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302화

첫 번째 바람, 기억의 속삭임

지혜는 마루 끝에 앉아 봄볕을 쬐고 있었다. 해가 길어진 만큼 따스함도 깊어져 한낮의 마당은 연둣빛과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화나무는 이미 꽃잎을 떨궈 푸른 잎을 틔우기 시작했고, 그 아래에는 작약이 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옅은 꽃향기가 실려 와 지혜의 코끝을 간질였다.

긴 세월을 혼자서 견뎌온 그녀의 삶에서, 봄은 늘 양면성을 지닌 계절이었다. 생명의 약동은 지친 영혼에 위안을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약속은 과거의 상실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곤 했다. 특히 이런 날이면, 까마득히 먼 옛날, 여덟 살 남짓한 어린 동생 민준과 함께 흙장난을 하던 그때의 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민준은 손재주가 좋았다. 툭하면 주워온 나뭇가지로 작은 새나 동물 모양을 깎아 지혜에게 선물하곤 했다. 그의 작은 손끝에서 투박하지만 정성스러운 형상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지혜는 늘 감탄했다. 특히 그는 제비 조각을 좋아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언젠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라는 맹세처럼 늘 제비를 깎았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난세의 휩쓸림 속에서 어린 동생은 지혜의 손을 놓쳤고, 그 후로 수십 년간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지혜의 가슴 한켠에는 민준을 잃어버린 그날의 후회가 영원한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 가시 위에 단단한 껍질이 생겨 아픔은 무뎌졌지만, 봄이 올 때마다 그 껍질이 얇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다.

지혜는 감은 눈을 뜨고 마당을 바라보았다. 멀리 담장 너머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변치 않는 자연의 소리들이 그녀의 오랜 상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제는 그저 모든 것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기억이 되었다.

두 번째 바람, 뜻밖의 방문

그때였다. 삐걱이는 대문 소리와 함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혜 아씨, 계신가요?”
최 노인이었다. 굽은 허리에 느릿한 걸음이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젊은 시절처럼 총기 넘쳤다. 최 노인은 이 마을에서 꽤 오래 살았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온갖 소식과 물건을 나르는 걸 업으로 삼았다. 지혜의 집에 들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지만, 그가 올 때면 언제나 뭔가 소소한 이야깃거리라도 들고 오는 법이었다.

지혜는 마루에서 내려와 그를 맞았다. “노인장, 무슨 일로 이리 먼 길을 오셨어요?”
최 노인은 허허 웃으며 손에 든 작은 보따리를 내밀었다. “별안간 생각나서 들렀지요. 이거 좀 보세요. 며칠 전 읍내 장터에서 우연히 얻은 건데, 지혜 아씨 생각이 나더이다.”

보따리 안에는 작고, 낡고,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한 나무 조각이 들어있었다. 지혜의 손에 닿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은 한 마리의 제비였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생동감 넘치는 제비. 그리고 그 제비의 한쪽 날개는 미세하게 비틀려 있었고, 눈은 너무나도 익숙한 방식으로 깎여 있었다.

“이…이것은…” 지혜는 조각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최 노인은 지혜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디 시골 장터 귀퉁이에서 흘러나온 것 같더이다. 솜씨가 어찌나 좋던지. 웬 노인장이 깎았다고 하는데, 제 이름을 안 밝히고 그저 ‘제비 할아범’이라고 불린다는군. 늘 제비만 깎는다고.”

지혜는 말을 잃었다. 비틀린 날개, 특유의 눈 조각. 어린 민준이 처음 제비를 깎을 때마다 꼭 한쪽 날개를 조금 비틀게 만들곤 했다. 어설픈 손재주 때문에 생긴 그의 특징적인 실수였다. 지혜는 어린 민준에게 “나중에 세상에 하나뿐인 너만의 제비가 될 거야.” 라고 말해주곤 했다. 그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노인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혜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최 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지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고… 뭐, 어디 두메산골에서 혼자 산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귀한 건 아니지만, 그 노인장이 어릴 때 다친 상처 때문에 왼쪽 눈썹 위에 희미한 흉터가 있다고 하더군요. 나이가 들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햇빛 아래서 보면 보인다고.”

세 번째 바람, 깨어나는 희망

왼쪽 눈썹 위의 희미한 흉터.
어릴 적 민준이 감나무에서 떨어져 생긴 그 상처.
지혜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수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틈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스며들며 희미한 빛을 밝혔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다. 너무나도 맹렬해서 오히려 두려운 빛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얼마나 많은 실망을 겪었던가. 민준과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를 볼 때마다, 민준과 비슷한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덧없는 기대를 품었다가 결국 쓰라린 실망감에 주저앉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기로 스스로를 가둬왔다. 마음을 닫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작은 나무 제비는, 이 작은 소식은, 그녀의 굳건한 벽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손안의 제비는 차갑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 과거의 아픈 추억과 현재의 희미한 가능성 사이를 오가며 지혜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만약… 만약 이것이 민준이라면?’
그 물음이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울렸다. 애써 외면했던 간절함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 번의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이 오랜 기다림의 끝이 또 다른 허무함이라면, 과연 그녀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마당의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냈다. 새소리가 지저귀고,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세상은 변함없이 아름다웠지만, 지혜의 내면은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혜는 손에 든 제비를 꽉 움켜쥐었다. 어린 시절 민준의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한 조각이었다. 민준이, 이 제비가, 다시 돌아오라는 희망을 전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봄바람은 수십 년을 기다린 끝에, 그녀에게 가장 간절했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불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노인장…” 지혜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오랜 망설임과 두려움 끝에, 단단한 결심이 그 목소리에 실렸다. “그 노인장이 계신다는 곳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최 노인은 그제야 지혜의 얼굴에 어린 결의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는 마당 끝, 담장 너머의 먼 산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 어딘가에, 어쩌면 수십 년 전 헤어진 동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석양이 서서히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처럼 환한 희망이 가득했다.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