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현우의 발걸음에 따라 낮게 신음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은 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금빛으로 부서졌고, 오래된 서점 특유의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여 희미한 과거의 향취를 풍겼다. 현우는 한참을 벽에 기대어 선 채, 손에 쥔 빛바랜 흑백 사진을 응시했다. 사진 속에는 서연이 갓 스무 살이 된 듯한 앳된 모습으로, 직접 만든 도자기 컵을 들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에 살짝 번진 흙 자국마저도 그에게는 너무나 선명한 기억이었다.
이 작은 서점은 그가 서연의 행적을 쫓아 도착한 수많은 여정의 끝, 혹은 또 다른 시작점이었다. 얼마 전, 그는 서연이 예전에 사용하던 독특한 문양의 도자기 그릇이 이 근방의 작은 공방에서 발견되었다는 희미한 소문을 들었다. 수많은 헛수고와 실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한번 강하게 타올랐다. 그는 며칠 밤낮을 달려 이 외딴 마을에 도착했고, 수소문 끝에 서연이 한때 즐겨 찾았다는 이 헌책방을 찾아냈다.
서점 주인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낡은 책상에 앉아 신문을 읽던 노인은 현우의 인기척에도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사진을 내밀었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이 사진 속 여인을 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노인은 느릿하게 신문을 접고 현우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세월의 더께만큼이나 깊고 알 수 없는 빛을 담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받아들고 한참을 말없이 응시했다. 현우의 심장은 마치 북소리처럼 거세게 울렸다. 296개의 밤낮, 수천 번의 실망, 셀 수 없는 희망의 조각들이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만 같았다.
“음… 이 아가씨라…” 노인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희미했다. “낯이 익군. 오래전, 여기서 책을 읽곤 했지.”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의 그림자가 잡히는 순간이었다. “언제쯤이었을까요? 혹시, 이 아가씨가 도자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그릇들을요…”
노인은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먼 허공을 응시했다. “맞아. 그랬지. 항상 손에 흙 냄새를 묻히고 다녔어. 한 번은 직접 만든 찻잔을 선물로 주기도 했지. 이 작은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꿈 많은 아가씨였어.”
현우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노인의 묘사는 서연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녀의 꿈 많던 모습, 섬세한 손길, 그리고 늘 흙 냄새를 좋아했던 그녀. 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지요? 아니면… 그녀에 대해 더 아는 것이라도…”
노인의 눈빛에 미묘한 슬픔이 스쳤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지. 아무 말도 없이. 떠나기 전날, 이 서점 가장 안쪽에 앉아서 하루 종일 무언가를 쓰던 모습이 마지막이었어.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말이야.”
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사라졌다니. 또다시? 그가 서연을 놓친 것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생생함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작별 인사라니요… 혹시, 남긴 것이라도 있나요?” 현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그는 놓칠세라 노인의 시선을 좇았다.
노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서점 안쪽의 낡은 책장으로 향했다. 가장 구석진 곳, 사람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놓인 두툼한 고서 한 권을 꺼냈다. 책장 속에서 수십 년간 묵혀 있었을 책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어느 페이지에서 멈춰 섰다.
“이거라면, 어쩌면… 그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일지도 몰라.”
노인이 가리킨 곳에는 얇은 종이 한 장이 곱게 접혀 책갈피처럼 끼워져 있었다. 오래된 책의 누런 종이 사이에서, 그 종이 조각은 더욱더 희미하고 연약해 보였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종이를 펼치자, 낯익은 서연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글귀였다. 하지만 그 모든 단어들이 현우의 심장을 후벼 파는 비수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나 따뜻하고 소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스스로를 찾기 위한 여행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미안해요.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는…’
그 뒤는 찢어져 있었다. 마치 마지막 말을 차마 끝내지 못한 것처럼, 혹은 누군가 고의로 지워버린 것처럼. 글귀의 마지막 문장은 미완성인 채로 현우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게요’라는 말에 현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로 사라져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현우는 찢어진 종이 조각을 꼭 움켜쥐었다. 이것은 단순한 단서가 아니었다. 296개의 장을 넘어선 지금, 이것은 그의 심장 깊숙이 박힌 확인 사살이었다. 서연은 살아있었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찾는 여행’ 중이었다. 그렇다면, 현우의 여행도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이제야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현우는 목이 메어 간신히 말했다. “이것만으로도, 저에겐 전부입니다.”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우는 서점을 나섰다. 오후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미완의 글귀처럼 끝없는 질문과, 동시에 더욱 굳건해진 결심이 맴돌았다. 서연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를 떠나게 한 ‘여행’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언젠가’는 언제쯤 올까?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 조각이 바스락거렸다. 그는 다시 한번 서연의 흔적을 쫓아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닌, 그녀의 마음 한 조각을 품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