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약속의 별자리
밤의 장막이 깊어지고, 도시의 불빛마저 희미해질 때, 오직 별들만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시간.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유진입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밤하늘 아래서 각자의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그중 한 통의 편지가 제 눈길을 사로잡네요. 늦은 밤, 현우 씨가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유진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30대 후반의 평범한 직장인 현우입니다. 매일 밤 별밤 라디오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저의 작은 위안입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의 백조자리가 선명하게 보이는 밤입니다. 이 백조자리를 볼 때마다, 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죠. 옆집에 살던 수아라는 아이와 저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동네 뒷산 언덕에 올라 밤하늘을 보곤 했습니다. 그때 수아는 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요. 백조자리를 가리키며 ‘저 별이 데네브, 저 별은 알비레오… 언젠가 우리는 저 별들처럼 영원히 빛나는 무언가를 함께 만들자!’ 하고 말하곤 했죠.
어느 날 밤, 예상치 못한 유성우가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언덕으로 달려갔고, 수아는 난생 처음 보는 수많은 별똥별에 눈을 반짝였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했어요. ‘어른이 되면 꼭 다시 이 언덕에서 이 백조자리를 함께 보자. 그때까지 서로의 꿈을 이루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만나자.’ 라고요.
하지만 그해 가을, 수아네 가족은 갑작스럽게 이사를 갔고, 연락처도 주고받지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 후로 저는 여러 번 이 언덕을 찾았지만, 수아는 없었습니다. 백조자리를 볼 때마다 그날의 약속과 수아의 반짝이던 눈빛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집니다.
수아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녀도 이 밤, 같은 백조자리를 보며 그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유진 DJ님, 혹시 제 이 아련한 마음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까요?”
현우 씨의 사연, 잘 들었습니다. 백조자리가 유난히 선명하다는 말에 저도 잠시 창밖을 보게 되네요. 문득, 저 별들 사이 어딘가에서 현우 씨와 수아 씨의 오랜 약속이 여전히 빛나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맹세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법이죠.
별은 참 신기합니다. 수천, 수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빛을 보내와 우리에게 아득한 과거의 시간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잊었던 기억을, 혹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어쩌면 수아 씨도 지금 이 순간, 어느 도시의 밤하늘 아래서 백조자리를 올려다보며 현우 씨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혹은,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저는 현우 씨의 사연을 읽는 내내, 한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늘 그렇듯 익명의 청취자 ‘별똥별’님이 보내주신 문자입니다. 이분은 종종 라디오가 진행되는 동안 특정 사연에 대한 짧은 감상이나 덧붙일 이야기를 보내주시곤 하는데요. 이번에도 타이밍이 참 절묘하네요.
[별똥별]: “유진 DJ님, 현우 씨의 사연… 가슴 먹먹하네요. 백조자리 아래 약속이라니. 저도 어릴 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언덕, 그 백조자리… 누군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립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 현우 씨의 마음이 부디 수아 씨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별똥별’님의 문자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사람으로서’라는 문구가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현우 씨와 같은, 혹은 ‘별똥별’님과 같은, 빛바랜 약속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약속이 때로는 그리움이 되고, 때로는 후회가 되지만, 결국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작은 빛이 되어주기도 하죠.
현우 씨, 그리고 수아 씨를 그리워하는 모든 분들께, 저는 이 밤, 그 약속의 별자리가 다시 한번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그 별자리 아래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 말이죠.
오늘, 제가 선곡한 곡은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입니다. 오래된 사랑의 약속이 느껴지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여러분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별자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그 별자리 아래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이가 누구일지 상상해 보는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음악과 함께, 저는 잠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유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