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일기장의 찢어진 모서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힌 종이 위로 할머니 은서의 필체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밤 지혜가 펼쳐든 페이지는 유독 잉크가 번지고 얼룩져 있었다. 마지막 몇 줄은 거의 읽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아이의 눈빛이 자꾸만 아른거려. 작은 손을 놓치고 돌아서는 길, 내 심장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 부디… 부디 행복하게… 엄마의 품보다 따스한 곳에서 자라주기를…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아가…
지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던 비밀, 일기장을 통해 비로소 드러난 잊혀진 아이의 존재. 지혜는 수개월에 걸쳐 일기장의 단서들을 추적해왔고, 이제 마침내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아이를 맡겼다는 그 작은 마을, ‘솔바람 언덕’이라는 지명과 함께 언급된 유일한 인물, ‘김 선생’이라는 이름.
밤새 잠 못 이루고 지도를 펼쳤다. 사라진 듯한 지명이었지만, 오랜 지형도를 뒤지고 마을 역사를 조사한 끝에 강원도 산골 깊은 곳에 ‘송풍리’라는 마을이 과거에 ‘솔바람 언덕’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곳에 일제 강점기부터 운영되던 작은 보육원이 있었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그 보육원을 설립하고 운영했던 사람이 바로 ‘김 선생’이었다.
과거의 잔해
이른 아침, 지혜는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도시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울창한 산들이 겹겹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송풍리는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 옛 이름 그대로 바람이 소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며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마을은 예상대로 낡고 적막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빈 집들과 빛바랜 간판들이 과거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혜는 일기장에 묘사된 대로 마을 어귀에서 가장 오래된 듯한 느티나무를 찾아냈다. 그 나무 아래서 길을 묻자,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손가락으로 산 중턱의 허물어져 가는 건물 한 채를 가리켰다.
“저기 멀리 보이는 저 건물 말이야? 옛날엔 고아원이 있었지. 지금은 뭐… 폐허나 다름없어. 전쟁 통에 아이들도 많이 줄고, 운영하던 김 선생도 돌아가시고 나서 문 닫았지. 한 50년도 더 됐을 거야.”
50년. 할머니가 아이를 맡긴 시기와 정확히 겹쳤다. 지혜는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폐허라니. 혹시 아이의 흔적마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보육원 터로 올라섰다. 덩굴에 뒤덮인 벽돌 건물은 창문이 부서지고 지붕이 내려앉아 있었다.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썩은 나무 냄새와 먼지가 코를 찔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대신 정적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지혜는 이곳에 어린 할머니의 아기가 잠시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방마다 기웃거리며 혹시나 남아있을 기록물이나 유품을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건은 사라지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절망감이 스쳐 지나갈 때, 지혜의 시선이 한쪽 벽 구석에 쓰러져 있는 낡은 서랍장으로 향했다. 서랍장 위에는 먼지에 뒤덮인 채 반쯤 열려 있는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잊혀진 이름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바싹 마른 잎사귀 몇 장과 함께 낡은 사진 한 뭉치, 그리고 손때 묻은 공책들이 들어있었다. 공책들 중 한 권을 펼치자 가지런한 글씨로 ‘보육원 아동 기록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 선생이 직접 작성했던 기록들이었다.
지혜의 손이 떨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이들의 이름과 입소 날짜, 간단한 특징들이 적혀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과거의 아이들이 기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듯했다. 드디어, 할머니가 아이를 맡겼던 시기의 기록에 도달했다. 1968년 여름.
이름: 미연 (未連)
입소일: 1968년 7월 12일
부모: 은서 (은서 씨는 자신의 아이임을 밝히지 않고, 조카라고 말함. 그러나 눈빛에서 슬픔과 애정이 읽힘.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현실을 알기에 더 묻지 않음.)
특징: 까무잡잡한 피부, 초롱초롱한 눈망울. 순하고 울음이 적음.
추후 상황: 1969년 3월 5일, 서울 ‘행복의 집’ 보육원으로 전원. 미연의 미래를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찾았다는 은서 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미연. 할머니의 딸, 지혜의 이모.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죽지 않고,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지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곧 새로운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행복의 집 보육원이라니. 그곳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미연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기록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한 장의 흑백 사진이 나타났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었는데, 사진 한쪽 구석에 김 선생의 필체로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1968년 가을, 우리 아이들. 미연이도 이 안에 있다.
사진 속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어떤 아이가 미연일까. 지혜는 사진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사진 중앙에 서 있는, 유독 눈에 띄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작은 아이. 그 아이의 얼굴은… 놀랍도록 익숙했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얼굴.
지혜는 급히 자신의 지갑에서 낡은 학생증을 꺼냈다. 대학 시절, 봉사활동을 함께 했던 동아리 친구의 학생증이었다. 이름은 서연. 평소에는 무뚝뚝하지만 가끔씩 보여주던 따뜻한 미소와 깊은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친구. 우연히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던 평범한 인연이었다.
사진 속의 어린 아이와 서연의 학생증 사진 속 얼굴이 묘하게 겹쳐졌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리고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입매. 지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진과 학생증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 이 아이가 서연의 엄마일까? 미연이 서연의 엄마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서연은 할머니 은서의 친손녀, 그리고 자신의 이종사촌 동생이 된다. 핏줄로 얽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존재를 까맣게 모른 채 살았다는 사실에 지혜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지혜는 사진과 기록부를 가슴에 품고 무너져가는 보육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산골의 맑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했다. 할머니가 평생 숨겨왔던 아픈 비밀은 반세기를 넘어 새로운 인연의 실타래를 지혜의 눈앞에 풀어놓았다. 이제 지혜는 이 잊혀진 가족의 역사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그리고 서연에게 이 엄청난 진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낡은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는 아직도 덮이지 않은 채, 또 다른 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