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음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창밖을 할퀴는 오후였다. 창가에 기대어 선 지우의 눈앞에는 끝없이 쏟아지는 눈송이가 흐릿하게 비현실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완벽한 결정체인 듯, 저마다의 빛을 머금고 춤추듯 내려앉는 눈꽃을 바라보며 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닿을 수 없는 그 하얀 환상처럼, 지난 세월 붙잡으려 애썼던 수많은 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탁자 위에는 방금 배달된 등기우편 봉투가 무겁게 놓여 있었다. 붉은색 글씨로 찍힌 ‘최후 통보’라는 단어가 마치 심장에 박힌 얼음송곳처럼 차갑게 다가왔다. 병원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세연이의 마지막 치료를 위한 기금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절망적인 고지. 그들은 세연이의 작은 손을 놓아버리겠다는 비정한 통보를 해왔다.
지우는 눈을 감았다. 아득한 기억 속, 첫눈이 내리던 그 겨울날의 약속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눈송이가 그림자처럼 흩날리던 작은 공원 벤치. 앳된 얼굴의 현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지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세연이를 지켜줄 거야. 우리 세연이, 꼭 건강하게 웃는 모습 볼 수 있을 거야. 약속해. 이 눈이 녹지 않으리란 듯, 우리 마음도 변치 않을 거라고.”
그때의 현우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고, 그의 목소리는 눈꽃처럼 부드러웠다. 그 약속은 두려움에 떨던 어린 지우에게 세상의 모든 추위를 막아줄 따뜻한 담요 같았다. 그리고 그 약속은 세연이를 살리겠다는 지우의 유일한 이유이자, 지난 십여 년간 그녀를 지탱해온 굳건한 기둥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기둥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현우는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냉혹함 속에서 홀로 버티고 있는 지우에게, 그는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에도 지우는 그의 약속을 믿었다. 그가 언젠가 돌아와 함께 이 짐을 나누어 질 것이라고. 그러나 시간은 잔인하게 흘러갔고, 세연이의 병세는 점점 깊어졌다.
지우는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안에 꽉 쥔 휴대폰 액정에는 현우의 이름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눌러도 닿지 않는 이름.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미안하다’는 단 세 글자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녀는 그를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어딘가에서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혹시 그가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일까 하는 막연한 죄책감도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갑자기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옆집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우 씨,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 세연이 병원 가는 것 못 봤는데…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지우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아주머니. 괜찮아요. 세연이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오늘은 집에서 쉬려고요.”
하지만 아주머니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녀는 지우의 손에 들린 병원 서류 봉투를 힐끗 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요즘 날씨도 추운데, 마음고생이 심하겠어요. 내가 뭐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지우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 녹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 짐은 아무도 대신 들어줄 수 없는, 그녀만의 몫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지우는 세연이가 잠든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작고 가녀린 세연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미미한 열꽃이 피어 있었지만, 희미하게 웃고 있는 듯한 입술은 여전히 순수했다. 지우는 세연의 작은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그녀의 손바닥에 퍼졌다.
“세연아… 엄마가… 엄마가 널 꼭 지킬 거야.” 지우는 흐느껴 울지 않으려 애썼다. 작은 아이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세연이를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했다. 현우와의 약속, 그리고 세연이에게 약속했던 미래. 그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탁자 위에 놓인 병원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마지막 희망처럼 쓰여 있는 문구. ‘해외 희귀병 연구 기금 신청 절차’… 그것은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려왔던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우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눈을 감자 다시금 그날의 눈꽃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현우의 따뜻한 손, 굳건한 약속.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눈꽃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그 약속만은 얼어붙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굳게 결심한 듯, 휴대폰을 들었다. 현우의 이름 대신, 다른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진 마지막 인맥, 세연이의 주치의였다. 어쩌면 그에게서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서. 늦은 밤,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리처럼, 그녀의 앞길은 여전히 막막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발걸음은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새벽이 오기 전, 다시금 눈발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고통을 잠시 덮어두려는 듯, 세상은 고요한 하얀색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지우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녀의 외로운 투쟁은, 다시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