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72화

새벽의 푸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도심 골목길은 낡고 바랜 간판들만큼이나 고요했다. 강민의 차는 먼지 쌓인 차창 너머로 빛바랜 도시 풍경을 비추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어제 발견한 지수의 빛바랜 사진 한 장, 그 뒤에 희미하게 적힌 오래된 책방 이름, ‘시간의 조각들’. 그 세 글자가 강민의 가슴을 몇 번이고 들뜨게 했다가, 다시 가라앉혔다. 72번째 에피소드, 잃어버린 시간을 쫓는 그의 여정은 이제 낡은 책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좁은 골목 끝, 삐걱거리는 나무 문이 달린 작은 서점 앞에 차를 세웠다. 간판은 페인트가 벗겨져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쇼윈도 안에는 먼지 쌓인 고서들이 겹겹이 쌓여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강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모든 것이 혹시나 또 다른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할까 봐, 혹은 지수의 흔적이라도 너무 희미해져 알아볼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문을 열자, 낡은 종이와 먼지가 뒤섞인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고요함 속에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강민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책장 사이사이로 옅은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작은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안쪽, 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웅크린 듯한 작은 카운터 뒤로 희끗한 머리의 노부인이 앉아 계셨다. 돋보기 너머로 강민을 훑어보는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연륜이 느껴졌다.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젊은이?”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강민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책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을 아시는지 여쭤보려고요.”

강민은 조심스럽게 지수의 오래된 사진을 내밀었다. 젊은 시절, 햇살 아래 수줍게 웃고 있는 지수의 모습이었다. 사진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여전히 맑게 빛났다.

노부인은 돋보기를 고쳐 쓰고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는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눈가에 드리워진 주름이 살짝 움직였다.

“이 아이… 아주 오래전 손님이었지. 어쩌면 내가 문을 연 초창기부터 드나들던 아이였을 거야. 항상 조용히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어. 말은 없었지만, 눈빛이 참 깊었던 아이였지.”

강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수였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혹시 이름이… 지수였나요?”

강민은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흐음…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저 늘 책 속에 파묻혀 지내던 작은 아가씨라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그 아이가 왜?”

노부인은 강민의 간절한 눈빛을 읽었는지, 질문을 덧붙였다. 강민은 짧게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기 위해 이 골목까지 오게 된 이유를, 그의 지난 시간과 노력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노부인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랑이라… 그래, 젊은 날의 사랑만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또 있을까. 그 아이, 책을 정말 좋아했지. 특히 그림과 시가 함께 있는 책들을 주로 찾아 읽었어. 그러다 어느 날부턴가 발길이 뜸해졌어. 한참 후에 다시 왔을 땐, 얼굴이 많이 상해있더군.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았지.”

강민은 가슴이 아려왔다. 자신이 그녀 곁에 없던 시간 동안, 지수가 얼마나 힘든 일을 겪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과의 이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불행이 그녀를 덮쳤던 것일까.

“그 아이가 다시 왔을 때… 뭐라고 하던가요? 혹시 어디로 간다고는 안 하던가요?”

강민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노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천장을 응시했다. 책과 사람의 온기가 가득했던 이 공간에서, 그녀는 수많은 삶의 조각들을 목격했을 것이다.

“글쎄…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없는데. 한 번은 이곳에 와서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을 보며 이런 말을 했어.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요.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을까요?’라고.”

강민은 숨을 멈췄다. 그림. 지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미술대학에 진학하려 했지만, 그의 기억 속에서는 그 꿈을 포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꿈이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곳… 혹시 그곳이 어디라고 이야기했나요?”

“아니. 정확히 어딘지는 말하지 않았어. 다만, 서울 근교의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어떤 예술인 마을 같은 곳이라고 했던 것 같아. 폐교나 공장을 리모델링해서 작업실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면서, 자신도 그런 곳에서 봉사활동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었지.”

노부인의 말은 강민의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폐교, 공장 리모델링, 예술인 마을, 봉사활동. 파편 같았던 단어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강민은 지난 몇 년간 수없이 조사했던 자료들을 떠올렸다. 폐교를 활용한 문화센터, 예술촌 조성 사업, 은둔형 예술가들의 공동체… 수많은 후보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그때는 ‘지수’라는 키워드에만 집중했을까. 그녀의 꿈, 그녀의 열정을 놓치고 있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그때, 노부인이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더니 낡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책갈피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얇고 오래된 종이 재질의 책갈피에는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뒷면에는 희미하게 연필로 쓴 글씨가 남아있었다.

“이건… 그 아이가 두고 간 거야. 책을 다 읽고 돌려줄 때, 깜빡 잊었는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더군.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걸 가져다줄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네.”

강민은 떨리는 손으로 책갈피를 받아 들었다. 앞면에는 지수가 어릴 적 즐겨 그렸던, 조금은 서툰 필치의 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익숙한 듯 낯선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별빛마루 예술인 마을. 자원봉사자 모집. (경기 외곽)’

그리고 그 아래, 작은 숫자들이 전화번호처럼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강민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별빛마루 예술인 마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경기 외곽’이라는 지명과 ‘자원봉사자 모집’이라는 문구는 노부인이 이야기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책갈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뜨거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72개의 밤낮, 수많은 좌절과 희망이 교차했던 시간들. 그 모든 여정이 바로 이 작은 책갈피 하나를 찾기 위한 것이었을까. 노부인의 온화한 눈빛과 마주친 강민은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노부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날의 사랑은 소중한 법이지. 부디 그 아이를 찾아 행복해지렴.”

강민은 책방 문을 나서며, 다시 한번 골목을 바라보았다. 낡은 간판, 빛바랜 건물들. 하지만 이제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쓸쓸함이 아닌, 새로운 희망의 빛이 보였다. ‘별빛마루 예술인 마을’. 지수가 그곳에 있을지, 아니면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났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확신, 그녀가 남긴 온기가 담긴 책갈피가 그를 다음 목적지로 이끌었다.

그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자 엔진 소리가 고요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강민은 내비게이션에 ‘별빛마루 예술인 마을’을 입력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끓어오르는 기대감.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그는 핸들을 꽉 잡았다. 차는 낡은 골목을 빠져나와, 지수를 향한 그의 뜨거운 집념처럼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수, 정말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72번째 에피소드의 끝에서, 강민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