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40화

오래된 종이의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한 페이지를 넘겼다. 땀으로 얼룩지고, 세월의 더께가 앉은 글씨들은 마치 할머니의 숨결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지금 지우가 앉아 있는 곳은 어느 낡은 카페의 구석자리, 창밖으로는 비 젖은 가을 풍경이 눅진하게 펼쳐져 있었다. 손에 든 잉크 얼룩 하나 없는 깨끗한 복사본 대신, 지우는 기어코 할머니의 원본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이 종이의 질감, 글씨의 떨림 하나하나가 할머니와의 대화 같았기 때문이다.

200여 화에 걸쳐 할머니의 숨겨진 삶을 따라왔다. 전쟁의 상흔, 이별의 아픔, 그리고 깊숙이 묻어둔 한 여인의 사랑과 희생. 수많은 조각들을 맞춰왔지만, 이 대목에 이를 때마다 지우의 심장은 늘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 다시 펼친 페이지에는 잉크가 번진 자국이 유난히 많았다. 그만큼 할머니의 눈물이 많이 닿았다는 증거였다.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의 어린 서영이. 조그만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내가 깎아준 나무 참새 인형. 부디 그 인형만큼은 잃지 않고 품고 살기를. 은혜의 집 수녀님은 아이에게 좋은 가족이 찾아올 거라고 했지만,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 아이의 눈망울이, 작은 손길이, 여전히 나를 붙든다…

지우는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할머니는 평생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 침묵은 가족들에게는 할머니의 ‘정체불명의 우울’로 치부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기장은 달랐다. 닳고 닳은 그 구절마다, 할머니의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후회가 사무쳐 있었다. 서영이. 할머니가 젊은 시절, 감당할 수 없는 시대의 무게와 가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아이. 전쟁 고아들로 가득했던 어느 보육원에 맡겨진 할머니의 첫 아이.

수백 개의 단서, 수십 번의 좌절을 겪으며 지우는 마침내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과 ‘나무 참새 인형’이라는 고유한 표식을 기억하는 이를 찾아냈다. 경북 어느 작은 마을, 이제는 폐허가 된 보육원 건물 옆에 세워진 조그만 지역 자료 보관소. 낡은 대장과 사진들 속에서 지우는 희미하게나마 ‘서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잊힌 듯 살아가던 당시의 한 자원봉사자, 김 여사님의 연락처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오늘, 지우는 그 김 여사님을 만나기 위해 이 낯선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얇은 코트 차림의 할머니 한 분이 들어섰다. 지우는 곧바로 그분이 김 여사님임을 직감했다. 흐릿하지만 선량해 보이는 눈빛, 세월의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에서는 삶의 지혜와 고단함이 함께 엿보였다. 김 여사님은 지우를 발견하고는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지우 씨 맞죠?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이 촌구석까지 올 사람이 있을까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어색하지만 조심스러운 대화를 시작했다. 지우는 할머니의 일기장 구절을 외우다시피 하며 ‘서영’이라는 이름과 ‘나무 참새 인형’ 이야기를 꺼냈다. 김 여사님의 눈빛에 순간적인 흔들림이 스쳤다. 침묵이 흘렀다. 길고 긴 침묵 속에서 지우의 심장은 귀청이 터질 듯 울렸다.

“서영이라니… 그 아이 이름을 오랜만에 듣네요.” 김 여사님이 나지막이 말했다. “은혜의 집 시절, 참 예쁜 아이였어요. 눈이 어찌나 맑던지. 늘 손에 작은 나무 인형을 쥐고 다녔지. 참새 인형이었나?”

지우의 손이 떨렸다. “맞아요, 나무 참새 인형… 할머니가 직접 깎아주셨다고 일기장에 적혀 있어요.”

김 여사님은 아련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참 많이 울었어요. 매일 같이 찾아와 문밖에서 서영이를 보다가 돌아가곤 했지. 어찌나 마음 아파했던지. 수녀님도 어쩔 줄 몰라 했고.”

그 엄마가 바로 지우의 할머니, 순자였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지우는 간신히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 아이… 서영이는 어떻게 됐을까요? 혹시 기억하시는 것이…?”

김 여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 아이는 저에게도 특별했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입양될 때까지 기다리던 중, 아주 좋은 분들이 데려갔죠.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였는데,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분들이었어요. 서영이도 그분들을 참 잘 따랐고… 그 나무 참새 인형도 고이 간직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혹시… 그 가족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세요? 어떤 기록이라도…”

김 여사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한켠에 놓인 낡은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손때 묻은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은혜의 집이 문을 닫을 때, 수녀님이 제게 이걸 맡겼어요. 혹시라도 아이들이 자라서 제 뿌리를 찾고 싶어 할 때를 대비해서 말이죠. 저도 이걸 다시 꺼내볼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수첩 속에는 연필로 쓴 희미한 글씨들이 가득했다. 김 여사님의 손가락이 특정 페이지를 짚었다. ‘강서영, 1957년생. 입양인: 박영호, 김미자 부부. 서울 강남구 삼성동…’ 그 옆에는 조그만 사진 한 장이 풀로 붙어 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는 통통한 볼을 가진 어린 서영이가 나무 참새 인형을 품에 안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우가 일기장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젊은 할머니 순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슬픔과 애정으로 가득 찬 눈으로 서영이를 바라보는 모습.

사진 뒷면에는 누군가의 필체로 ‘나의 소중한 서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할머니의 글씨체였다.

지우는 사진을 받아 들고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수십 년간 잊힌 줄 알았던 할머니의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의 흔적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서영이는 존재했고, 성장했고, 어쩌면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 여사님은 조용히 지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놀라셨죠? 저도 이 사진을 다시 보니 마음이 아프네요. 서영이 부모님과는 한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한 20년 전인가?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으로는 서영이가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낳고,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낡은 주소와 전화번호 몇 개가 적혀 있었다. 김 여사님은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마지막으로 제가 알았던 주소예요. 그리고… 이게 서영이 친구였던 은경이 연락처인데, 혹시 아직도 이 번호를 쓰고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지우는 찢어진 종이 조각에 급히 주소와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손은 격렬하게 떨렸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수백 화에 걸친 할머니의 일기, 그 오랜 슬픔의 여정이 이제야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잃어버린 아이, 서영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지우의 가슴을 벅차게 채웠다. 이것은 단순히 사라진 가족을 찾는 것을 넘어, 할머니의 오랜 상처를 치유하고, 잊힌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낡은 일기장과 함께, 지우는 새로운 길 위에 서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이 떨림이, 과연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낼지, 지우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할머니가 남긴 나무 참새 인형처럼, 이 인연의 끈이 결코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지우는 젖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그쳤고,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마치 희망의 조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