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306화

첫눈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날의 서늘하면서도 따스했던 공기, 손바닥에 녹아내리던 눈꽃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눈빛으로 맺었던 굳건한 맹세. 한지우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하얀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흩날리는 눈발은 마치 그날의 시간을 다시 불러오는 듯했다. 매년 겨울, 첫눈이 올 때마다 지우는 그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올해는 그 어떤 해보다도 그 약속이 무겁게 느껴졌다.

탁자 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잡았지만, 온기는 손끝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텅 빈 기분만이 지우의 심장을 짓눌렀다. 이준호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이는 투명한 얼음 벽으로 가로막힌 듯했다. 그는 분명 같은 공간에 존재했지만, 지우가 알던 그 시절의 준호는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변해 있었고,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 믿었던 지우의 기대는 차가운 눈밭 위에 흩뿌려진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지우야, 이모가 따뜻한 호박죽 끓여왔어. 몸이 좀 녹을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이모의 따뜻한 목소리에 지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는 언제나 지우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모가 내어준 호박죽 그릇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향기는 잠시 지우의 복잡한 마음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준호의 그림자가 다시 마음을 덮었다.

어제였다. 준호가 갑자기 지우를 찾아왔던 것이. 오랜만에 마주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어딘가 모르게 지쳐 있고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우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준호야, 괜찮아?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수없이 연습했던 질문이었지만, 막상 그의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자 목소리가 떨렸다. 준호는 지우의 눈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밤새도록 지우의 옆에서 뒤척이며 불안한 숨소리를 내뱉을 뿐이었다.

지우는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의 차가운 벽 앞에서 자꾸만 좌절했다. 그 약속은, ‘다시 첫눈이 내리는 날, 꼭 건강한 모습으로 너의 곁으로 돌아와 너의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겠다’는 약속은, 그에게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의 준호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는 있을까.

그때,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준호였다. 그는 눈이 내려앉은 코트 차림 그대로 거실에 들어섰다. 그의 어깨와 머리카락에는 하얀 눈꽃들이 송이송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독을 짊어진 듯했다.

“어디 다녀온 거야, 준호야?” 지우는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준호는 지우의 시선을 피하며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그의 움직임은 무겁고 느렸다.

“할 일이 좀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 말이 거짓임을 지우는 직감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마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말이다.

이모가 조심스럽게 준호에게 다가갔다. “준호야, 몸은 괜찮니? 얼굴이 많이 안 좋구나.”

준호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이모. 걱정 마세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의 지친 영혼을 감출 수 없었다. 이모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지우와 준호를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지우는 준호의 앞에 섰다. “준호야, 나한테 말해줄 수는 없어? 뭐가 그렇게 힘든 거야? 왜 그렇게 나를 밀어내는 건데?” 지우의 목소리에는 서러움과 함께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그의 두 손을 잡으려 했지만, 준호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몰라도 돼.” 그의 눈빛은 싸늘했다. 지우의 마음은 날카로운 얼음에 베인 듯 아려왔다.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고?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이 얼만데! 우리가 했던 약속은…!” 지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호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 약속, 이제는… 지킬 수 없을지도 몰라.”

그의 말은 지우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는 비수와 같았다. 지우는 뒷걸음질 쳤다. 믿을 수 없었다. 그 모든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그 약속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무슨 소리야, 준호야. 그럴 리가 없어. 너는… 너는 나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잖아. 함께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겠다고 했잖아!”

준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미안해, 지우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네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 누구일까. 지우는 눈물을 닦으며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차가운 눈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세련된 코트 차림의 그는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이었다. 바로 강태민이었다.

강태민은 지우와 준호의 어릴 적 친구였다. 준호가 사라진 후, 태민은 지우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주었다. 그의 따뜻함은 지우에게 큰 위로가 되었지만, 언제나 준호의 자리만은 비워져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태민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한 친구의 시선이 아니었다.

“지우야, 준호야. 오랜만이야.” 태민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준호에게로 향했다. 준호는 태민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두 남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날 선 기운이 감돌았다.

“태민아… 갑자기 어떻게…” 지우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태민은 지우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찾아왔어. 그리고… 할 말이 좀 있어서.” 그의 시선은 다시 준호에게로 옮겨갔고, 그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지만… 내가 전해줄 소식이 있어.”

준호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태민이 꺼낼 말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지우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모의 방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모도 이미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첫눈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과연 깨져버릴 운명인 걸까.

태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준호야, 너와 나는 같은 배를 탔었지. 네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진실, 내가 모두 알고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리고 이제, 지우도 그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준호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태민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지우는 이모의 방으로 흘러나오는 흐느낌, 그리고 눈발이 휘날리는 창밖의 풍경을 번갈아 보며, 이제야 모든 진실이 차가운 칼날처럼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첫눈은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덮인 세상만큼이나 차갑고 잔인한 진실이 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