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254화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는 자신만의 숨소리를 내뱉었다. 높은 건물들의 불빛은 마치 밤하늘에 흩뿌려진 또 다른 별 무리 같았지만, 지은의 창문 밖 실제 하늘은 짙고 무거웠다. 그마저도 희뿌연 먼지 탓에 별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그녀는 낡은 라디오의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지직거리는 소음 사이로 익숙한 주파수가 잡히자,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의 DJ였다.

“…오늘 밤은 유난히 어둠이 짙네요. 여러분의 밤하늘은 어떤가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는 별들을 마주하고 계신가요? 혹은 저처럼 이 도시의 빛 공해 속에서, 마음속으로만 그 별들을 그리고 계신가요?”

지은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손에 쥔 차가운 머그컵에서 김이 피어올랐지만, 마음속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서른 줄에 접어든 그녀의 삶은, 겉으로 보기엔 제법 평온했다. 안정적인 직장, 혼자 살기에 충분한 아파트. 하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깊은 밤의 공허함은, 그 모든 평온을 위협하는 균열 같았다.

DJ의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법이라고 하죠.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아요. 힘든 시간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내면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첫 곡은, 그런 의미를 담은 노래입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작은 등대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밤하늘의 등대’ 들려드립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는 잔잔하면서도 애틋했다. 피아노 선율이 고요한 공간을 채우고, 이어진 보컬은 오래된 꿈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지은은 눈을 감았다. 음악이 그녀를 아주 먼 옛날의 여름밤으로 데려갔다. 풀벌레 소리가 자장가 같던,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던 그 밤으로.

그 여름밤의 약속

“지은아, 저거 봐! 진짜 많다!”

어린 현우의 목소리는 별똥별처럼 맑게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시골 외갓집 마당 평상에 나란히 누워 올려다본 하늘은, 서울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은하수는 흰 강물처럼 흘렀다.

“응, 우리 평생 이렇게 별 보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현우는 고개를 돌려 지은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도 별빛이 담겨 반짝였다.

“나중에 우리 둘이 멋진 별장을 지어서 살자. 낮에는 글 쓰고, 밤에는 저 별들을 연구하는 거야! 어때?”

“좋아! 그럼 난 멋진 그림을 그릴게. 저 별들을 다 담아서!”

그들은 밤늦도록 별을 보며 꿈을 꾸었다. 어떤 별에 가면 우주선이 있을지, 어떤 별에 외계인이 살고 있을지 상상하며 깔깔거렸다. 그리고 한밤중, 문득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외갓집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오던 부엌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는, 그때도 이 프로그램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밤하늘 어딘가에 우리의 마음이 닿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보내보세요. 라디오 전파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주를 떠돈다고 하죠. 우리의 염원도 그럴 거예요.”

어린 현우가 말했다. “지은아, 나중에 우리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서로 못 만나게 되면, 이 라디오를 듣자. 이 프로그램에서 우리만의 신호곡이 나오면, 그때 서로를 떠올리는 거야. 다시 만날 약속 같은 걸로! 어때?”

“응! 그럼 어떤 노래로 할까?”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는, 아이들의 귀에도 유독 아름답게 들렸다. 별에 대한, 희망에 대한 노래였다.
“저 노래! 저 노래를 우리의 신호곡으로 하자!” 현우가 외쳤다.
“좋아! 그럼 우리 나중에 어른 돼서 혹시라도 연락이 끊기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서로를 기억하는 거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꼬마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이었다. 덧없는 맹세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그때 그들에게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다.

별이 보이지 않는 밤

현실로 돌아온 지은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현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갔고, 그 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처음 몇 년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업과 새로운 환경에 휩쓸려 점차 연락이 끊겼다. 이제는 그의 얼굴조차 희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와 함께 보았던 별들도, 그 여름밤의 약속도, 도시의 뿌연 공기처럼 잊혀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매일 밤 듣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늘 그 기억의 끈을 놓지 않게 했다. 가끔 우연히 ‘밤하늘의 등대’ 같은 노래를 들을 때면,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현우와의 약속이 떠올라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그 노래는 자신들만의 ‘신호곡’은 아니었지만, 그 밤의 공기, 그 시절의 순수함, 그리고 이루지 못한 꿈을 떠올리게 했다. 혹시, 현우도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까? 어딘가에서, 같은 노래를 들으며 그 여름밤을 기억하고 있을까? 혹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잊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지은은 창밖을 바라봤다. 여전히 별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꿈은 무모했고, 그 약속은 너무나 순수했다. 어른이 된 지금, 별장을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는 삶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현실의 무게는 꿈의 날개를 꺾었고, 팍팍한 일상은 가끔 숨조차 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음악이 끝나고, DJ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밤하늘의 등대’ 잘 들으셨나요? 노래가 끝났지만, 저는 여러분의 마음속 등대가 여전히 빛나기를 바랍니다. 어릴 적 꾸었던 꿈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약속했던 미래들. 우리는 종종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것들을 잊고 살아가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 꿈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거라고요. 마치 저 멀리 있는 별빛이 수억 년의 시간을 거쳐 우리에게 닿는 것처럼, 우리의 소중한 기억과 꿈도 언젠가 다시 빛을 발할 거예요.”

DJ의 말이 지은의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정말 그럴까?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낡은 수첩을 꺼냈다. 현우에게 편지를 썼던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의 이사 갔던 집 주소와 오래된 연락처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유효하지 않을 주소와 번호였다.

지은은 펜을 들었다. 그리고 수첩의 빈 페이지에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 혹은 현우에게 보내는, 닿지 않을지도 모르는 ‘라디오 전파’ 같은 메시지였다.

‘현우야, 기억하니? 우리 그때 약속했던 거. 별장 짓고 별 보면서 살자던 꿈.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그 별들이 빛나고 있어. 비록 지금은 서울의 밤하늘에서 별 하나 찾기 힘들지만, 가끔 이렇게 라디오에서 우리의 신호곡 같은 노래가 나오면, 너도 어딘가에서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더 빛난다더라.’

펜을 내려놓은 지은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아까와 다르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등대 하나가 환하게 켜진 듯했다. 라디오에서는 다음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잔잔한 멜로디가 다시 한번 밤의 고요를 어루만졌다. 비록 눈에 보이는 별은 없었지만, 지은은 이제 마음속에서 반짝이는 자신만의 별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현우의 별도 함께 빛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밤하늘의 라디오처럼 계속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