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오래된 탁상 스탠드의 불빛만이 지우의 세계를 밝히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새며 할머니, 혜원 씨의 낡은 일기장을 읽어 내려갔던 탓에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낡은 종이의 질감과 먹먹한 과거의 이야기는 그녀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지난 밤 발견한 한 장의 사진, 그리고 그 아래 쓰여 있던 짧은 문장이 지우의 마음속에 거대한 파문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이제 남은 페이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치 길고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것처럼, 미지의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잊힌 숨결, 미완의 꿈
지우는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마지막 몇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한 장, 또 한 장. 할머니의 붓글씨는 더 이상 우아하지 않았다. 어딘가 애조 띤 듯, 서두르는 듯한 필체는 그녀의 마지막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지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낡은 종이 위에 흐릿하게 번진 잉크 자국, 그리고 1968년 가을이라는 날짜. 다른 장들과 달리 그 부분은 유독 여러 번 읽힌 흔적이 역력했다. 할머니가 수없이 매만졌을 그 페이지에서, 지우는 혜원 씨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림. 내 평생의 숙원이자 고통이었던 너. 이제 너를 놓아줄 때가 왔구나. 내 손으로 붓을 꺾는 심정이 이리도 아릴 줄이야. 너를 붙잡으면 사랑하는 이들을 놓치고, 너를 놓으면 내가 부서지는구나.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들, 이리 괴롭지는 않았을 것을. 나의 미완의 꿈이여, 나의 잊힌 숨결이여… 너를 이 집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모르는 그림자 속에 묻으리라. 언젠가, 먼 훗날, 나를 기억하는 이가 너를 찾아주길. 그저 찰나의 순간이라도 너의 색을 바라봐 주길… 낡은 창고, 뒤뜰의 늙은 감나무가 보이는 자리. 그 아래…”
글은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잉크가 짙게 번진 흔적은 마치 할머니의 눈물이 마른 자국 같았다. 지우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에게 그림이 있었다니. 그녀가 알던 혜원 씨는 언제나 자애롭고, 조용히 가족을 보살피는 분이었다. 가끔 먼 산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지만, 그 이유를 감히 물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 시선 끝에는 이루지 못한 꿈, 포기해야 했던 열정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오래된 창고의 비밀
새벽녘,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지우는 일기장을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친 몸이었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녀를 이끌었다. 할머니의 글귀가 가리키는 곳, 낡은 창고. 오래도록 쓰이지 않아 거미줄이 자욱하고 먼지 냄새가 가득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는 그 그림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으면서도 왜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을까. 어떤 사연이 그녀의 붓을 꺾게 만들었을까. 지우는 궁금증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뒤뜰로 통하는 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아직 차가웠지만, 오래된 나무와 흙냄새가 섞인 신선한 공기는 지우의 정신을 맑게 했다. 낡은 창고는 예상대로였다. 뒤뜰 한쪽에 묵묵히 서 있는 창고는 마치 오랜 세월의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삐걱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습하고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 쌓인 농기구들과 낡은 살림살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뒤뜰의 늙은 감나무가 보이는 자리. 그 아래…” 창고 안에서 뒤뜰의 감나무가 보이는 곳. 지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창고의 벽에는 작은 틈이 있거나, 혹은 창문이 있었을 법한 흔적이 있었다. 낡은 널빤지로 막아놓은 한쪽 벽에 시선이 닿았다. 그곳은 다른 벽들과는 조금 달랐다. 널빤지의 색이 더 바래있었고, 어딘가 인위적으로 막아놓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먼지 속에서 피어난 색
지우는 널빤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새로 손을 넣어보니, 안쪽에 빈 공간이 느껴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지우는 낡은 농기구들 틈에서 녹슨 쇠막대기를 찾아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필사적으로 널빤지를 뜯어냈다. 나무가 삐걱이는 소리가 창고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낡은 못이 빠져나가고, 드디어 벽이 열렸다.
안쪽에는 기대했던 대로,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의 가장 안쪽, 먼지에 싸여 흐릿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지우의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꺼내자, 얇은 천으로 정성껏 싸여 있는 직사각형의 물체였다. 오랜 세월의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천을 벗겨냈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빛바랜 캔버스 위에는 한 폭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들판, 그 너머로 낮게 깔린 산봉우리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 그림 속 들판의 한쪽에는 작은 오두막이 정겹게 서 있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온화한 색감이었지만, 그 속에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마치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그림 한쪽 귀퉁이에는 할머니의 이름 ‘혜원’이라는 두 글자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주 작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미완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완성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림 속의 그림자
지우는 그림을 든 채 주저앉았다. 손끝으로 캔버스의 거친 표면을 어루만졌다. 할머니의 붓질, 할머니의 색채, 할머니의 꿈. 이 그림 속에는 그녀가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또 다른 세상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이 그림은 할머니가 세상에 보이고 싶었던 진짜 ‘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혹은 가족을 위한 헌신 때문에, 그녀는 이 그림을 깊은 곳에 묻어야만 했다.
갑자기 그림 속 오두막집에서 시선이 멈췄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본 듯한, 혹은 꿈에서라도 마주친 듯한 기시감. 지우는 그림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오두막 옆에는 조그마한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는 가지가 늘어진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작은 돌멩이. 그 돌멩이 옆에는….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함께 끼워져 있던, 빛바랜 사진 속의 풍경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사진 속에는 젊은 할머니와 한 남자가 그림 속 오두막 앞에서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손에는, 작은 그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설마, 이 그림이…
지우의 머릿속에 혼란이 휘몰아쳤다. 할머니의 일기장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의 핵심에 이 미완의 그림이 놓여 있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잃어버린 사랑, 혹은 영원히 묻어두려 했던 과거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지우는 그림을 품에 안았다. 할머니의 체온이 전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할머니, 이 그림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 그림 속 오두막은 어디인가요? 지우는 결심했다. 이 그림이 가리키는 곳으로, 할머니의 잃어버린 꿈의 흔적을 찾아 떠나야겠다고. 이 그림이 완성되지 않은 할머니의 마지막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부터 지우의 손으로 완성될 할머니와의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창고 밖으로 나온 지우의 얼굴에 새벽 햇살이 따스하게 쏟아졌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이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