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희뿌연 겨울 햇살이 가늘게 스며들어 차가운 공기마저 온화하게 감싸는 듯했다. 강현우는 박서연의 침대 곁에 앉아 잠든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조용히 그러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미약했지만, 그에게는 세상의 어떤 불꽃보다도 뜨겁게 다가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온기만큼이나 무거운 진실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서연은 몇 주 전부터 다시 기력을 잃어갔다. 희귀 신경 퇴행성 질환은 그녀의 생명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그들이 그토록 매달렸던 새로운 치료법은 더 이상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서연은 꿈속에서 어떤 세상을 헤매고 있을까. 그 세상 속에서 그녀는 평온할까, 아니면 다가올 알 수 없는 미래를 예감하고 있을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이지훈 의사가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도 깊은 피로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현우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은 현우를 다른 빈 병실로 이끌었다. 침묵이 병실의 차가운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지훈은 망설이는 듯 펜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간
“현우야…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어.” 지훈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현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서연이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어. 다음 주를 넘기기가 쉽지 않을 거야.”
현우는 눈을 감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지훈의 입을 통해 확인되는 순간 그 잔인한 현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 거냐?”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의학적 가능성을 다 찾아봤어. 딱 하나… 단 하나, 마지막 희망이 있어.” 그의 시선이 현우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 속에는 동정과 책임감,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었다.
“임상 단계의 치료법인데… 성공 확률이 극히 낮아. 그리고… 이건 내가 너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부분인데…” 지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서연이를 살릴 유일한 방법은… 너의 기증이 필요해. 신경 조직 재건을 위한 특수 세포를 이식해야 하는데, 너 말고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공여자가 없어.”
현우는 그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그의 뇌리 속에는 이미 오래전 지훈에게 들었던 경고가 스쳐 지나갔다. 가장 완벽한 공여자는 가장 가까운 혈연이거나… 운명처럼 엮인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를 수도 있다는 것.
“무슨 대가인데.” 현우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자료 몇 장을 현우에게 건넸다. 현우의 시선이 자료 위에 꽂혔다.
– 신경 조직 이식 성공률: 17%
– 공여자에게 발생 가능한 부작용: 중추 신경계 손상으로 인한 인지 능력 저하, 특정 기억 소실 가능성.
– 특히… ‘특정 시점 이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질 위험이 높음.
현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특정 시점 이후의 기억’.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함께했던 모든 시간, 모든 추억, 그리고… 그 약속이 담긴 겨울날의 기억이었다. 서연을 살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고 맹세했지만, 이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잔인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머릿속에서 오래된 필름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얇은 코트만 걸친 채 병원 벤치에 앉아 있던 어린 서연의 모습.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기대어 눈물을 쏟아내던 날.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그날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중얼거렸다. “현우야, 나… 이대로 사라지는 걸까?”
그때의 현우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의 심장은 굳건했다. 그는 서연의 차가운 손을 잡아 자신의 외투 속으로 넣었다. 하얀 입김이 피어오르던 그 순간, 현우는 온 세상이 들으라는 듯 맹세했다.
“절대. 절대 혼자 두지 않아. 내가… 내가 너를 위해 겨울이 되어 줄게. 어떤 눈보라 속에서도 네 곁을 지킬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서연아, 제발 약속해 줘.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살아남겠다고. 그리고… 우리 이 겨울, 이 눈꽃이 내리던 날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서연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물은 눈송이처럼 하얗게 얼어붙었고, 그 약속은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새겨진 영원한 낙인이 되었다. 그것은 현우의 삶의 이유이자, 그녀를 살리기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이 시작된 날이었다.
마지막 겨울, 마지막 선택
현우는 고통에 찬 얼굴로 현실로 돌아왔다. 지훈은 현우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다. “현우야… 서연이는 이 사실을 몰라. 그녀가 깨어났을 때, 너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녀는 더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 그 약속을… 누가 기억해야만 하잖아.”
그렇다. 누가 그 약속을 기억해야 할까. 기억이 없는 현우는 더 이상 서연의 ‘겨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현우는 다시 서연의 병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갈수록 가늘어졌고, 손끝은 차가웠다. 창밖으로는 해가 기울고 있었고, 첫눈이 내리는 듯 작은 눈송이들이 창문에 부딪혔다. 마치 그들의 첫 약속을 기억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현우는 서연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지훈아.”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고뇌를 이겨낸 듯 단단했다. “수술을 준비해 줘.”
지훈은 현우의 결심을 읽고 눈을 감았다. “현우야… 정말 괜찮겠어?”
현우는 서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하고도 슬픈 입맞춤이었다. “괜찮아. 내가… 내가 그 약속을 잊어도, 내 심장이 기억할 거야. 서연이를 사랑했던 내 심장이… 그리고 언젠가 서연이가 다시 그 약속을 기억하게 해 줄 거야. 그게 어떤 대가라도… 내가 치러야 할 몫이야.”
그는 서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차마 들리지 않을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모든 사랑과 절규가 담겨 있었다.
“서연아… 꼭 살아남아야 해. 내가… 너를 위해 다시 겨울이 되어 줄게. 너의 영원한 겨울이… 너의 모든 것을 지켜줄게.”
창밖으로는 눈발이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던 날의 약속처럼, 차가운 눈꽃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가고 있었다. 현우는 마지막으로 서연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소중한 기억이 될지, 아니면 그에게는 영원히 잊혀질 겨울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눈빛 속에는 오직 사랑과 희생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