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낡은 가죽 지갑에서 닳아버린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햇살 아래 환하게 웃는 서연의 모습. 그 미소는 여전히 그의 심장을 저미듯 아프게 했다. 279번째의 아침, 그는 또 다른 단서가 이끄는 길을 따라 낯선 도시의 변두리로 향하고 있었다.
최근에 익명으로 받은 한 통의 메시지. 짧고 파편적이었지만, 서연이 한때 자주 드나들던 ‘별책방’이라는 낡은 서점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기나긴 탐정 생활 속에서, 지훈은 이제 이런 작은 실마리조차 놓칠 수 없었다. 지친 육신을 이끌고 굽이진 골목길을 한참 걸었을 때, 겨우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듯한 허름한 간판이었다. 글자 몇 개는 떨어져 나가 있었지만, 희미하게 ‘별책방’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별책방, 시간의 흔적 속으로
철컥,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쿰쿰한 종이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가 지훈을 맞았다. 수많은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히 쌓여 있었고, 좁은 통로를 따라 희미한 햇빛이 가늘게 스며들었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책장 사이를 오가는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서연의 흔적이 담긴 책 한 권이라도 해칠까 염려해서였다.
“누구세요? 어서 오세요.”
안쪽 계산대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리 굽은 노부인이 돋보기를 코에 걸친 채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지훈은 목례를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서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을 기억하시는지요. 오래전 이곳을 자주 찾았을 겁니다. 특히 시집을 좋아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노부인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녀는 잠시 지훈을 훑어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서연이라… 그 이름, 잊을 수 없죠. 유난히 총기 어린 눈빛을 가진 아이였어요.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언제나 조용히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곤 했지. 특히 오래된 시집들을 좋아했지… 강은교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곧잘 창밖을 바라보곤 했어요.”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맞다. 서연은 강은교 시인의 시집을 가장 아꼈었다. 그 시집 속 한 구절을 읊조리며 그에게 기대어 잠들던 그날 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 아이를 아시는군요. 제가… 그 아이의 아주 오랜 친구입니다. 오랫동안 찾고 있었는데… 혹시 아는 것이 있으시다면….”
지훈의 목소리는 떨렸다. 노부인은 계산대에서 나와 지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연민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지훈의 손을 조용히 잡더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숨겨진 이야기, 서연의 그림자
“서연이는 참으로 여린 아이였어요. 이곳에 올 때마다 늘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 어느 날부터는 자주 눈물을 글썽이며 책을 읽곤 했어요.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던 날… 한 겨울이었는데, 아이가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왔어요. 며칠 밤낮을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손은 얼음장 같았죠.”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기억 속 서연은 늘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상처받은 모습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때 서연이가 말했어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못할 것 같다고… 아주 멀리 떠나야 한다고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리고 당신에 대한 이야기도 했었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자신이 사라져야만 모두가 편안해질 거라고 했어요.”
“사라져야만… 편안해진다니요?”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노부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어요. 다만, 그녀의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지시고, 사업이 기울면서 감당하기 힘든 빚이 생겼다고 했죠. 그리고 그 빚이… 단순한 경제적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서연이는 자신의 존재가 당신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홀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 같았어요.”
지훈은 주저앉을 뻔했다. 서연이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혼자 감내하고 있었다니. 자신이 그녀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녀의 고통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그의 가슴을 찢어놓는 듯했다. 그는 오랫동안 서연의 실종을 자신을 버린 행위로 여기며 내심 원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아픔을 알게 되자 모든 오해가 연민과 사랑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길, 희미한 등불
노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낡은 책장 깊숙한 곳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손때 묻은 표지를 넘기자, 한 장의 낡은 메모지가 보였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적은 듯한 글씨체였다.
“서연이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떠나기 전, 이 책 사이에 끼워두고 갔던 거예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당신이라면 알아볼 것 같았지.”
메모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두 줄이 적혀 있었다.
‘힘들 때 찾아갈 곳… 바닷바람 부는 작은 마을, ‘해오름.’
작은 등대 아래, ‘푸른 파도’ 식당.’
지훈은 메모지를 받아 들고는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해오름. 푸른 파도 식당. 그의 가슴속에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금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연이 남긴 마지막 단서. 자신이 찾아야 할 다음 목적지였다.
지훈은 노부인에게 깊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별책방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거운 책임감과 절절한 사랑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동시에 그의 발아래 펼쳐진 길이 더 이상 막막하지 않았다. 서연이 왜 사라졌는지, 그녀가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슬픔을 이해하게 되자, 그녀를 향한 그의 갈망은 더욱 커졌다.
바닷바람 부는 작은 마을, 해오름. 그곳에 서연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지훈은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긴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의 사랑은 한 뼘 더 가까워진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