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02화

오래된 약속의 그림자

그날 저녁, 지우는 낡은 목조 테이블에 기댄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희미하게 스러져 가는 하늘은 회색빛과 옅은 보랏빛이 뒤섞여 마치 오래된 수채화 같았다. 공기 중에는 늦가을 특유의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감돌았고,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조차 오늘은 유난히 멀고 무겁게 느껴졌다.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먹구름 같은 감정은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최근 며칠간 지우를 짓눌렀던 것은 어쩌면 자신에게만 유효했던 오래된 약속의 무게였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떠오른 파편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지우의 모든 일상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 약속은 마치 발목에 매달린 족쇄처럼 자유로운 걸음을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위로

“야옹.”

작고 나지막한 소리. 언제나 그랬듯, 지우의 마음이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소리였다. 창턱에 앉아있던 달이의 녹색 눈동자가 지우를 향해 살며시 깜빡였다. 마치 ‘또 혼자 슬픔에 잠겨 있었느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달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앉아 있었다. 털은 윤기 나고 부드러웠으며, 얼룩무늬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났다. 지우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지만, 입꼬리는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저 달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이는 망설임 없이 지우의 손에 머리를 비비며 낯간지러운 애교를 부렸다. 부드러운 털이 손등을 간지럽혔지만, 지우의 마음속 먹구름은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

“달이야…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모르는 게 좋을 때도 있어.”

지우는 달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달이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우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편안하게 몸을 웅크렸다. 지우는 따뜻한 달이의 무게감을 느끼며 잠시나마 무거운 생각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나는 말이야… 잊었다고 생각했어. 정말로.”

지우는 달이의 귀 끝을 만지작거리며 털어놓기 시작했다. 달이는 가만히 지우의 눈을 응시했다. 마치 지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흐릿한 기억 속의 그림자

지우의 머릿속에는 십 년도 더 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지우는 한없이 어리고, 세상을 긍정으로만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열정으로 가득했지만, 때로는 무모했고, 상처받기 쉬웠던 시절. 누군가에게 주었던 약속, 함께 꾸었던 꿈. 그것은 한때 지우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지만, 동시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짐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 나는… 너처럼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그래서 너무 쉽게 약속했어.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달이는 지우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우는 마치 달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더 깊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는 함께 빛나는 별을 찾기로 했어. 저 어딘가에 분명히 우리만을 위한 별이 있을 거라고. 그 별을 찾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함께 그곳으로 떠나자고….”

그 약속은 순수했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했다. 빛나는 별은커녕, 눈앞의 작은 불빛조차 희미해지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결국 그 사람은 떠났고, 약속은 지우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았다. 혼자 남은 지우는 약속의 무게에 짓눌려 한동안 허우적거려야 했다.

“나는 그 별을 찾지 못했어, 달이야. 그리고…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내가 너무 무책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거든.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모르겠어. 내가 정말 그 별을 찾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저 잃어버린 과거에 갇혀 있는 건지….”

지우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달이의 부드러운 털 속에 얼굴을 묻자, 미세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 온기 속에서 지우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깨달았다.

달이의 침묵하는 지혜

한참을 그러고 있던 지우가 고개를 들자, 달이는 지그시 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지우의 뺨에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털이 지우의 촉촉한 뺨에 닿았다. 그것은 어떤 말보다도 진실된 위로였다.

“네가 뭘 아냐고… 바보 같은 나를 위로해 주는 거니?”

지우가 묻자, 달이는 가늘게 눈을 뜨며 작게 울었다. ‘야옹’ 하는 소리는 마치 ‘나는 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달이는 지우의 무릎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앉았다. 지우는 달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몸짓이었지만, 거기에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의지가 느껴졌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희미하게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우의 눈에는 그 별들이 과거의 약속처럼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달이는 그 별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마치 그 별들이 지척에 있는 양 그저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달이가 다시 한번 ‘야옹’ 하고 길게 울었다. 그리고는 뒷발로 창턱을 긁적이며 지우를 돌아보았다. 지우는 그 행동이 마치 ‘네가 찾는 별은 저기에 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우가 찾던 별은 저 멀리 밤하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별은 지우의 마음속에, 혹은 지우의 발밑에, 혹은 지금 이 순간 달이의 따뜻한 온기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새로운 별을 향하여

지우는 천천히 달이에게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함께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가로등 불빛과 멀리 반짝이는 빌딩의 불빛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실패한 건 아니겠지, 달이야?”

달이는 지우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우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어왔다. 그 작은 무게감 속에서 지우는 이상한 평온함을 느꼈다. 과거의 약속이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빛나는 별을 찾지 못해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빛을 찾아 헤매는 과정 그 자체였고,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이었다.

달이의 털을 쓰다듬는 지우의 손길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지우는 새로운 별을 찾아 나설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그 별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빛을 따라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창밖의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우의 마음속에는 달이의 온기처럼 따뜻한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오래된 약속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있겠지만, 이제는 그것이 지우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한때 지우를 빛나게 했던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동반자는 언제나 그랬듯, 지우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길고양이 달이일 것이었다.

달이는 지우의 손길에 몸을 비비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잘했어. 이제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