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봄볕이 마루 끝까지 길게 드리워진 오후였다. 지우는 앞마당 작은 텃밭에서 돋아난 어린 순들을 조심스레 돌보고 있었다.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이 뒤섞여 코끝을 간지럽혔고, 살랑이는 바람은 나른하면서도 희망적인 기운을 실어 날랐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지우의 마음 한구석에는 잊었던 듯 잠들어 있던 그리움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조차 아련한 추억의 메아리처럼 들리는 계절.
“후우…”
지우는 작게 한숨을 쉬며 허리를 폈다. 저 멀리 개울가에 드리워진 오래된 버드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잊으려 애썼던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바람결에 실려 흩뿌려지듯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개울가에서 늘 햇살처럼 웃던 은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뛰어놀던 기억들.
그날도 이렇게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이제 막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버드나무 아래에서, 은지는 까르르 웃으며 풀밭을 뛰어다녔다. 그녀의 작고 야무진 입술은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중에서도 엄마가 가끔 불러주시던 자장가를 가장 좋아했다. 지우는 아직도 그 노랫가락의 첫 소절을 생생히 기억했다. ‘별이 총총, 달빛 고요히…’
갑자기, 바람이 한층 더 거세게 불어왔다. 그 바람에 실려온 것은 단순히 꽃향기나 흙냄새만이 아니었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귀에 익은 선율이 섞여 들려왔다. ‘별이 총총, 달빛 고요히…’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착각일까?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청일까? 아니,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바로 곁에서 누가 속삭이는 듯, 그 어린 시절의 자장가가 바람을 타고 흘러오는 것이었다.
지우는 들고 있던 작은 삽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어귀, 오래된 회관 쪽이었다. 봄을 맞아 마을 축제를 준비하는지, 회관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설마, 그곳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온 것일까?
회관 문을 열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작은 노랫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무대 위에서 재롱잔치를 연습하는 듯한 아이들 무리 중에, 한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은지가 사라질 무렵의 나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은지의 그것처럼 맑고 고왔다.
지우는 홀린 듯 아이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가… 그 노래, 어디서 배웠니?”
아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지우를 올려다보았다.
“할머니가 알려주셨어요! 할머니가 어릴 때, 자기 언니가 불러주던 특별한 노래래요.”
언니… 할머니… 특별한 노래… 모든 단어들이 지우의 심장을 후벼 파는 듯했다. 지우는 다급하게 아이에게 할머니가 어디 계시는지 물었다. 아이는 회관 한쪽에 앉아 아이들의 연습을 지켜보던 한 할머니를 가리켰다.
지우는 떨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잠시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지우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부르던 자장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 은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은지는 왼쪽 손목에 작은 별 모양의 점이 있었고, 항상 그 노래를 흥얼거렸으며, 7살이 되던 해 봄, 마을 개울가 근처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할머니의 표정은 지우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굳어갔다. 희미하게 떨리던 할머니의 눈빛은 어느새 지우의 눈동자를 깊숙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할머니는 길게 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제게도… 그런 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이 마을로 이사 오기 전…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동생이죠. 그 아이도 왼손목에 별 모양 점이 있었고, 제가 불러주던 그 자장가를 무척 좋아했어요.”
지우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이사? 하지만 은지는 훨씬 오래전에… 지우는 혼란스러웠지만, 할머니의 다음 말에 모든 의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 아이 이름은… 은지였어요. 물론 제가 잃어버린 동생은 저보다 훨씬 어렸으니… 나이대가 많이 다르겠지만요.”
할머니는 말을 흐리며 낡은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두 명의 어린 여자아이가 오래된 버드나무 아래에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는 훨씬 커 보였고,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의 왼쪽 손목 언저리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별 모양의 점이 보였다. 은지였다. 어린 시절, 지우의 눈에 담겨 있던 은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 아이가 제 동생이에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저는 한순간도 희망을 놓지 않았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들었다. 사진 속 은지의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지금의 지우에게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박혀들었다. 할머니의 동생이자, 지우의 동생.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봄바람이 기어이 잊혀졌던 인연의 끈을 다시 이어주려 하는 것일까?
창문 밖에서는 봄바람이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 바람은 꽃잎과 함께 아득한 그리움, 그리고 가슴 저미는 희망의 소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지우는 사진 속 은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은 과연 어떤 미래를 지우에게 가져다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