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254화

창밖은 이미 온통 희게 물들어 있었다. 병실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발은 마치 찢어진 솜털처럼 허공을 유영하며 내려앉았다. 윤하의 시선은 그 눈발을 따라 아득한 과거로 흘러갔다.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심장 한구석에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뜨거운 멍울이 응어리져 있었다. 할머니의 얕은 숨소리가 기계음과 섞여 병실의 적막을 간신히 깨트리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윤하의 삶은 이 작은 병실 안에 갇혀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채는 창밖의 눈처럼 희미해졌고, 그녀의 시간은 할머니의 맥박에 맞춰 느리게 흘러갔다. 의사는 방금 전, 더 이상은… 이라는 단어들로 채워진 절망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한다는 잔인한 통보였다.

오래된 약속의 멜로디

“윤하야, 저 눈꽃처럼 예쁜 약속 하나 할까?”

귓가에 서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바로 이런 겨울이었다. 첫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 낡은 시골집 마당에서 서준은 윤하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그의 눈은 반짝이는 눈꽃을 담은 듯 빛났고, 그가 내뱉은 하얀 입김은 약속의 맹세처럼 허공에 스며들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어떤 긴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이 눈꽃처럼 다시 만나 반드시 함께할 거야.’

그것은 너무나 순수하고, 너무나 맹목적인 약속이었다. 그때는 할머니의 병세가 이렇게 깊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는 두 사람의 미래가 이토록 엇갈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윤하는 서준에게 약속했다.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할머니의 병원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윤하는 자신을 위한 그 어떤 시간도 가질 수 없었다. 서준의 연락은 점점 뜸해졌고, 결국 끊어졌다. 그의 꿈을 따라 멀리 떠났다는 소문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윤하 씨.”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윤하는 화들짝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병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서준이었다. 그의 코트에는 젖은 눈송이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그의 눈은 십 년 전 그날처럼 여전히 다정하면서도 슬픈 빛을 담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차마 윤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윤하는 지난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꼈다.

“서준아… 네가 어떻게…”

“소식 들었어. 할머니가 위독하시다고.”

서준은 할머니의 침대 곁에 꽃을 조용히 놓았다. 병실 공기 속에는 십 년의 침묵과 오해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서준은 윤하를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어진 세월의 흔적과 함께, 여전히 그녀를 향한 변치 않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난… 난 한 번도 그 약속을 잊은 적 없어.”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윤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가 너를 잡지 못했어. 붙잡을 염치도 없었어.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윤하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지난 십 년간 억눌러왔던 모든 회한과 슬픔이었다. 그녀는 할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강박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서준과의 약속은 영원히 지킬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갈림길에 선 마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들어. 왜 그걸 혼자 짊어지려고 해?”

서준이 한 걸음 다가와 윤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 온기가 윤하의 차가운 손을 통해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윤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꾸짖음이 아닌, 깊은 이해와 변치 않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윤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숨을 쉬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화로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는 할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릴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윤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다. 할머니를 포기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윤하야. 네가 지치면 할머니도 편안하지 못하실 거야. 그 약속…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미래였잖아.”

서준의 말에 윤하는 다시 창밖의 눈을 보았다. 눈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 십 년 전 그날처럼. 그때의 약속은 순수한 행복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삶을 옥죄는 거대한 족쇄 같았다.

“난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윤하의 목소리가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서준의 품에 기대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서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의 어깨는 십 년 전보다 훨씬 넓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 온기는 그녀가 오래도록 갈구했던 위로였다.

병실 밖 복도에서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병실 문 앞에 섰다. 그녀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상태가… 이제는 정말… 윤하 씨가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간호사의 말은 두 사람의 짧은 재회에 차가운 현실을 들이밀었다. 윤하는 서준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눈꽃이 흩날리는 겨울날의 약속. 그것은 과연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이토록 오랜 고통의 시작이었을까.

서준은 윤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향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혼자서 감당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이 눈이 그날처럼 다시 내리는 순간,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윤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십 년 전의 약속. 그리고 지금, 이 차가운 병실에서 다시 피어나는 약속. 그녀는 과연 이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용기를,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다시 마주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마치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듯, 끝없이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