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할머니가 다시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 빛을 발하게 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이장님은 마을 방송을 통해 깜짝 공지를 했다. “주민 여러분! 다음 주 토요일, 마을회관에서 우리 마을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어르신 이야기 잔치’를 엽니다! 특히 김순자 할머니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마련했으니, 모두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세요!”
이장님은 할머니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잔치 이야기를 꺼냈다.

“이장님, 내가 뭘 안다고. 내 이야기는 다 낡고 낡아서 요즘 누가 듣겠다고 그래. 노래도 이젠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아.”
할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그 말 속에는 깊은 회한과 함께,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는 듯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할머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 마을의 보물이자,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할머니의 목소리만큼 구성진 소리를 누가 낼 수 있겠어요? 특히 민준이도 할머니 노래 다시 듣고 싶어서 잠도 못 잔다고 난리입니다!”
이장님은 민준이의 이야기를 덧붙이며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결국 할머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피어난 노래

약속된 토요일, 마을회관은 잔치 분위기로 북적였다. 이장님은 아이들에게 김순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림을 그려오라고 미리 일렀고,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그려와 벽에 붙여 놓았다. 민준이는 할머니가 예전에 들려주었던 호랑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였다.

마침내 김순자 할머니가 연단에 올랐다.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미묘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마이크를 잡은 할머니의 손이 살짝 떨렸다.

“어… 어서들 와서 고마워. 내가 뭐 특별한 이야기를 할 줄은 모르고…”
할머니의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다. 그때, 민준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호랑이 이야기 불러주세요! 저번에 못 들은 거요!”
아이의 천진한 외침에 할머니는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이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이장님은 할머니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할머니는 마침내 가느다란 목소리로 첫 소절을 떼었다. 옛날 옛적, 깊은 산골에… 처음에는 떨리던 목소리였지만,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주민들의 따뜻한 박수 소리에 힘입어 점점 단단해졌다. 이야기는 강물처럼 흘러갔고,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이야기 속 호랑이를 살려내고, 여우를 춤추게 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절정에서, 할머니는 구성진 옛 노래 한 가락을 뽑아냈다.

그 순간, 마을회관 안은 고요해졌다. 모두가 할머니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깊은 정서와 삶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준이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할머니, 할머니 노래가 제일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요!”
할머니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다시 찾은 기쁨과 사랑, 그리고 인정의 눈물이었다. 할머니는 민준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장님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을의 빛은 거창한 건물이나 화려한 축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김순자 할머니의 웃음처럼, 소소하지만 진정성 있는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였다. 한 사람의 마음을 다시 여는 것이, 어쩌면 마을 전체를 밝히는 일이라는 것을 이장님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밤이 깊도록 마을회관에서는 할머니의 노래와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장님은 어두워진 길을 걸으며, 불 켜진 할머니 댁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유쾌한 이장님의 하루는, 오늘도 그렇게 작은 기적 하나를 만들며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