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병원 복도는 늘 같은 소독약 냄새와 정적, 그리고 미세한 불안으로 가득했다. 서준은 그 익숙한 공기를 가르며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의 세상이었다. 함박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며,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도, 길가의 자동차 위에도, 세상의 모든 모난 곳을 부드러운 순백으로 감싸고 있었다. 저 눈은, 마치 그때 그날처럼….
서준의 발걸음은 절박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의사 호출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급한. 며칠 밤낮을 새며 붙잡고 있던 희미한 희망의 끈이, 저 차가운 눈발처럼 사정없이 끊어질까 두려웠다.
얼어붙은 시간 속의 약속
“서준아, 봐! 눈꽃이 정말 예쁘지? 꼭 우리 약속처럼 부서지지 않고 영원히 내려줄 것 같아.”
아련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듯했다. 아주 먼 옛날, 열여덟의 하나는 수줍게 웃으며 갓 내린 눈밭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날도 오늘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세상이 온통 하얀 도화지 같았던 그날, 서준은 하나의 작은 손을 잡고 맹세했다.
“하나야, 걱정 마. 어떤 계절이 오고 가도, 아무리 매서운 겨울이 와도,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을게. 이 눈꽃이 녹아 봄꽃이 필 때까지, 아니, 평생 함께할 거야.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아. 이 약속, 하늘에 맹세해!”
그때 하나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굳게 깍지 낀 두 손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약속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새하얀 설원 위에 새겨졌다. 그것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자, 서준의 모든 선택의 나침반이 되었다.
현실의 날카로운 칼날
그러나 지금, 그 기둥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서준이 도착한 곳은 중환자실 앞 대기실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하나의 주치의인 지혜가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지혜는 서준의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지만, 지금 그녀는 오직 하나의 생명을 책임진 의사였다.
“서준 씨, 오셨군요.”
지혜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준의 가슴을 짓눌렀다. 서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하나… 하나는요? 무슨 일입니까?”
지혜는 잠시 침묵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하나 씨의 상태가 다시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이제는 선택을 하셔야 할 때입니다.”
서준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선택’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그에게 가장 잔인한 비수였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똑딱거리는 시침 소리가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했다.
“선택이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지금까지의 치료가…”
지혜는 서준의 말을 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기존의 치료 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지금 당장, 새로운 시술을 결정해야 합니다. 성공 확률은 극히 낮고, 부작용 또한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지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서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하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잔인한 진실.
“그 시술은… 하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평생 침상에 갇히게 될 수도 있고, 기억조차 잃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서준의 목소리는 떨렸다. 머릿속에서는 지혜가 예전에 설명했던 부작용들이 잔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하나의 밝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둘 수 있는 감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나가 가장 두려워했던 삶이었다.
갈림길에 선 약속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서준 씨.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것이 지금 하나 씨에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너무나 큰 대가를 요구합니다.”
서준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유일한 희망’이라니. 그 희망은 약속과는 너무나 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의 약속은 함께 웃고, 함께 걸으며, 함께 모든 계절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술은 하나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바꿀지도 모른다. 눈꽃이 녹아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약속은, 그저 이루지 못할 꿈으로 남게 될까?
그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여전히 눈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발 사이로 춤추듯 날아다니는 눈꽃들이 보였다. 그날의 눈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하나의 웃음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렸다.
‘절대 널 혼자 두지 않아.’
그는 하나를 홀로 두지 않기 위해 여기까지 버텨왔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를 ‘잃지 않는’ 대신, ‘하나의 본래 모습’을 잃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서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조차 지금 그의 마음속 고뇌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온전한 삶을 위해, 그 고통스러운 약속을 놓아주어야 하는가?
지혜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시술 동의서’라는 글자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보였다. 펜이 놓여 있었다. 서준의 손이 떨렸다. 펜을 쥘까 말까 망설이는 손가락 끝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서준아… 포기하지 마…”
그것은 희미한 환청이었지만, 그의 영혼을 강하게 붙들었다. 서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서류 위로 펜을 들었다. 눈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그 약속의 날처럼. 그리고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문자 메시지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서준 씨, 마지막 희망은 아직 있습니다. 제가 하나 씨를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별빛 병원’으로 와주세요.]
서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지막 희망? 이것은 또 다른 지옥으로의 유혹인가, 아니면 정말 하늘이 내린 기회인가? 그의 심장은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눈꽃은 여전히 춤추듯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