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290화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시온은 눈을 떴다. 낡고 텅 빈 미래 도시의 잔해 속, 스러져가는 한 건물 안에서였다. 어둠이 걷히며 희미하게 드러나는 풍경은 늘 그랬듯 낯설고도 익숙했다. 녹슨 철근들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한때는 눈부셨을 홀로그램 광고판의 잔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지난밤의 꿈은 파편처럼 흩어져 잡히지 않았지만, 가슴 한편에 묵직한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한 불안감만은 생생했다.

“또 그 꿈인가…” 시온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자신은 늘 어딘가를 쫓기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진 인물, 섬광처럼 터지는 푸른 에너지, 그리고 귀를 찢을 듯한 비명 소리. 하지만 그 무엇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마치 안개 낀 호수처럼, 손을 뻗으면 사라지는 허상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폐허 그 자체였지만, 어딘가에서 발산되는 미약한 푸른빛이 시온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 빛은… 며칠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미약한 파동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잊힌 옛 친구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은 느낌. 시온은 배낭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을 따라다닌 유일한 동반자, 오래된 가죽 배낭이었다. 그 안에는 이제는 작동하지 않는 타임 코어의 잔해와 몇 권의 낡은 책, 그리고 정체 모를 사진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시간의 메아리

빛이 발원하는 곳은 도시의 가장 오래된 구역이었다. 한때 이 행성에서 가장 번성했던 문명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온통 모래와 먼지로 뒤덮인 거대한 돔형 구조물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시온은 돌무더기를 헤치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딘가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속삭임 같기도 하고, 울부짖음 같기도 한 소리. 그것은 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환청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빛의 근원에 도달했다. 돔형 구조물의 심장부에 위치한 원형의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깨어진 대리석 기둥이 솟아 있었고, 그 위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투명한 돌이 놓여 있었다. 돌은 내부에서부터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깜빡였다. 시온은 홀린 듯 그 돌에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차가우면서도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주위의 폐허가 사라지고, 눈부신 빛이 시온을 감쌌다. 환영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했다. 귀청을 때리는 거대한 기계음,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수많은 문자와 방정식들, 푸른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홀. 그 홀의 중심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어깨에는 시온과 같은 문양이 새겨진 배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그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온은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비장하고, 눈빛은 어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억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환영 속의 자신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시온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나 친숙한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파편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실패한다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과거의 잔영

환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투명한 돌은 여전히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 빛은 이제 시온의 심장 박동과 함께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팠다. 마치 수천 개의 파편화된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익숙한 얼굴, 잊고 있던 이름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명감. 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조각나 있었고, 퍼즐처럼 맞춰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시온!”

그때였다. 돔 입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엘리가 망설임 없는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엘리는 이 시대의 사람이었다. 시온이 이 행성에 불시착한 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자, 시온의 혼란스러운 여정을 묵묵히 지켜봐 준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역력했다.

“엘리… 난… 난 방금…” 시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환영의 충격과, 그 속에서 들려온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엘리는 시온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갑자기 이쪽으로 엄청난 에너지 파동이 감지돼서…” 그녀는 시온의 손에 들린 투명한 돌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저건… ‘기억의 조각’인가? 전설로만 전해지던…”

“기억의… 조각?” 시온은 힘겹게 물었다. “이게 뭔데?”

엘리는 돌을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우리 문명의 고대 기록에 따르면, 시간 여행자들이 기억을 저장하고 복원하는 데 사용했던 장치라고 해. 하지만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함부로 다루면 정신이 파괴될 수도 있다고…” 엘리의 목소리는 점차 가늘어졌다. “네가 이걸 활성화시킨 건가? 시온, 뭘 본 거야?”

시온은 기억의 조각을 든 손을 쳐다보았다.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깜빡였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조각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거대한 임무, 막중한 책임감, 그리고… 배신감. 갑자기 한 장면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신과 똑같은 배지를 단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모습. 그 뒤로 피어오르던 붉은 섬광. 그리고 끝없이 떨어지던 어둠… 그 순간 기억의 조각이 강력한 에너지 파동을 뿜어내며 시온의 손에서 튕겨 나갔다.

“크아악!” 시온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조각난 기억들이 이제는 고통이 되어 전신을 찢는 듯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던 시간은 끝났다. 이제 그 모든 조각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어둠과 절망으로 가득 찬, 잊혀진 과거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엘리가 당황하며 외쳤다. “시온! 정신 차려! 너무 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아! 위험해!”

시온은 엘리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녀의 말은 닿지 않았다. 눈앞에는 거대한 시공간의 문이 열리는 환영이 펼쳐졌다. 그 문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너는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너는 너의 임무를 완수하든가… 아니면, 네가 파괴하려던 미래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그 목소리는… 환영 속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던 그자의 목소리였다. 시온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기억의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폐허가 된 돔 전체를 집어삼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또 다른, 그러나 섬뜩하게 익숙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시온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차갑고 잔혹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