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서쪽 끝, 버려진 공장 지대와 낡은 주택들이 기괴하게 뒤섞인 골목이었다. 비는 이른 아침부터 멈출 줄 몰랐고, 회색빛 하늘은 땅거미가 질 시간보다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김지훈은 낡은 바바리코트 깃을 올려 세우고 빗물이 흥건한 골목을 걸었다. 248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걸음은 수없이 많은 도시를 헤매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수없이 많은 희망과 절망의 파편 위를 걸어왔다.
손에 든 낡은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주소와 함께, 흐릿한 사진 속 한 남자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이 사진을 손에 넣기 위해 또 얼마의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가. 그는 이 남자가 서연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유일하게 확인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빗속의 조우
간판도 없는 허름한 건물 앞에서 지훈의 발걸음이 멈췄다. 낡은 철문 위에는 ‘다락방’이라는 손글씨 간판이 덜렁거렸다. 오래된 찻집이었다. 문을 열자 눅눅한 공기와 함께 퀴퀴한 나무 향, 그리고 희미한 홍차 냄새가 섞여 코끝을 스쳤다. 내부에는 몇 개의 낡은 테이블과 의자들, 그리고 창밖의 빗방울만큼이나 침묵이 가득했다. 카운터 뒤에는 지훈의 사진 속 남자, 박선우가 등을 보인 채 컵을 닦고 있었다. 그의 어깨는 한없이 지쳐 보였다.
지훈은 문가에 잠시 서서 숨을 골랐다. 억누르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연, 그의 첫사랑. 그녀를 찾아 헤맨 시간만큼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움과 질문이 깊게 패였다. 그녀는 왜 사라졌을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행복할까? 불행할까?
“박선우 씨, 맞으십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힐 듯 낮고 조용했지만, 찻집 안의 침묵을 깨기엔 충분했다. 선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보다는 깊은 피로감이 먼저 스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야윈 얼굴, 그리고 그 안에 갇힌 깊은 어둠. 지훈은 그에게서 서연의 흔적을 읽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신데요?” 선우는 건조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지훈의 옷차림과 젖은 신발 끝을 훑었다.
“김지훈입니다. 서연 씨를 찾고 있습니다.”
서연의 이름이 나오자 선우의 표정은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닦던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창문 너머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의 등에서는 굳게 닫힌 문처럼 단단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마지막으로 서연 씨와 연락을 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훈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참으려 해도, 십수 년의 세월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부탁입니다. 제가 그녀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상상조차 못 하실 겁니다.”
선우는 다시 지훈을 돌아봤다. 그의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한둘인 줄 아십니까? 그녀를 찾는다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서연이는… 이제 아무도 찾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말에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찾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 그가 가장 두려워했던 진실이었다. 그녀가 자의로 숨어들었고, 그 자의가 외면이라는 칼날이 되어 자신을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그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제가… 제가 다릅니다. 저는 그녀의 첫사랑입니다. 그녀가 왜 사라졌는지,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저에게는 그녀를 찾을 의무가 있습니다.”
지훈의 목소리는 갈수록 절박해졌다. 선우는 잠시 지훈의 눈을 응시했다. 그 눈 속에서 그는 집념과 함께 깊은 슬픔을 읽었다. 그리고 그 슬픔이, 과거의 어떤 그림자와 겹쳐 보이는 듯했다.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 앉으시죠.”
어둠 속 한 줄기 빛
지훈은 낡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선우는 뜨거운 홍차 두 잔을 내왔다.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잡은 지훈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선우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였다.
“서연이는…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도 낮고 조용했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훈의 심장이 죄어왔다. “무슨 일인데요?”
“저는… 그녀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아무에게도 자신을 찾지 말라고… 특히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선우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너무나 지쳐 있었어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그녀의 웃는 얼굴이, 그리고 슬퍼하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기에, 모든 것을 끊어내려 했을까. 그에게 다가오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그저 그를 잊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을까. 그 생각은 그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그녀가 괜찮은지, 살아있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녀의 현재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었으니까요.”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지금,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그녀만의 방식으로.”
“치유…?”
“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특히… 당신에게는 더욱더.”
그 말은 지훈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녀는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했다. 자신이 그에게 짐이 될까 봐, 그를 아프게 할까 봐. 사랑하는 그가 아닌, 한없이 나약해진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선우는 테이블 아래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찢어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낡고 바랜 종이 위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몇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서연의 필체였다. 지훈은 손을 뻗어 그 종이를 잡았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마치 수십 년 만에 그녀의 손을 잡는 것처럼.
“이것은… 그녀가 제게 남긴 마지막 메모입니다. 당신에게 보여주라는 말은 없었지만, 당신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메모에는 단출하게 적혀 있었다.
‘선우야, 고마워. 나는 괜찮아질 거야.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살아가고 싶어.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으면 해.
특히, 그 사람에게는… 내가 너무나 미안하다고 전해줘.
그리고… 아주 먼 훗날, 내가 모든 것을 이겨냈을 때,
혹시… 그때도 나를 기억한다면…
아마, 저 깊은 곳… 바다가 보이는 곳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몰라.’
‘바다가 보이는 곳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 문장이 지훈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직접적인 주소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을 엿본 듯한 느낌. 그녀의 희망,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절절한 외로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녀는 살아가고 있었다. 치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
지훈은 종이를 품에 소중히 넣었다. 비록 그녀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아프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훈은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248화 동안, 그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선우는 조용히 지훈을 바라봤다.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신에게도…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지훈은 찻집을 나섰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지만, 그의 마음속 먹구름은 조금 걷힌 듯했다. 그는 이제 그녀의 현재 위치를 쫓는 대신, 그녀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찾아야 했다. 바다가 보이는 곳. 그림. 그리고 그녀가 다시 웃을 수 있는 날. 그 날을 위해 그는 또 다른 기다림의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탐정 김지훈의 첫사랑 찾기는, 이제 막 다른 차원의 막을 올린 것이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닷가 마을, 그곳이 새로운 시작이 될 터였다. 빗물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희망이, 작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