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84화

고요함 속에 흐르는 시간은 유독 느리게 느껴졌다. 지혜는 낡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은 건반 위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상아빛 건반들. 특히 가운데 ‘솔’ 음은 유난히 힘겹게 눌렸고, 이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이 작은 결함은 지혜의 마음에 굳은살처럼 박혀 있었다. 전문 수리공에게 맡기라는 은호의 말도 무시한 채, 지혜는 지난 몇 주간 틈만 나면 이 건반과 씨름했다. 마치 그 건반 속에 할머니의 숨겨진 마음이라도 갇혀 있는 것처럼, 직접 고쳐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끝이 저릿했다. 덮개를 들어 올리고 복잡한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았다. 먼지 쌓인 펠트와 닳아 해진 해머들이 눈에 들어왔다. ‘솔’ 건반과 연결된 댐퍼를 조심스럽게 분리하려 할 때였다. 얇게 접힌 종이 조각 하나가 보였다. 건반과 건반 사이, 틈새 깊숙이 박혀 있어 수십 년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법한 작은 조각이었다. 지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조심스레 종이를 꺼냈다. 낡고 바랜 그 종이 조각은 분명 손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말린 꽃잎 하나와 함께 할머니의 유려한 필체가 드러났다. 날짜는 지혜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 할머니가 청춘을 보내던 시절로 찍혀 있었다.

“내 사랑, 이 피아노의 노래는 우리의 비밀이오. 이 작은 꽃잎이 시들지 않는 한, 나의 마음 또한 그러할 것이오. 가장 어둡고 긴 밤이 찾아올 때, 비로소 ‘길 잃은 봄’의 선율을 찾아주오. 그 안에 모든 답이 숨어있을 테니.”

‘길 잃은 봄’의 선율? 지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곡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할머니의 낡은 악보집을 수없이 뒤져보았지만, ‘길 잃은 봄’이라는 제목은 없었다. 문득, 오래전 할머니가 흥얼거리던 멜로디가 떠올랐다. 특정 계절에만 연주하셨던, 애틋하고도 쓸쓸한 그 노래. 하지만 그 곡의 이름은 늘 ‘작은 자장가’였다. 할머니는 왜 그 곡을 ‘길 잃은 봄’이라 불렀을까? 아니, 혹시 ‘작은 자장가’가 ‘길 잃은 봄’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할머니의 필체에서 느껴지는 아련한 그리움과 비밀스러운 언어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악보집을 꺼내 뒤적였다. 수십 년 묵은 악보들 사이에서 ‘작은 자장가’라는 제목의 낡은 악보를 발견했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 그녀를 재워주던 그 노래였다. 멜로디는 따뜻했지만, 어딘가 쓸쓸한 여운을 남기는 곡이었다.

그녀는 악보를 피아노 위에 올리고,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렀다.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첫 음을 누르자마자, 과거의 영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지혜는,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은 주름졌지만, 건반 위에서는 나비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 옆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혹은 또 다른 누군가였을까? 기억은 희미했지만, 그 남자의 눈빛은 할머니를 향한 깊은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머니는 그 남자의 눈을 마주하며,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솔’ 건반이 유난히 깊고 먹먹한 소리를 냈던 것 같다.

지혜는 멜로디를 따라 연주를 이어갔다. 할머니의 손길이 닿았던 건반 하나하나에서 과거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솔’ 건반에 손이 닿는 순간, 언제나 삐걱이던 그 건반이 놀랍도록 부드럽게 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혜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길 잃은 봄’의 선율은, 그저 이 ‘작은 자장가’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작은 자장가’를 연주할 때마다, 마지막 몇 소절을 다르게 연주하셨다. 마치 어떤 메시지를 숨기려는 듯, 음 하나하나에 자신만의 감정을 실어 변주를 넣으셨던 것이다. 그 미묘한 차이를, 지혜는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지혜는 악보를 무시하고 기억 속의 멜로디를 따라 마지막 몇 소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변주된 선율은 더욱 애틋하고 아련했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러면서도 희미한 희망을 담고 있는 듯한 멜로디였다. 그리고 그 변주된 선율의 마지막 음이 끝나자마자, 피아노 내부에서 아주 작게,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숨을 죽였다. 피아노 아래쪽, 오래된 서랍장처럼 보이는 부분에서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손바닥만 한 빈 공간이 드러났다. 분명 숨겨진 서랍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지혜는 빈 공간을 더듬었다. 안에는 낡고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꺼내자, 먼지 뽀얀 상자 위에는 ‘사랑하는 나의 지혜에게’라고 쓰인 글씨가 보였다. 할머니의 글씨였다. 지혜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바랜 사진 몇 장과, 두툼한 편지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할머니와, 아까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지혜는 사진을 내려놓고 편지 봉투를 들었다. 봉투는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편지에는 또 어떤 비밀이 담겨 있을까. 지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피아노는 이제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할머니의 삶과 사랑,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긴, 살아있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지혜는 이제 그 기록의 다음 장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