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그림자의 뒤편
김현우의 사무실은 늦은 밤에도 불이 환했다. 책상 위에는 빛바랜 사진과 수많은 인물들의 얼굴이 박힌 수사 파일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지난 몇 달간의 추적은 그를 더욱 깊은 미로 속으로 밀어 넣는 듯했다. 새로운 단서라 여겼던 희망의 끈은 번번이 썩은 동아줄처럼 끊어져 버렸다. 서연의 흔적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 같았다.
“팀장님,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얼굴이 흙빛이에요.”
배수진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동안 현우가 겪어온 좌절과 피로가 그대로 묻어나는 듯했다. 현우는 고개를 저으며 차를 받아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다시 서류 더미 속으로 시선을 박았다.
“아니, 뭔가 놓친 게 분명해.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그는 서연의 오래된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 안에는 그녀의 손때 묻은 그림들이 빼곡했다. 풋풋했던 대학 시절의 풍경, 골목길 고양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추상화들. 현우는 한 장 한 장 넘기다 문득 시선이 멈췄다. 페이지 귀퉁이에 끼워져 있던 작고 낡은 사진 한 장. 몇 년 전 서연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서연은 아이들 여럿과 함께 벽화를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었다. 벽화는 기괴하면서도 따뜻한 색감으로 가득한 숲속 풍경이었다. 자세히 보니 벽화 아래쪽,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진 글자가 새겨진 작은 명판이 보였다. 현우는 돋보기를 꺼내 들고 사진을 확대했다.
“‘늘봄 아이들 미술원’….”
수진이 옆에서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난 수년간 수많은 자료를 뒤졌지만, 이 미술원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접한 적이 없었다. 희미한, 그러나 새로운 실마리가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희미한 목격자
다음 날 아침 일찍, 현우와 수진은 ‘늘봄 아이들 미술원’을 찾아 나섰다. 오래된 도심 한편, 허름한 골목길에 자리한 낡은 건물이었다. 간판은 거의 다 지워져 있었지만, 건물 외벽에는 여전히 밝은 색감의 그림들이 남아 있어 이곳이 아이들의 공간이었음을 짐작게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물감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인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누구세요?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네.”
안쪽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파 한 분이 걸어 나왔다. 허리가 굽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이곳의 원장님, 이정옥 여사였다. 현우는 명함을 건네며 조심스럽게 서연의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 아이를 기억하시나요?”
노파는 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주름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어머, 서연이 아니니? 한참 만에 보는구나. 물론 기억하지. 우리 아이들한테 천사 같았던 선생님이었어.”
현우의 가슴속에서 먹먹함과 희망이 뒤섞인 파도가 일었다. 드디어, 드디어 서연의 자취를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시간의 흔적
이정옥 원장님은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소파로 현우와 수진을 안내했다. 따뜻한 보리차를 내어주며 그녀는 서연에 대한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서연이는 그림을 참 잘 그렸어. 그리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지. 여기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같이 벽화도 그리고… 한 1년 넘게 자원봉사를 했어.”
현우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서연은 실종되기 몇 년 전,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과 소통했을지, 현우는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특히 민준이라는 아이랑 유독 친했지. 민준이는 부모님 이혼하고 갈 곳 없어서 여기 오는 아이였는데, 서연이가 참 많이 아꼈어. 말도 없고 그림으로만 자기 마음을 표현하던 아이였는데, 서연이 덕분에 많이 밝아졌지.”
민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현우는 재빨리 메모했다. 서연의 흔적을 쫓는 긴 여정에서 이렇게 구체적인 이름을 듣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다가 서연이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더구나.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건 아니었는데, 뭔가 급한 일이 생겼던 것 같았어. 그래도 떠나기 전에 민준이한테 직접 만든 스케치북을 선물로 주면서, ‘너의 꿈을 여기에 다 담으라’고 하더라고.”
원장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현우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녀가 떠나기 직전의 모습. 현우는 실종 전 서연의 모습을 수없이 되감기 했지만, 이런 모습은 전혀 알지 못했다.
되살아나는 조각
“그럼 민준이라는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민준이도 얼마 안 있어서 이곳을 떠났어. 가끔 소식은 들었지.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예술고등학교에 갔다는 얘기도 들었고, 나중엔 힘들어도 그림을 놓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나도 모르겠구나.”
현우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또 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가 싶었다. 하지만 원장님의 다음 말은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아, 그런데 서연이가 떠나기 전에 딱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해변가 낡은 시계탑’이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곳이라고.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어. 그리고 민준이가 거기 근처에 있는 작은 미술용품 가게를 자주 들렀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해변가 낡은 시계탑’. 이정옥 원장님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그 단어는 현우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서연이 평소 자주 하던 이야기, 어쩌면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일지도 모른다. 민준이와 그 미술용품 가게까지, 새로운 퍼즐 조각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시간 침전되어 있던 희망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끝나지 않는 길
이정옥 원장님께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미술원을 나선 현우는 바닷바람이 실려 오는 방향을 가늠했다. 해변가 낡은 시계탑. 전국에 시계탑은 많지만, 바닷가 근처의 낡은 시계탑이라면 특정 지역으로 압축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곳 근처의 미술용품 가게. 민준이,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서연의 마지막 메시지가 담긴 스케치북.
“수진아, 오늘 밤새도록 전국에 있는 ‘해변가 낡은 시계탑’을 찾아보자.”
현우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 대신 뜨거운 열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컴퓨터를 켜고 검색을 시작했다. 현우의 눈은 이미 저 멀리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갈매기 소리,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서연의 흔적을 향해. 263화의 밤은 다시 시작되는 여정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그의 첫사랑을 찾는 길은 여전히 멀고 험했지만, 현우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를 찾기 전까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