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관의 깊은 심장부, 먼지 쌓인 암실 저편의 창고는 최 사장에게도 쉬이 발길이 닿지 않는 공간이었다. 허리께까지 쌓인 필름 통과 빛바랜 앨범들, 고장 난 카메라들이 켜켜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채 잠들어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정리 작업은 최 사장의 굽은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지만, 이따금씩 손에 잡히는 추억의 조각들이 그를 과거로 이끌었다. 흐릿한 기억 속 얼굴들과 이름 모를 사연들이 마치 스크린 위 영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런 것이 아직도 있었군.”
가장 구석진 곳, 다른 상자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그의 손에 들렸다. 뚜껑을 여는 순간,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수십 년 세월이 갇혀 있던 공기가 흘러나왔다. 안에는 사진 인화지 견본들이나 오래된 영수증 묶음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내용물을 쏟아내던 최 사장의 눈길이 문득 한 장의 빛바랜 사진에 멈췄다.
그것은 흑백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여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슬픔이 서려 있었지만, 아이를 향한 애정은 분명했다. 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는 여인의 치마폭에 기대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배경이었다. 낡은 간판이 희미하게 보이는 저 건물은 틀림없이 이곳, 자신의 사진관 앞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얼굴은… 너무나도 익숙한, 미영의 어머니, 강현주 씨였다.
최 사장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에 든 사진이 파르르 떨렸다. 강현주 씨라니. 그녀는 미영이 아주 어렸을 때 실종되었고, 그 이후로 어떤 소식도 들리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미영은 줄곧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해왔고, 사진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진을 통해 어머니의 행적을 쫓아왔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대체 언제 찍힌 것이란 말인가?
사진의 뒷면을 조심스럽게 뒤집어 보았다. 연필로 휘갈겨 쓴 날짜가 희미하게 보였다. 최 사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가까이 대어 보았다. ‘19XX년 X월 X일. 현주, 그리고 딸.’ 그 날짜는 미영이 부모님과 헤어진 것으로 알려진 시점보다 훨씬 뒤였다. 미영이 고아원에 보내진 해보다도 몇 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미영의 어머니 강현주 씨는 그 시간까지도 살아있었고, 심지어 미영과 함께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 사진 속 아이는… 미영이었다. 이제는 성인이 된 미영의 어린 시절 모습과 겹쳐지는 순간, 최 사장은 몸을 지탱할 수 없어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미영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실은, 어쩌면 그녀의 발치에 놓여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 진실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최 사장은 숨이 막혔다. 이 사진 한 장이 가져올 파장은 상상 이상일 터였다. 미영의 인생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너무나도 거대한 진실이었다. 강현주 씨는 왜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을까? 그녀는 왜 그 시점까지 미영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결국 미영과 헤어져야만 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사진은 왜 여태껏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고 이 창고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을까?
최 사장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오래된 나무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에 든 사진은 단순한 흑백 인화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겹겹이 쌓인 거짓말의 껍질을 벗겨낼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이 진실을 미영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까? 최 사장은 미영이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겪었던 오랜 슬픔과 상실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이 다른 이유로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미영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는 잠시 사진을 내려놓고 고개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사진관에서 찍힌 사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 아니, 어쩌면 기억에서 지워버렸던 사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강현주 씨는 그날 왜 사진을 찍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까? 그들의 표정에는 불안감과 함께 어딘가로 도피하려는 듯한 절박함이 스며 있었다.
최 사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 강현주 씨의 눈은 마치 최 사장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호소하는 듯했다. 마치 미래에 이 사진을 보게 될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처럼. 그 순간, 사진 속 아이, 어린 미영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빛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눈빛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하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듯했다. 너무나 영롱하고도 슬픈 눈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진은 더 이상 숨겨둘 수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진실일지라도, 미영은 마땅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 어쩌면 이 사진이, 미영의 오랜 방황을 끝낼 유일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최 사장은 결심한 듯 사진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리고 낡은 암실 문을 나서는 순간, 사진관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저 왔어요! 오늘도 손님 많았어요?”
미영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섰지만, 최 사장은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든 흑백 사진은 이제 막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미영은 최 사장이 평소와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이 창백해 보이시는데요?”
최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미영을 향한 애틋함, 그리고 곧 다가올 폭풍에 대한 두려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미영아…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미영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최 사장은 숨을 고르고, 품에 안고 있던 낡은 흑백 사진을 미영에게 내밀었다. 미영의 시선이 사진에 닿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눈빛은 급격히 흔들리더니 이내 공포와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며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 어린 시절의 자신과,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무엇보다 그 날짜와 배경. 미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그녀의 목소리는 곧 깨질 듯한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사진 한 장이 미영의 세상 전부를 뒤흔들고 있었다. 진실은 때로 가장 잔인한 형태로 찾아오는 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