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266화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문장이 하윤의 심장 가장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창밖으로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고, 굵어진 눈발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수십 번도 더 매만졌던 오래된 약속 증서처럼, 그 문장은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지표였다. 하지만 오늘, 그 지표가 흔들리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처럼, 그녀의 희망도 서서히 증발하는 듯했다.

“보고 싶었어.”

문이 열리고 지혁이 들어섰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하윤은 그 안에 깃든 감정의 파동을 읽어낼 수 있었다. 며칠 밤낮을 새운 듯 초췌한 얼굴, 깊어진 눈가의 그림자,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굳게 다물어진 입술. 하윤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오랜 기다림과 사무치는 그리움, 그리고 감출 수 없는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이제야 온 거야?”

하윤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은 걱정이었다. 지혁은 하윤에게 한 걸음 다가서더니,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하윤은 그제야 그의 몸속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듯한 절망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지혁은 그렇게 말하며 하윤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의 입술은 싸늘했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하윤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공기에 싸여 돌아온 지혁의 몸에서 바깥의 한기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를 감싸는 포근한 스웨터조차 그의 차가움을 녹이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줘. 왜 그렇게 지쳐 있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또 무슨 짓을 벌인 거야?”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지혁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을 통해 그의 억눌린 감정을 읽으려 애썼다. 지혁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자기 품에서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 하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방법이 없었어.”

지혁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윤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가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짐작했다. 아니,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서로의 손을 맞잡고 맹세했던 그 약속이, 오늘 이 차가운 밤에 산산이 조각날 것만 같았다.

“우리가 그동안 지켜왔던 모든 것들을 지키려면… 더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

지혁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하윤을 피한 채,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눈송이 하나하나에 자신의 고통을 실어 보내려는 듯했다.

“네가 우리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나는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어. 하지만 그들은… 너무 강력했어.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어. 우리가 버틸 수 있는 한계점에 다다랐다고.”

지혁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은 이미 핏발이 서 있었다. 하윤은 그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쌓아 올린 ‘세계’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지혁과 함께, 오직 두 사람만의 힘으로, 그 어떤 어둠도 침범할 수 없는 곳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

“무슨 말이야? 설마… 그들과 손을 잡았다는 거야?”

하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지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하윤의 세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겨울 눈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났던 그녀의 꿈과 희망이 차가운 바닥에 나뒹구는 파편이 되어 버렸다.

“말도 안 돼! 우리는 약속했잖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의 손을 잡지 않겠다고! 그들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고!”

하윤은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와 슬픔으로 떨렸다. 지혁은 고개를 들고 그런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도 알아, 하윤아. 그 약속… 나도 잊은 적 없어. 매 순간 너와의 약속을 떠올렸어. 하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

지혁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를 들어 올렸다. 얇은 봉투였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무게가 담겨 있는 듯했다. 지혁은 봉투를 열어 서류 한 장을 하윤에게 내밀었다. 하윤의 시선은 서류의 내용을 훑었다.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토록 경계하던 ‘그들’과의 계약서였다. 지혁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계약서였다.

“이게 뭐야… 지혁아… 이건….”

하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지혁에게 막대한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요구의 끝에는 지혁 자신의 자유와, 어쩌면 그들의 ‘세계’ 자체를 바치는 듯한 조항들이 있었다. 하윤의 손에서 서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차가운 바닥에 떨어진 서류는 그녀의 마음처럼 구겨졌다.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건… 우리의 ‘세계’를 그들의 통제 아래 두는 거야. 하지만 나는… 나는 다른 조건을 걸었어. 그들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너와 ‘세계’의 핵심은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도록….”

지혁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하윤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깊은 절망과 함께, 그녀를 향한 변치 않는 사랑과 헌신이 담겨 있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지, 하윤은 그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당했다는 거야?”

하윤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차가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상처투성이 마음을 적셨다. 하윤은 그가 얼마나 홀로 외로이 싸워왔는지를 알았다. 그녀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거대한 그림자가, 지혁의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녀 앞에 드러난 것이다.

“우리의 꿈은… 우리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윤은 지혁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웠던 그의 손은 이제 그녀의 온기를 통해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지혁은 하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여전히 희망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절망이라는 짙은 연기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불꽃은 여전히 존재했다.

“우리의 꿈은… 여전히 여기에 있어. 우리의 약속은… 더욱 단단해질 거야.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니야. 비록 그들의 손을 빌렸지만… 이것 또한 우리의 ‘세계’를 지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어 줘. 나는… 너를, 그리고 우리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아.”

창밖의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흰 눈송이들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하윤은 지혁의 품에 안겼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울렸다. 차가웠던 그의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혁의 어깨에 기댄 채, 하윤은 생각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깨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 약속을 지키는 방식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을 뿐이었다. 더 위험하고, 더 고통스럽고, 더 거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형태로 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게 정확히 뭐야? 네가 치러야 할 대가는… 뭐야?”

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가 사라진 자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피어났다. 지혁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할 때였다. 그가 감당해야 할 진정한 무게를, 함께 짊어져야 할 때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그림자’가 되어주기를 원해. 어둠 속에서… 그들의 일을 처리하는 존재가 되기를.”

지혁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하윤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그림자’. 그것은 그들이 가장 경멸하고 피하고 싶었던 존재의 이름이었다. 지혁은 그녀의 품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밤새도록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꽃들이 세상을 뒤덮는 밤, 그들의 약속은 새로운 시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