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74화

고요가 깃든 밤이었다. 창밖으로는 늦은 시간에도 잠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그 위로는 아득하게 멀어진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현은 익숙한 듯 작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지직거리는 잡음을 뚫고 이내 차분하고도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안녕하세요, DJ 지혜입니다.”

밤마다 찾아오는 이 목소리는 수현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오늘 하루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항구 같았다. 그녀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차 한 잔이 식어가는 줄도 모른 채, 오로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들이 잘 보이는 밤이네요. 이런 밤에는 왠지 모르게 오래된 기억들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반짝이는 별처럼, 혹은 저 멀리 사라져버린 별똥별처럼 간직하고 있는 추억이 있나요?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저에게 보내주세요.”

지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익명의 청취자 분께서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DJ 지혜님, 안녕하세요. 저는 매일 밤 당신의 라디오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오늘은 문득, 예전의 제가 얼마나 작고 여렸는지 깨달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뒤, 모든 세상이 잿빛으로 변하는 줄 알았죠. 그 사람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가끔은 그 기억이 저를 다시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 마음을 당신의 라디오에 살며시 내려놓아 봅니다…’”

그 사연이 수현의 귓가에 닿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도 아픈 이야기. 지혜의 목소리가 멈추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수현의 눈앞에 흐릿하게 잊혀졌던 얼굴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래된 별빛 아래서

그는 예준이었다. 함께 듣던 음악, 함께 거닐던 밤거리, 함께 바라보던 하늘. 수현은 눈을 감았다. 시간은 5년 전의 어느 여름밤으로 되감겼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밤, 두 사람은 옥상 평상에 나란히 누워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덜한 교외의 옥상이라 별들이 쏟아질 듯 빼곡했다.

“봐, 수현아. 저 별들 봐. 저마다 자기만의 빛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눈엔 다 같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잖아.”
예준은 수현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나지막하고 따뜻했다.
“응, 정말 예쁘다.”
수현은 예준의 어깨에 기댔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또렷하게 느껴졌다.

“우리도 저 별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다가, 언젠가 이렇게 같이 있으면 더 밝게 빛날 수 있을까?”
예준의 물음에 수현은 웃었다.
“그럼, 우리는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는걸. 예준이 너는 나에게 제일 밝은 별이야.”
그의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별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온도, 그때의 손길까지도 수현의 온몸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들의 사랑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다.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빛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빛은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버렸다. 예준은 그해 가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수현의 곁을 떠났다. 수현의 세상은 한순간에 모든 빛을 잃었고, 그녀는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헤맸다. 밤하늘의 별들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저 차갑고 먼 존재들로만 보일 뿐이었다.

음악이 끝나고 지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수현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소파를 적시고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기억은 여전히 그녀를 아프게 붙잡고 있었다. 익명 청취자의 사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 같았다.

“정말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은 때로는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기도 하죠. 어쩌면 그게 바로 사랑의 그림자이자 빛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그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가지만, 그 기억이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혜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마음속에 새겨진 사랑의 기억은 영원히 빛날 거예요.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말이죠. 사라진 별처럼 보이지만, 그 빛은 여전히 우리에게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요.”

수현은 흐느낌을 멈추고 지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라진 별처럼 보이지만, 그 빛은 여전히 우리에게 도달하고 있는 것처럼.’ 그 문장이 수현의 마음속에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예준은 사라졌지만, 그와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슬픔 속에 가두는 것만이 아니라, 그녀를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의 별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예준의 부재를 상징하는 것 같아 외롭고 아팠던 별들이, 이제는 예준이 남긴 사랑의 빛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라디오를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빛을 내뿜는 라디오 다이얼이 마치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피어나는 희망의 불씨 같았다.

지혜는 다음 곡을 소개했다. 잔잔한 멜로디가 다시 방안을 채웠다. 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어버린 차를 다시 데웠다. 마음속의 아픔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짓누르지 않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처럼, 예준과의 추억은 이제 그녀의 어둠을 밝혀주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계속해서 깊어가는 밤을 수놓았다. 그리고 수현은 그 라디오의 속삭임 속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만의 빛을 다시 찾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일 테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라디오 속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