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밤이었다. 지우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무릎에 올려두고 있었다. 일기장의 닳아빠진 표지를 만질 때마다, 세월의 무게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요즘 들어, 그녀는 마치 거대한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회사에서는 중요한 프로젝트가 삐걱거리고 있었고, 집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소원해진 남편과의 관계가 그녀를 짓눌렀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희미하게 느껴졌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그녀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세월이 흐르며 바스러질 것 같은 종이 냄새는 늘 따뜻하고 포근했다. 오늘 펼친 페이지는 유난히 낡아 있었다.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얇아져 글자들이 희미해진 부분이 많았다. 지우는 조심스럽게 그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날짜는 1957년 겨울, 지우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어느 날이었다.
1957년 겨울,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오늘은 유난히 눈발이 거셌다. 마당에 쌓인 눈은 어린아이의 키만큼이나 높았고, 찬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방 안은 아궁이의 불씨마저 힘을 잃어 서늘했다. 동상에 걸린 내 발은 감각조차 없었다. 이불 속에 웅크려 누운 순덕이의 작은 기침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울 때마다 내 심장은 얼어붙는 듯 아파왔다.”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순덕이는 그녀의 어머니, 즉 할머니의 첫딸이자 지우에게는 엄마였다. 어릴 적 엄마에게서 들었던, ‘할머니가 나를 얼마나 고생해서 키우셨는지’ 하는 막연한 이야기가 갑자기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서방님은 읍내 장터에서 하루 종일 나무를 팔았지만, 오늘은 한 푼도 벌어오지 못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지갑을 닫고, 우리 집 찬장은 텅 비어갔다. 며칠째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순덕이의 야윈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며 왔다. 그 작은 아이의 볼은 생기를 잃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글자들은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우는 할머니가 이 글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했다. 어린 딸의 생사가 걸린 절박한 상황.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속수무책인 현실 앞에서 할머니는 얼마나 무력했을까?
“어젯밤, 서방님과 나는 밤새도록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촛불마저 희미하게 깜빡이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방님,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순덕이를 살려야 해요.’ 서방님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거친 손이 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의 목소리도, 그의 눈물도, 그 밤의 모든 것이 시리고 아팠다.”
일기장의 다음 장은 거의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글자들이 희미해져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지우는 간신히 몇몇 단어를 읽을 수 있었다. ‘읍내’, ‘부잣집’, ‘데려가다’, ‘보내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할머니가…?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나는 순덕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어제 밤새도록 매만졌던 비단 저고리를 입히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겨주었다. 순덕이는 엄마 품이 좋다고 칭얼거리며 잠투정을 했다. 나는 그 작은 아이의 얼굴에 차마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읍내 가는 길은 멀고, 발은 시렸다. 내 품에 안긴 아이는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천진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 아이의 볼에 흐르는 나의 눈물이 뜨거웠다.”
지우는 자신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는, 그 극한의 상황에서,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다음 페이지는,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잉크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간신히 한 문장을 더 읽을 수 있었다.
“읍내 부잣집 대문 앞에서, 나는 순덕이를 내려놓았다. 그 집 마님은 인자한 얼굴이었지만, 나의 눈에는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순덕이는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내가 돌아설 때까지도 낯선 마님 품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 어디 가?’ 그 작은 목소리가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뒤돌아 뛰쳐나오는 길,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었다. 하늘에는 또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 내게로 쏟아지는 듯했다.”
지우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일기장은 거기서 멈춘 듯,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은 차마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어린 딸을 잠시 다른 집에 보냈던 것이었다. 살리기 위해서. 그 처절한 모성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어릴 적 잠시 다른 집에서 보낸 적이 있다는 희미한 기억은 있었지만, 그것이 이토록 가슴 시린 이야기였을 줄이야.
할머니는 순덕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놓아야만 했다. 그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할머니는 다시 일어서서 서방님과 함께 순덕이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온갖 역경을 이겨냈을 것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훗날 할머니는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 않고, 몇 년 뒤 기어코 순덕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는 것을.
일기장을 덮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이제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희망의 증거였다.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던 한 여인의 숭고한 기록이었다.
지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는 그쳤고,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불안감들이 서서히 걷히는 듯했다. 그녀의 할머니가 그토록 깊은 고통 속에서도 빛을 찾아냈다면, 자신도 해낼 수 있을 터였다. 회사 프로젝트의 난관도, 남편과의 소원함도, 결국은 풀어야 할 숙제이자, 그녀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 퍼즐 조각일 뿐이었다.
지우는 차갑게 식은 손을 모았다. 할머니의 강인함과 사랑이 그녀의 심장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낡은 일기장은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은 길을 찾고,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해가 뜰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