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갓 풀어놓은 명주실처럼 부드럽게 뜰에 쏟아져 내렸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기지개를 켜며 뿜어내는 옅은 흙내음은, 코끝에 닿자마자 잊고 지냈던 어떤 그리움을 일깨웠다. 살랑이는 봄바람은 낮은 돌담을 넘어, 봉긋하게 피어오른 목련 봉오리를 흔들었고, 그 흔들림마다 간절한 기도가 실려 있는 듯했다.
하윤은 툇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고 있었다. 손에는 아직 채 완성되지 못한 자수가 놓여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멀리 산등성이를 넘는 바람의 길을 좇고 있었다. 해마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 바람은 언제나 그녀에게 희미한 약속이나 아련한 소식을 전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올해의 봄바람은 유독 달랐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작은 파문이 일렁이는 듯한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윤아, 이리 와서 차 한 잔 마시렴.”
안채에서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윤은 가느다란 바늘을 자수 틀에 꽂아두고 일어섰다. 할머니는 이미 따뜻한 차 두 잔을 다탁에 놓으시고는 창밖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고 계셨다. 할머니의 희끗한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세월의 흔적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하윤은 할머니 곁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찻잎에서 우러나는 향긋한 내음이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켜 주었다.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지? 그래도 꽃은 피우고, 새는 날아오르니, 때가 오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할머니의 말은 늘 그랬다. 단순한 자연의 이치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짚어내는 말씀. 하윤은 그 말의 숨은 뜻을 알면서도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때’가 오고 있다는 것이 기쁨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늘 그렇듯 준영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평소와는 다른 무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하윤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준영은 마루에 올라서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뇌와 지친 빛이 역력했다. 흙먼지가 조금 묻은 그의 옷자락을 보니, 그가 꽤 먼 길을 다녀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할머니와 하윤을 번갈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하윤아… 소식이 있습니다.”
준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윤은 숨을 멈췄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작은 집을 지배했던 침묵과 기다림이 일순간에 깨지는 소리였다.
“서진이를… 찾았습니다.”
하윤의 찻잔이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서진. 그 이름은 하윤의 삶의 한가운데를 비워놓은 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었다. 수년 전,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모든 연락이 끊기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서진. 모두가 포기하고 절망했던 그 이름을, 준영은 지금 이 봄날에 다시 꺼내고 있었다.
“정말… 정말이야, 준영 오빠?”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꿈속을 헤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그저 고요히 준영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계셨던 것인지도 몰랐다.
“네. 쉽지 않았지만… 마침내 서진이를 찾았어요.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곳에서요. 건강이 좋지 않고, 기억도 온전치 않은 듯 보였습니다만… 분명 서진이가 맞습니다.”
준영의 말은 희망과 동시에 비극을 담고 있었다.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뒤따라오는 ‘건강이 좋지 않다’,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말은 하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난 세월 동안 서진이 겪었을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어떻게… 어떻게 찾은 거니?” 하윤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오랜 시간, 아무 단서도 없었죠. 하지만 며칠 전, 그곳을 오가던 상인이 우연히 서진이를 발견했고… 제가 전에 뿌려두었던 소식이 그곳까지 닿았던 모양입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이라고밖에 할 수 없네요.”
준영은 쓰게 웃었다. 그의 눈가에는 피로와 함께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그 역시 얼마나 오랜 시간 이 소식을 찾아 헤매었을까. 하윤은 그의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 준영은 언제나 묵묵히 서진의 흔적을 좇아왔던 것이다.
“그럼… 지금 어디에 있어? 당장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하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소식은 그녀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은… 서진이가 있는 곳은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리고 서진이의 상태도… 바로 만나는 것이 좋은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충격이 될 수도 있어요.” 준영의 목소리에는 깊은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기다림의 끝이 항상 쉬운 길만은 아니지. 그러나 시작이 없는 기다림도 없는 법. 이제 때가 되었으니, 너희가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하윤은 창밖의 목련을 바라봤다. 이제 막 피어나려 하는 봉오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단순한 희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세월의 아픔을 다시 들춰내고, 새로운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희망의 씨앗을 다시 싹 틔우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서진이를 만난다는 것. 그것은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억을 잃은 서진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그녀가 겪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수많은 질문들이 하윤의 마음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이제, 다시 서진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갈 참이었다.
준영은 하윤의 복잡한 표정을 읽는 듯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 그리고 무엇보다… 서진이가 우리를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도 알아봐야 해.”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그녀는 다시금 용기를 냈다. 오랜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이 새싹을 틔우듯, 그녀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결심이 피어났다. 봄바람은 차가운 듯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서진에게 닿을 희망의 전조이자, 어쩌면 또 다른 폭풍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하윤은 이제 더 이상 홀로 서 있지 않았다. 준영과 할머니가 곁에 있었고, 그녀의 마음속에는 서진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이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